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테마기획] 영화로 만나는 간이역 1
관리자(2009-11-06 17:55:00)
떠나보냄과 잊혀짐의 아이콘
이영호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우리의 철로에도 프랑스의 떼제베처럼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3시간에 내달릴 수 있다니 편리한 세상이다.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가 빨라지면서 철로가의 작은 역들이 예전같은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시골 역들, 역무원이 아예 없는 역에서 역무원은 있어도 열차가 별반정차하지 않는 역, 퇴락한 역, 내리고 타는 승객을 볼 수 없는 고즈넉한 간이역은 세월이 흐르면서그 수가 늘어나고 사람 냄새가 섞여 구수했던 그런 시골 역 대합실엔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그래서 시골의 작은 역들이나 화물차들이 멈춰있는 간이역들은 떠나보냄이나 헤어짐의 아이콘이되었다. 급행열차를 타고 가노라면 지나쳐가는 작은 역들은 역 간판을 알아보기도 어렵게 쏜살같이스쳐간다. 모든 것들이 스쳐가는 것은 버림받음이 아니면 잃어버림일 것이다.
사랑과 슬픔이 교차하던 곳
<카페 뤼미에르>,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으로우리에게 21세기의 아시아 감성을 보여준 후샤우쉔의 <비정성시>를 잊을 수 없다. 대만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 문청이 정부군의 검거열풍을 피하여 열차에서 내린 곳은 어느바닷가 간이역이었다. 문청은 청각장애인이었지만 장개석 정권에 대항하던 민주인사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문청은 얼마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은 후 검거되어 사라진다. 그들이 열차에서 내려서 있던 간이역 플랫폼은슬픈 역사가 할퀴고 간 자리였다.전남 곡성에서 촬영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원빈과 장동건을 태워 보냈던 그 비극의 장소도 간이역이었다. 외세에의해 병적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경인선 철도부설로부터 시작되었고 철도 부설은 지적 조사로, 헌병 주둔과 토지 수탈로 이어졌다.군산역-개정역-지경(대야)역-임피역-오산역-익산역-춘포(대장)역-삼례역-동산역-감수(북전주)역-송천역-전주역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역은 간이역이 되었다. 일본의 강점 시기 미곡 수탈을 위해 설치된 임피역은 문화재가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간이역은 사랑과 슬픔이 교차하는 마음의 고향이 돼버린 것이다.최근의 영화뿐만 아니라 고전적 영화들에서 간이역은 자주사람들의 감성을 울려왔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그는 말년에 자신의 반문화적 사상을 실천하고자 자신에게 얽어매진온갖 굴레를 벗어던지고 집을 떠나 유랑하던 중, 이름 없는시골 간이역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여러 소설들이영화화된 바 있다.중학생 시절이었던가. <애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비비안 리가 주연한 쥬리앙 듀비비에 감독의 <안나 까레리나>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남편과 젊은 연인인 장교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 안나 까레리나는 그가 탄 열차가 잠시 멈춘 어느 간이역에 내려 타고 온 열차에자신의 몸을 던진다. 간이역은 버림받은 인생이 영영 머무는곳인가.여러 해 전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와 살리나스를방문한 적이 있다. 온통 채소밭이 아니면 과일 밭으로 펼쳐져있는 곳, 그곳은 존 스타인 백이 살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의소설들,『 분노의포도』,『 캐널리로우』,『 에덴의동쪽』들이쓰였다. 살리나스는 우리식으로 작은 시골 마을이다. 골프와 예술 활동으로 유명한 도시 몬트레이와는 모든 점에서 다른 마을이다. <이유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에덴의 동쪽>의 아버지, 아담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둘째 아들 칼렙 역의 제임스 딘. 남편 아담과 두 아들들을버리고 집을 나간 갈렙의 어머니는 살리나스에서 조금 떨어진 몬트레이-근대도시로의 변화가 빠른-에서 매춘업으로 재물을 모으고 있었으나 폐인에 가까웠다. 칼렙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오고가는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 왕래한다. 그가 열차에서 내린 곳은 살리나스라는 나무 팻말만 있는 간이역이었다. 간이역 살리나스는 어머니를 잃은 곳이며 어머니를 찾아 나선 곳이다.
희비극이 오가던 간이역
우리는 영화의 열차장면이라 하면 처참했던 나치의 유대인 수송열차 장면들을 먼저 떠올린다. 아우슈비치 죽음의수용소로 유대인을 호송하기 위해 화물열차가 서는 곳은 대개 이름 없는 간이역들이었다. 표정 없는 유대인의 모습들은 <쉰들러리스트>가 아니어도 쉽게 떠오르는 상실과 죽음의 장면들이다.프라하의 봄이 스탈린주의의 강점으로 끝이 났던 체코에는 유수한 영화 명장 감독들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소설가 밀란 쿤델라는 프랑스로, 밀로스 포만은 미국으로 망명을 가버렸지만 영화 <줄위의 종달새>의이리 멘젤은 폭압의 조국에 끝까지 그대로 남아 견디기 어려운 폭정 속에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비극적 코미디 영화를 창조해 냈다. 그의 <가까이서 본 기차>는 시골작은 마을의 간이역-역장도 있고 역원도 있지만 대개의 열차들은 그 역을 지나쳐간다-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희극과비극의 절묘한 조화로 전쟁을 다룬 아름다운 영화로 극찬을받고 있다.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보다 더 희극적이며 비극적인 매력을 발산한 영화다. 견습 철도원 밀로시는여자 친구를 만족시키지 못해 고민이다. 어찌하면 진짜 남자가 될 수 있는가. 한편 철도원 선배는 여자들과 로맨스를즐긴다. 어느 날 선배가 하는 말, 폭탄을 적재한 독일군 화물차가 그들의 역을 지나간다는 말이다. 선배는 폭약을 준비하지만 고소를 당해 조사를 받고 있다. 독일군의 폭약 열차가 다가온다. 앞뒤를 모르는 밀로시는 애인과의 약속을미루고 지나가는 폭약 열차에 선배가 준비한 폭발물을 던진다. 그러나 밀로시는 독일군이 쏘아대는 총알에 쓰러져열차에 추락하고 독일군의 열차는 간이역을 빠져나간다.조금 뒤 잔잔하던 간이역에 폭음과 함께 폭풍이 밀려왔다.
마치 원폭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한 시골 간이역의 체코 사람들은 희색만면이다. 끝 장면은 극치다. 나치 독일시대 체코의 어느 시골 간이역은 아름다운 청년을 잃고 그의 사랑을얻은 희비극의 장소가 되었다.애환이 교차하는 기억을 간직하는 곳우리들 가까이 있는 간이역들 역시 애환이 교차하는 기억을내뱉는 곳이다. 최진실과 박신양이 사랑을 싹틔우던 곳, 북한강 물결을 따라가는 길목의 경강역, 그리고 <그 해 여름>에서 수애와 이병헌이 서로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수내리 간이역 역시 사랑을 얻고 사랑을 잃는 잊히지 않는 장소다.5·18의 상처가 드러난 <박하사탕> 주인공 설경구가 철교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마주하며“나 다시 돌아갈래!”외마디 고함치며 외친 그곳. 충북선 철길, 깊은 계곡을 따라 가다가 터널을 지나노라면 진소천 철교가 나온다. 바로 그곳이방황과 떠남의 철길이다. 전남과 경상도를 잇는 철길, 전남보성역 곁에는 열차가 설듯하다가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아주 작은 간이역이 있다. 그 곳이 <여름 향기>에서 손예진과송승헌이 이별한 명봉역이다.동해 맑은 바닷가에 아주 근접한 그 이름도 아름다운 정동진역, 지금은 그 운치가 흐트러져 있지만 해맞이 날이면 수만 명이 모여든다는 그곳은 비극적 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준곳이다. 본래 한적하고 이용객이 주민 정도였던 작은 어촌간이역이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혜린이 사복경찰관에게 체포당해 가는 인상 깊은 장면은 바로 정동진역을 만남과 떠남의 고향으로 만들었다.고속열차가 버리고 가는 그곳, 특급 열차가 지나쳐가는 간이역, 완행열차마저 거들떠보지 않는 그곳, 간이역은 우리들의 뇌리에 언제나 애환의 기억을 살려낸다. 최근 우리 지역은 한국영화의 대부분을 촬영 장소로 헌팅하고 있다. 오수역, 전주 아중역, 임피역, 서도역 등 간이역들이 현재까지 열다섯 편의 영화가 촬영지로 삼고 있다.우리 지역의 전북독립영화협회가 주관한 영화제에서 볼수 있었던 젊은 영화감독 백정민의 <그의 노래, 애심>에서주인공이 기다리고 사모하는 소년 시절의 그 소녀를 마지막으로 보았고 그 소녀를 두고 떠나온 곳, 그곳도 작은 시골 간이역이었다.일본의 <철도원>처럼 은퇴를 앞둔 고집스런 철도원이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 모두를 잃은 슬픔과 그 슬픈 기억을담은 철도원마저 영영 호로마이역을 떠난다.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눈 덮인 간이역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간 뒤, 간이역마저 사라질 것이었다. 간이역은 사라짐의 상징이다. 현대화되어가는 교통수단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스쳐가는작은 모든 것들을 버리고 있다는 오늘의 아이콘이다.우리는 이제 영화의 아련한 영상으로 간이역이 담고 있는신화를 만날 것이다. 사라지는 간이역은 우리들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으로 옮겨져 떠나보낸 친구들, 이별한 부모 자식들, 그리고 헤어져 가슴을 아리게 한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날 아름다운 대합실을 꾸려낼 것이다. 슬픈 영상을 통하여.
이영호 한일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