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테마기획] 내 추억 속 간이역 3
관리자(2009-11-06 17:56:01)
운명같은 만남과 헤어짐, 임피역을 추억하다
타키자와 노리오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2008년 1월, 군산선이 장항선으로 편입되면서 장항선 열차가 익산역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전주와 익산, 군산을 잇던 통근열차 운행이 폐지되었다. 이 열차를 이용하여 통근이나 통학을 하던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도 2004년경부터 이 열차를 통근용으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근열차의 운행이 폐지되어 정말 안타까웠다.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좀 색다른 이용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유는 내가 통근에 이용했던 역은 익산역이나 군산역과 같은 도시에있는 주요역이 아닌 하루에 평균 승객이 50명에도 미치지 않는 간이역인 임피역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만든 우연처럼 시작된 임피역과의 인연내가 처음 임피역을 본 것은 2001년 1월 23일이었다.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2000년 여름에국비유학생으로 전주에 왔다. 내 전공은 근대사는 아니었지만 구 군산세관과 구 조선은행군산지점, 구 18은행군산지점, 구 조선총독부 곡물 검사장 등 근대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군산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날은 구정 연휴 첫날이었다. 기숙사에서 걸어서 송천역까지 가서 군산행 열차표를 샀다. 작고 딱딱한 표에는‘통일호 승차권’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당시 통근 열차는‘통일호’라는 이름이었다. 요금은 1,600원. 너무 싼 가격에 놀랐고, 구정 연휴 기간 중이라고는 해도 송천역 대합실에 다른 승객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놀랐다. 군산행통일호1589열차가 15시 46분에 모터 소리를 내면서 진입해 들어왔다. 선로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컬러풀한 3량짜리 열차였다.송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가 그냥 통과해 버리는 작은 역, 이른바 간이역에도 일일이 정차했다.그때까지 통과하는 열차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춘포역에도 열차는 정차했다. 서울 방면에서 오는 하행선 열차가통과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1929년에 세워진 춘포역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격동의 20세기를 70년 넘게 잘도 버텼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익산역에서 진행 방향을 바꾼 통일호 열차는 드디어 군산선으로 진입했다. 열차는 군산평야에 깔린 단선 선로를느긋하게 달려갔다. 눈앞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과 기분 좋게 흔들리는 열차, 잠을 부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빛….그야말로 매혹적인 시간이었다. 16시 26분, 나는 임피역과 처음 대면하였다. 짧은 정차시간 동안의 차창 너머로 보는 첫 대면이었지만 그 인상은 군산에 남아있는 역사적 건축물들과 동급의 강렬한 것이었다. 도중하차라도 하여 좀더 차분히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 번 내리면 다음 열차까지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다음으로기회를 미루기로 하고 임피역사에서 눈을 떼었지만 재회가이루어진 것은 실로 3년 후의 일이었다.나와 임피역을 연결해준 것은 실로 우연의 연속이었다.첫 번째 우연은 1년의 국비 유학 기간의 만료와 동시에 나는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전주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예정대로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면 임피역에 내려설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또한 우연히 알게 된 대학 교수의 초빙을 받아 2003년부터 모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학은 임피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04년에 전주역 근처로 이사를 한일이었다.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나와 임피역을 연결해주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숨겨진 오아시스와의 만남임피역과의 재회는 2004년 4월 19일의 일이었다. 노후화하여 외견상으로는 초라한 간이역에 지나지 않았지만,역 내부에는 넓은 대합실이 있어 철도 이외의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의 번성하던 시절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1936년에 세워진 임피역사는 내게재회 기념으로 또 다른 아주 멋진 만남을 제공해 주었다.그것은 선로가 철거되어 사용하지 않게 된 하행선 홈에 서있는 큰 벚나무였다. 역무원의 이야기로는 임피역사가 세워진 것과 같은 시기에 심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가사실이라면 이 벚나무는 임피역사와 함께 70년의 역사를함께 걸어온 그야말로 절친 사이인 셈이다. 임피역의 벚나무는“여기서 일본인을 만나기는 참 오랜만이군. 내 좋은것 한 번 보여 줌세”라고 나에게 말이라도 하듯 만개한 벚꽃을 피운 가지를 웅대하게 펼치고 있었다.통근 열차는 해외 생활에 지친 나의 오아시스였다. 열차안에서의 독서나 낮잠은 최고의 휴식 시간이었고, 임피역에서 대학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시간은 좋은 운동 시간이되었으며, 한국의 농촌 길을 산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향수어린 역 건물과 벚나무가 언제나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나는 내가 담당하는 과목의수업 시간을 전부 통근 열차 운행 시간에 맞춰 열차 통근을만끽했다.그러나 임피역과 내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지속되지 않았다. 학생 수의 감소와 함께 내 담당 과목도해마다 감소해 갔다. 또 강의가 있어도 강의 시간을 움직일수 없는 교양 과목 담당이 많아져서 통근 시간을 열차 운행시간에 맞추기가 곤란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출근할 때는통학 버스, 귀가할 때는 통근 열차를 이용하는 일이 일반화되어갔다.임피역 또한 2006년 11월 1일에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역사의 창문과 매표소는 나무판자로 막혀버렸다. 넓은 대합실을 쪼개서까지 신설한 수세식 화장실도 제대로 몇 번 사용되지도 못하고 폐쇄되어 버렸다. 초라하게 노후화한 역사는 점점 더 볼 성 사나운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벚나무는 홈 반대쪽에서 임피역사에게“자네 그 꼬락서니는 뭔가…”라고 중얼거리기 라도 하는 듯 겨울이 가까워져 추운 하늘을 등지고 서있었다.통근 열차 운행이 폐지된 것은 그로부터 불과 1년 후의 일이었다.7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영원한 휴식을 취하다통근 열차는 폐지되었지만 임피역이 완전히 폐지된 것은아니었다. 그러나 아침 6시 30분발 서천행 새마을호 1172열차와 아침 7시 46분발 익산행 새마을호 1171열차 2개만이 정차하는, 아침에 열차로 외출해도 돌아올 열차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열차 운행이었다. 임피역의 여객 취급 정지는 이제 시간 문제였다. 한편 나도 자가용으로 통근을 시작했다. 차내에서 독서나 낮잠을 자면서 지내던 행복한 시간을 잃고, 역에서 걷는 운동 시간을 잃고, 가솔린 요금이라는 경제적 부담도 늘고 이 또한 말도 안 되었다.2008년 5월, 아침 새마을호 열차 운행이 폐지되어 임피역에 정차하는 여객 열차가 마침내 없어졌다. 창문을 가로막은 나무판자와 같은 판자가 역사 출입구에도 박혔다. 푸른 잎을 무성하게 피운 임피역의 벚나무는“끝났군…. 수고했네‥…”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하는 듯 통과하는 장항선 열차를 바라보면서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나도 2009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출강을 그만두어 임피를 방문할 일이 없어졌다.이 글을 쓰면서“그 젊은이 요즘은 안 오네…”라고 투덜대는 임피역 벚나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책임을 마친 임피역이지만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역으로서의 책임은 마쳤지만 앞으로도 통과하는 장항선 열차의승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이다.
타키자와 노리오키 1971년 일본 도쿄 출생이다. 일본 국립치바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현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일본어 전담 교수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