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테마기획] 간이역 사람들 1
관리자(2009-11-06 17:56:17)
우리 모두에게 쉼터였던 그 소중한 공간 관촌역
누구나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간이역. 간이역에는 언제나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한다. 모두가 떠나갈 때 묵묵히 간이역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다. 역의 돌멩이 하나, 나무 한그루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보살펴 온 간이역장. 쇠락해가는 간이역의 마지막까지도 지켜온 백종무 전 관촌역장에게서 역에 대한 추억 이야기를 들어 봤다.
임실군의 첫 역이자 슬치고개를 넘어 나오는 첫 역인 관촌역은 1931년 전라선 개통 시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해 승객을 수송하고 슬치고개에서 넘어온 열차들을 쉬게 했다.하지만 이용객의 저조로 2008년 모든 여객열차 취급이 중지됐다.관촌역의 마지막 역장인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겪은 재미난 사건을 들려줬다.“ 관촌역에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맞이방에서 쾌쾌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둘러보니 직원화장실 앞에 보따리 하나가 있더라. 거기서 생선 썩는 냄새가 나기에 버리려고 했더니 직원들이 주인이 있는 물건이니 그냥 두라면서 웃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역을 자주 이용하는 보따리장수 할머니의 물건이었다.어릴 적 시골에 있다 보면 가끔 모습을 보이는 보따리 할머니가 아직도 계신 것이다. 오래전부터 역을 창고로 이용하셨으니 할머니도 당당하시고, 직원들도당연히 이해하는데나만 모르고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고 말했다.간이역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종종 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관촌역을 찾곤 한다. 하지만 시골 간이역에 어울리지 않게 큰 관촌역의 건물 규모를 보고 대부분 실망하고 돌아가기 일쑤다. 이에 대해 그는“기능적으로 보면 관촌역은 간이역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할머니의 쉼터가 되고, 베트남에서 시집온 새댁의 나들이 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관촌역은 틀림없는 간이역이라고 강조했다.관촌역에는 간이역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오는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숨겨진 보물(?)을 보기위해 오는 사람들이 꽤나 된다고 한다. “관촌역에는 아주잘 빠진 주목나무 암수 한 쌍이 있다. 십여 년 전에 어떤 대기업에서 한 그루 당 수천만 원씩 주고 사가려 했다는 말이있을 정도로 아주 멋지게 생겼다. 역사 안에 있어서 바깥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고들 오는지 모르겠다. 수령은 한 100여년 남짓하다고 하는데, 범상치 않은 모습에보시는 분들마다 감탄을 한다”며 믿지 않겠지만 이 나무가전주역 광장에 있었다면 수억 원도 했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사사로운 추억과 행복이 가득했던 관촌역, 2008년 여객취급이 중지됐던 그날의 모습을 어땠을까. “여객취급이 중지되기 전, 새벽에여수로 가는 무궁화호와 저역에 익산으로 가는 무궁화호가왕복으로 정차했다.하지만 고정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고 이틀 걸러 한분 정도 탈까 말까 했다. 대부분 역 주변 노인들이나 인근군부대 장병, 여행하는 젊은이들이었다. 2008년 12월 1일여객취급이 중지됐는데 그 전부터 열차 이용객이 거의 없어 나나 직원들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열차가 정차하지 않은 지 두어 달이 지나서 역에 들러 차표를 달라는분들을 보니 안타까움 마음이 들더라. 최근까지도 열차를타시려고 시간 맞춰 오시는 이들이 있다”.그는 이와 관련해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라지는 많은 간이역들을 보며 시골 사람들의 발이 돼주던 역이 없어지면 그분들이 어떻게 장에 가고, 아들과 손자를 보러 가실까 걱정이 되곤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역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만감이 교차한다는그다.역장이 돼 처음으로 발령받아 그에게 더욱 특별한 관촌역. 그는 간이역이란 단순히 기차역이 아닌 어느 이에게는쉼터가 되고, 만남의 장이 되는 소중한 공간이자 추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