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테마기획] 영화로 만나는 간이역 2
관리자(2009-11-06 17:55:23)
파인더 안에 그리움을 담다
배홍배 사진가, 시인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고 불량해 보이는 잡종견 몇 마리만이 어슬렁거리며 내 주위를 맴돈다. 낯선 곳에서 충혈된 눈빛으로 생각의 뒤통수를 노리는 개들보다 지금 내게 더 두려운 것은 서늘한 잔등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남풍에 가늘게 떠는 내 어깨 위로 내려앉으려고 하는 길 잃은 들새한 마리다. 작은 새의 슬픔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내게 남아있는 것일까. 이윽고 열차 건널목에 차단기가 내려지며 빨간 불이 켜진다. 새는 날아가고, 바르르 떨던 어깨도 멈추고 모든 것은 정지한다.그러나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열차와 함께 나는 벌써 달리고 있다. 먼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 상처 난 길을 힘겹게 지나가는지 몸속에서 뼈들이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더 긴 시간 동안 흔들려야 아픔의 모서리들이 닳아 그리움의 뼈마디들은 마음 놓고 덜커덕거리며 흔들릴 것인지, 기차가 지나간 철로 위엔 반들반들하게 닳은 그리움의 상처들이 환하게 빛난다.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간이역
차단기가 올라가고 뼈가 앙상한 늙은 수캐 한 마리가 철길을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개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을 멈추고 은밀한 성욕을 고통스럽게 견디는 듯 그를 둘러싸고있는 화려한 모텔들의 간판을 한동안 바라보고는 고개를떨어뜨린 채 다시 걷기 시작한다. 마침내 열차가 도착한다.나는 객실의 맨 뒷좌석에 깊숙이 앉아 늙은 개의 거친 숨소리처럼 자글자글 끓는 시골 버스의 엔진 소리를 엿들으며스르르 눈을 감는다.익산역에서 군산 행 열차를 타고 임피역을 향한다. 군산선의 임피역과 방금 떠나온 전라선의 춘포역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들이다. 문화재청은 이들 두 간이역을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다. 1914년에 건립된춘포역이 박공지붕 구조의 현존하는 최고(最古) 역사로서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비해, 임피역은 그보다 늦은 1934년에 지어졌지만 일제 강점기 농촌 지역소규모 간이역사(驛舍)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만경평야의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에 젖어든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고향의 들판과 실개천들이 영상처럼 스쳐지나간다. 차창밖으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옛 고향의 모습들이 오버랩된다. 실개천 물 위를 구르는 햇빛 방울들이 기억의 끝까지 일렁이고, 아버지의 눈물 같은 빗물을 삼키던 천수답 닷 마지기가 드리우는 설음의 그림자 속을 기차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갑자기 뚜우우우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부르르 몸을 떨고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날아오른다. 새들의 날개 짓으로 우수수 흩어져 떨어지는 고향의 그림자속을 열차는 목쉰 울음 하나로 헤쳐 가며 어느덧 임피역에멈춰 선다.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인데 열차를 기다리는사람들은 십여 명이 넘는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대부분 중년이 넘는 사람들이 이 시각에 열차를 타는 까닭은 도대체 뭘까. 오늘의 농촌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농촌뿐만 아니라 심심산골, 망망대해 가운데 떠있는 외딴 섬에도 서울에서 보내는 텔레비전 전파나 전화, 인터넷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고향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향을 잃어버린 그들이다. 이제 고향은 그들의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자신들의 사투리마저 잃어버린 그들이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간이역과 기차뿐이다. 별로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역에 나와 지나가는 열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임피역 낡은 화장실의 재래식 소변기에 서서 가늘어진 오줌 줄기와 잃어버린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이 합수(合水)해 망각의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침침한 눈으로바라보다, 눈물 같은 마지막 한 방울은 영원히 고향을 떠나게 되는 날 한평생을 뉘우치기 위해 꾸욱 참는다.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사람들은 열차를 타고 군산 역전시장이나 째보 선창가를 찾는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국밥집 앞이나 선창가 등지를 서성이다 돌아오는 열차에 오르면 노을에 물든 그들의 이마는 고향으로 달리는 길을 환하게 비쳐준다.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머무는 곳언제 페인트칠을 했는지 군데군데 벗겨진 박공지붕과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허름한 역 간판이 어린 시절초등학교 목조 건물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여기저기 카메라에 담는데 문득 역사 지붕의 하얀 벽돌굴뚝에 앉아 재잘거리는 참새 때들이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온다.옛날엔 우리의 고향 어디를 가든 사람보다 참새들의 수가 더 많았다. 우리 집 처마 끝에도 할아버지부터 어린 손자까지 열다섯 명이나 되는 식구들보다 많은 참새 가족이새들어 살았는데, 내게 봄은 언제나 초가의 처마 끝으로 뾰족하게 내미는 어린 참새들의 노란 부리 끝에서부터 왔다.아기 참새가 초승달 같은 부리로 간지러운 울음을 울 때마다 울타리 옆 앵두나무는 꽃잎을 하나씩 터트리고, 앵두나무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날개 공부를 하는 어린 새가 어설픈 목소리로 어미 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 풋 앵두가 하나 둘 열리는 것을 보고 나는 새의 울음 속이 궁금해 앵두나무 끝까지 올라 봄풀처럼 보드랍게 떨었다. 흔들리는 눈 안으로 왈칵 어지러운 봄 들판이 밀려 들어와 며칠 동안 현기증을 앓던 어느 해 봄날 할아버지는 앵두나무를 베어버렸는데 나의 발등엔 부스러기 같은 종기가 돋아봄 내 진물이 흘렀다. 나는 지금 저 참새들의 울음을 알아듣고 있는지도 모른다.그래, 작은 새여너는 내가 살아온 것보다얼마나 무거운 삶을견디며 살아왔느냐그런데도,그런데도 너의 눈 안엔가벼운 하늘의 길이끝없이 펼쳐져 있구나.역은 얼마 전에 내부 공사를 새로 하여 옛날의 정취가 많이 없어져 버렸다. 승강장을 따라 십여 그루가 넘게 서있던아름드리나무들도 주변 논 주인들의 민원으로 모두 베어졌다고 한다. 임피역의 상징이었던 나무들이 서있던 자리엔넓적한 그루터기들만 하늘을 받치고 있다. 나무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태양에게 생을 되돌려주며 나이테를하나씩 지우고 있는 것이다.잘려진 그루터기를 유심히 바라보니 나이테 중심으로 갈수록 삶에 몰입한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 나무든 사람이든어릴수록 삶을 치열하게 산다. 그렇지 않으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의 그루터기중심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생이 끝나는 날 저 하늘에되돌려 줄 내 삶의 단단한 중심은 무엇인가. 평생을 가벼운바람에도 흔들리며 구부러진 내 나이테의 중심은 어디인가.흔히들 말하는 유아기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옛날 고향집엔 오래 된 나무들이 여러 주 있었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고목나무들에 둘러싸여 나는 생의치열함을 배우기도 전에 이미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역사 앞뜰에 자전거가 몇 대 서 있다. 인간은 발로 걸어다니며 땅과 긴밀하고도 직접적으로 소통되는 하나의 통합체였었다. 길은 사람의 발에서 나오지만 본래 땅의 것이고자연에 속했다. 그러나 언젠가 인간은 바퀴를 만들어내면서부터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자연으로부터 이탈했다. 직립한 두 다리로 서서 걸을 때 비로소 인간인 것이다.차 안에 앉아 있으면 구부러진 두 다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가. 자전거 한 대에 올라 앉아 폐달을 밟아본다. 몸속에서 길이 주르르 흘러나오며 몸뚱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내 스스로 이동하는 것은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등 뒤로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서 하늘과 햇빛과 산들바람이 조우하는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소리는 처음 듣는 외국어나 모르는노래의 멜로디를 듣는 것과 같아서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기분이다.이럴 때면 호주머니 속 메모장에 까맣게 적힌 내 습관적인 세계 너머 있는 사실의 세계에 카메라를 겨냥하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문득 멀리서 익산으로돌아가는 열차가 렌즈 안으로 들어온다.
배홍배 2000년 월간『현대시』로 등단한 이후 시집『단단한 새』와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을 집필한 바 있다. 현재 오디오 평론가이자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