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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 |
[문화시평] 마한 숨쉬는 기록
관리자(2009-11-06 17:57:15)
마한 숨쉬는 기록 (9월 22일~11월 29일) 국립전주박물관 살아 숨 쉬는 마한, 우리의 뿌리를 보다 최완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 마한 사람은‘구슬을 금은보다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했다’. 이는 마한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책인d삼국지e와d후한서e에 보이는 마한 사람들의 생활상 혹은 가치관에 대한 내용이다.국립전주박물관의 특별전 <마한, 숨쉬는 기록>전을 보며 어쩌면 마한 사람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긴 흩어졌던 구슬을 다시 모아 꿰맞추는 첫 걸음이란 점에서 마한 사람을 다시 만나는 느낌이라면 너무나 감상적일까?마한은 기원전 3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369년 근초고왕 때에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d일본서기e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적인 성과를 보면, 마한 문화는 백제 영역화 이후 5세기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마한의 역사와 문화는 7~800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 이어져왔지만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금번 마한 특별전은 마한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남겨 놓은 유물들을 모아 그 숨결의 조각을 맞춰 보려는 첫 번째 작업으로 커다란 의의가 있으며, 마한의 역사와 문화에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된다.마한, 그 시작청동기시대에 한반도 서남부 지역은 소위 송국리 문화단계로서 농경을 주된 생업경제로 삼고, 부수적으로는 어로나 수렵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낮은 구릉지대에 평면을 원형으로 하는 움집을 짓고 취락을 이루며 생활했는데, 주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환호를 파거나 그 곳에 목책을 설치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삶의 공간에서 멀지않은 곳에 죽음의공간을 마련하여 석관묘나 옹관묘를 안치함으로서 삶과 죽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한편 전북의 고창이나 전남지역에서는 고인돌이 집단으로 축조되어 있기때문에 송국리 문화 중심지역과 다른 사회구조를 가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축조한집자리의 구조나 무덤구조, 그리고 그들이 사용했던 토기나 석기에서 뚜렷한 변화속도를 찾을 수 없는데, 곧 그들의사회변화가 매우 느려서 오히려 평화롭기까지 느껴질 정도이다.그러나 중국 동북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연나라에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 곧 철기문화가 한반도 서남부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록에서는“준왕이‘연’나라의 망명인‘위만’의 공격의 받아(나라를)빼앗기자, 그 좌우궁인들과 함께 도망하여 바다로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으며, 스스로‘한왕’이라 하였다”고 보이고 있다. 이때 들어오는 물질문화는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세형동검, 철기류가 한 세트를 이루게 된다. 그 가운데 철기는 농기구나 무기류를 만드는데 사용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가되고, 전쟁에 있어 살상율이 높아짐에 따라 기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곧 작은 정치체의 통합이 이루어지며 사회적으로도 복합도를 높여 나가게 되는 이른바 연맹체로서 새로운 성격의 정치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한 연맹체의 등장을 의미한다.특히d고려사』이후의 사서에서는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내려온 지역을 익산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고고학적인 조사 성과에서도 이러한 점들이 확인되고 있다. 다시말하면 고조선의 준왕이 선진적인 문물을 가지고 정착하여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된 곳이 익산지역인 것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로서는 서북지역에서 유행하던 토광묘 유적이 집단을 이루고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익산 다송리·평장리·용제동·신동리·오룡리 등과 전주 중화산동·중인리, 완주 갈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을 통해 공간적 범위를 보면 미륵산에서 모악산에이르는 지역이며 그 시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에 해당되고 있다.삼한의 으뜸 마한2세기 후반 3세기에 들어서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마한사회는 한 단계 높은 성장과 발전을 이루게 된다. 마한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던 취락이 대형화되거나, 개별 집자리들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 한곳에 오랜 기간 정착하면서 생활을 영위해 나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취락의 양상은 공동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생산력의 증가로이어지며 강력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물론 철제 농기구의 발달이 커다란 영향을 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철제 무기 가운데 둥근고리 칼과 같은 위세품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당시 마한 사회가 정치적으로 수장층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 단계에는 지역적으로 문화적 특징을 보이게 되는데, 먼저 집자리를 보면 중부지방에서는 呂자형, 凸자형의 평면형태가 나타나고, 호남지방에서는 평면형태가 방형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그 내부 구조에서도 전자의 경우출입구 시설과 부석형 노지를 갖추고 있지만, 후자에서는 배수와 관련된 벽에 돌린 도랑이 눈에 띠며, 화덕시설과 일부에서는 원시 온돌시설이 발견되고 있다. 집자리 내부에서 발견되는 생활토기들도 두 지역 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중부지방에서는 소위 중도식토기가 주를 이루는 반면에 호남지역에서는 장란형 토기를 비롯한 이중구연호 등이 출토된다.묘제에 있어서도 중서부 내륙지역에서는 주구토광묘가 축조되는 반면에호남지역에서는 주구묘가 발견되고 있다. 주구토광묘는 토광목관이나 토광목곽을 매장주체부로 두고 그 위쪽에 눈썹모양의 도랑을 파고 있는 분묘인데 천안 청당동, 청주 송절동, 공주 하봉리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그러나 주구묘는 기본적으로 네 변에 도랑을 파서 그 흙을 대상부에 올려 분구를 조성하고 그 중앙에 매장주체부를 안치하는 분묘이다. 그 분포를 보면인천에서 전라남도까지 서해안을 따라 폭넓게 발견되고 있으며, 서산 부장리, 완주 상운리, 전주 마전, 정읍 지사리, 고창 봉덕리,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대형 분구묘의 조형으로서 마한의 전통적인 분묘이다.일반적으로는 이 두 묘제를 모두 마한의 분묘로 해석하고 있으나, 필자는두 묘제의 속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주구묘는 전통적인 마한 분묘이지만주구토광묘의 경우는 달리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구토광묘의 경우, 다만 천안 일대가 마한영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확한 증거도 없이 그저 마한분묘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d삼국지e나d후한서e의 진한전의 기록에 보면“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고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마한이 동쪽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마한과는 말도 달라서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라 하고 적(賊)을 구(寇)라 한다…(후략)”라 하여 진한의 뿌리나 위치, 마한과 언어가 다른 점 등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있다. 주구토광묘의 속성은 진대의 위구묘와 유사하며, 특히 이곳에서 출토되는 곡봉형대구나 마형대구는 진대부터 유행하던 것으로 유이민 집단의상징적인 물적 증거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한이 강성한 때에 진나라의유이민들을 수용하여 일정 지역에 거주케 하면서 그들을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 활용함으로서 손쉽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한은 외래 문물을 수용함에 있어 폐쇄적이거나 경직됨이 없이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서 삼한 가운데 대표적 정치체로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한 사람들의 일상생활 마한 사람들은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경제적 부를 창출하면서 매우 질 높은 일상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경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숭배 사상이나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의 생활유물에서읽을 수 있다.먼저 철기생산이 전문 공인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교한 농기구나 무기의 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화성 기안리, 진천 산수리, 석장리에서 발견된 제철관련유적을 보면 그 규모가 대형화 전문화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고, 특히 송풍관 등 제철과 관련된 직접적인 시설물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공주 남산리, 고창 만동에서는 생활기구로 가공되기 전의 원재료인 덩이쇠가 발견되어 일정한 지역에서 생산된 철이 마한사회 전역에 유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완주 상운리에서는 망치, 집개, 모루 등 단야구 일습이 완전한 상태로 출토되어 이 고분의 피장자는 철을 전문적으로 가공했던집단에 속했던 것을 알 수 있다.마한 고지에서 발견된 토기 가마는 군집을 이루고 발견되는 예가 많은데철기 생산과 같이 전문화와 대량 생산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의구조는 중국 전국계의 영향으로 굴가마를 채용하고 있었고, 물레를 사용하여내박자와 외박자로 견고하고 정교한 토기 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토기제작기술의 진보는 각 지역으로 파급되어 손쉽게 그들이 원하는 토기를생산할 수 있었는데, 집자리 근처에서 발견되는 소수의 가마유적을 통해 알수 있다.마한 사람들은“금은보다 구슬을 좋아하여 옷에 장식하거나 귀에 걸어 치장했다”는 기록처럼 마한 유적에서는 많은 수의 구슬이 발견된다. 또한 구슬거푸집이 각지에서 발견됨으로서 한껏 멋을 부리고 생활했던 멋쟁이 마한 사람을 그릴 수 있다. 한편 광주 신창동이나 대전 월평동에서 현악기가 출토됨으로서 음악을 즐겼던 여유로운 마한인의 삶을 읽을 수 있다.최근에는 저습지 유적에 대한 발굴이 증가하면서 나무로 만든 농기구의출토 예가 증가하고 있고,논과 밭과 같은 농경유적도 확인되면서 경제적 규모와 자연 이용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농경을 주로 했던 마한에서는 곡식의 파종기인5월과 수확기인 10월 각각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농경의례가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새와 관련된 유물의 출토 예가 많은데, 새는 영혼의전달자, 농사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곡령신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해남 군곡리와 남원 세전리에서 발견된 일상용기를 축소하여 만든 아주 작은 토기들은 일종의 명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당시 의례와 관련된 유물로 보인다.백제속의 마한마한은 369년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로 보면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마한문화의 전통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최근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던 고창 봉덕리의 분구묘도 마한 분구묘이다. 과거에는 영산강 유역에서만이 마한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서산 부장리·기지리, 완주 상운리, 전주 마전, 정읍 지사리, 고창 봉덕리 등 꽤 넓은 범위에서 마한 분구묘가 확인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분구묘에서 금동 관모와 신발, 또는 중국제청자 등과 같은 최고의 위세품이라 할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출토됨에 따라 그 성격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백제 왕도인 한강유역이나 공주 부여를 중심으로 백제사를 연구하는 입장과 영산강유역의고고학적 성과를중심에 두고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재조명해 보려는입장에서 큰 차이를 읽을 수 있다.전자는 백제 중앙에서 마한의 잔여세력에게 최고의위세품을 사여해준 것으로 이들에게 일정 정도 정치적인 자율성을 인정하는소위 간접지배 방식으로 지방을 통치했다는 견해이다. 이에비해 후자는 마한의 잔여세력들이 백제의 중앙 횡혈식석실분이 채용되기 이전에는 나름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있었다는 견해로서 왜나 가야 등과도 상당한 정도의 외교활동을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마한은 기원전 3세기에 성립되어 백제 영역화 이후 5세기까지도 그 문화적 전통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던 정치체로서, 어림잡아 7~800여 년을 한반도의 주인공으로서 그 위상을 가지고 있었음은 그들이 남겨놓은 물질문화를 통해 읽을수 있다. 이렇듯 마한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면서 우리의 그림자이자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번 마한 특별전 <마한, 숨쉬는 기록>은 말없는 마한 유물들의 조각을 찾아 맞추는 첫 걸음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우리 모두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여 과거 마한 속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최완규 전라북도 문화재위원과 한국고고학회 감사,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 고고학과 교수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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