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9.11 |
[테마기획] 내 추억 속 간이역 1
관리자(2009-11-06 17:55:39)
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임피역(臨陂驛)에서 김저운 소설가, 전주영상미디어고등학교 교사 흔한 장난감 기차 하나 가지지 못했던 내 또래‘국민학교’세대 아이들에게 기차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겨우사진이나 그림을 보고 상상해 보는 정도로 마음에 품고 자랐다. 검정 고무신 앞쪽을 뒤집어 까놓고 연결하여그게 기차라면서 땅바닥에 밀고 다니거나, 아이들끼리 서로 줄줄이 매달려서“칙칙폭폭 칙칙폭폭”소리를 내며 기차놀이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 떠난 여행의 설렘이 가득했던 임피역 그러다가, 국민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고선생님’이 나를 그분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과 단짝이었던‘문선생님’도 함께였다. 선생님이 내손에 쥐어 준 비둘기호 기차표에는‘임피’라고 새겨져 있었다.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나에게 여행을 통해 무언가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수학여행도 못 갈 만큼 가난했던 나를배려하셨던가.시골아이는 몹시 설레면서도 무언가 두려웠다. 그때까지도 외가가 있는 읍내보다 더 멀리 가 본 데가없었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탄다는 호기심이 가장 컸다. 국어책에서 읽은‘기찻길 소녀’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했다.어느 시골 마을을 지날 때마다 선로변에 혼자 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소녀가 있었다. 기관사는 무료함에 지쳐서 기차를 몰고 가다가도 그 소녀를 보면반갑고 기뻐 손을 마주 흔들며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몹시 아파서 드러누워 있었다…. (그런데, 다시일어나 그 기찻길에 여전히 나와 있었다고 했던가,아니면 죽어서 기관사가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고했던가…. 이제는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는데, 기찻길 옆에 살지 않는 게 섭섭할 정도로 그동화에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으니까.고선생님 댁은 내가 사는 부안(扶安)과 별로 다를게 없는 농촌 마을이었다. 거기에서 밥도 먹고 선생님 부모님의 얘기도 들었다. 고선생님은 막내아들이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칠순에 가까웠다. 비록 선생이지만 당신들에게는 마냥 철없는 자식이어서 두 노인은 제자를 앞에 둔 아들의 처지도잊고 문선생님에게 아들의 고교시절 모습을 털어놓으셨다.“저놈이 이리(지금의 익산)로 통학헐 때는 기차를타고 다녔는디, 여학생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들었당게. 누가 쳐다보기만 혀도 얼굴이 빨개졌제. 그야말로 순둥이었고만”.그러면 선생님은 나를 의식했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학교에서 쓰는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아이고, 그때 통학열차는 노상 콩나물시루였어잉? 학생들이 다 올라타지 못혀서 옆구리 터진 김밥마냥 서너 명씩 매달려가는 일이 허다혔응께”.나는 여학교 교복을 입고 통학기차를 타고 가는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여자애들은 중학교에 가는것도 힘든 시골이어서 그런 아우성마저 부러웠던 것이다.문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분은 먼저전주로 가시고, 고선생님과 나는 다시 임피역으로가서 열차를 타고 장항까지 갔다. 그때는 그저 기차를 탔다는 데 들떠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장항선이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들은 희미해졌다. ‘임피’라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역의 이름, 플랫폼도 없이 철로를 횡단해서 열차를 타고 내리던 사람들의 모습정도나 삽화처럼 떠오를 뿐. 그런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보면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았다.“옛날엔 저기가 다 바다였단다. 개펄이었는데, 일제 때 간척사업으로 바다를 메꿔서 들판이 된 거지”.어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기만 했는데,마음속으론 무척 놀라웠다. ‘어떻게 저기까지가 다바다였을까? 어떻게 바다를 땅으로 바꾸었을까?’.내 마음을 짚었는지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여기 지명 임피는, 임할 임(臨)자에 물을 막은 둑을 뜻하는 피(陂)자야. 신라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는 바닷물이 여기까지 드나들었고, 또 둑이 있었다는 거겠지?”“임피역은 일제 때 세워진 역이다. 이곳에서 나오는 쌀을 모두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서였지”.그날, 선생님을 따라 장항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바다를 메워서 땅이되었다는, 이곳을 통해 많은 곡식을 일본으로 가져갔다는이야기. 그러나 어린 나에게는, 한없이 길게 이어지던 철로와 난생 처음 먹어본 팥빙수의 달콤한 맛이 더욱 생생했다.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임피역의 가을군산의 회현중학교에 근무하던 무렵, 토요일 퇴근길이면일부러 임피 방향으로 돌아오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길을 서둘러 오가는 일상이 지겨워서였다. 그러나 직접차를 몰고 다니는데 익숙해져서 열차를 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어느 겨울 폭설로 자가용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 전주역에서 열차를 탔다. 전주에서 군산을 오가는 3량짜리‘꼬마열차’가 하루 여덟 번 왕복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열차가 바로 고선생님 댁을 따라갔다가 난생 처음 타본 기차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스물 몇 해가 지난 후였다.까맣게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꼬마가 이제그때의 선생님이 되어 그때의 꼬마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러 간다는 게 인생의 회문(回文)처럼 새겨지기도 했다.모처럼 기차에 몸을 맡긴 채 출근을 하니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열차 안에서 아는 사람들도 더러 만났다. 전에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사람, 대학교 때 학교를 같이 다닌사람…. 잊고 있었고, 별다른 관심도 없던 이들이었는데,이상하게도 반갑고, 무언가 다정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늘 앞만 보며, 보다 더 빨리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도 없었다.아, 이제부터 가끔은 자가용을 버리고 열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딱 하나뿐인 출퇴근길은 얼마나 지루한가. 어쩌다 한 번씩 이 꼬마열차를 탔다.그러나 일과에 대한 강박관념과 일상의 피로는, 우리가꿈꾸는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출근 시간 1회밖에 없는 기차 시간에 맞추기도어려울뿐더러, 대야역에서 내리면 또 회현까지 가는 시내버스를 타기가 어려워 택시를 타야 할 때가 많았다. 폭설이내린 어느 날에는 택시도 탈 수 없어 잘못 잡아탄 시내버스를 타고 시골 마을들을 대여섯 군데 돌아 학교에 갔더니 이미 1교시 수업이 끝나버린 적도 있었다.멍한 생각에 빠져 있거나 부족한 수면으로 졸고 있을 때비슷비슷한 간이역은 역사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면 분간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려야 할 대야역을 커다란은행나무로 새겨두었는데…. 그것이 어느 날 나를 곤경에빠뜨렸다.가을 아침, 비몽사몽 하던 나는 노란 은행잎들이 눈앞에확 펼쳐지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깨었다. 그리고는 행여 못내릴세라 서둘러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그곳은 아직임피역이었다. 한 구간을 더 가야 하는데 미리 내려 버린 것이다. 임피역에도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는 걸깜박 잊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학교에 지각을 했다.그러나 임피역, 그 가을의 은행잎들은 오래오래 내 가슴을 물들여놓았다.임피역, 또 다른 <사평역>이 되다이번 가을 다시 임피역을 찾았다. 지난해부터 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군산선이 장항선에 편입되어 새마을호만 정차하게 되었으나, 그곳을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폐쇄시켰다고 했다. 예상했던대로 역의 건물은 철망에 갇혀 있어, 들어갈 수도 그 안을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늦게 핀 백일홍 꽃 사이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일제강점기 임피역이 자리한 군산선은 전라남북도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로수탈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임피역은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양식으로 건축사적 철도사적 가치가 크다. 임피역이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 역은1912년 일제에 의해 세워졌는데, 우리나라 역사(驛舍)로현존하는 두 번째 장수 건물이란다. 오랜 세월 동안 씨받이 여성의 고통과 외로움처럼 수탈의 상처를 안고 견뎌온 고난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기야, 우리 역사에서 권력과 폭력에 수탈당한 것이 비단 일제에 의한 것들뿐이겠는가?누구나 자가용을 가지게 되었고, 물건 이송도 쉬워졌으며 농촌 인구도 뚝 떨어졌다. 100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을실어 나르던 군산선이 사라지면서 이 노선에 연결되는 간이역들은 무력하게 방치되어 버렸다.작은 것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모습은, 보다 거대한 것빠른 것 편리한 것들에 대한 욕망들에 밟혀 비명도 못 지르며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폐역은, 시골집 무력한 노인처럼 쓸쓸하기 그지없었다.역사 주변을 서성이다가, 통신실 모퉁이를 돌아 겨우 선로에 다가갔다. 벌판 저쪽으로 한없이 길게 이어지다가 소실점으로 사라지는 선로 위로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만하나 둘 날리고 있었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中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삶이지만,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하면서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방이 어둠에 쌓이고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아도,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단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면서….그런데, 남루하나마 서로 기댈 수 있고, 외로운 기다림으로 지탱할 수 있었던 삶의 한 귀퉁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쓸쓸한 일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 <사평역>처럼,이 작은 역도 이제 또 하나의 <사평역>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서성여도 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김저운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1985년『한국 수필』에 수필이, 1990년『우리문학』에 소설이 당선돼 등단했다.저서로는『그대에게 가는길엔 바람이 불고』가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