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테마기획] 간이역
관리자(2009-11-06 17:54:40)
떠난 사람을 추억하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 그 애틋함이 서려있는 간이역. 간이역은 역장이 없는 작은 역이다. 그나마 역무원이 배치돼 있는 역은‘배치간이역’, 역무원조차 없는무인역은‘무배치간이역’이라 부른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의 부대낌과, 기차가 잠시 정차하는 사이 먹었던 가락국수의 맛, 비어있는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 가만가만 설레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간이역은 그런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7~80년대, 간이역은 중요한 교통의 거점이자 사람들의모임장소였다. 서울로 유학 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기다림이 머물러 있는 곳, 한 여름이면 주민들에게 시원한 휴식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던곳, 간이역은 그런 공간이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간이역은 점점 역사의 뒤란으로 사라졌다.굽이굽이 이어진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사람과 세월을 품던 간이역은 이제 기억속의 역사로 남아 있을 뿐이다.맹렬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던 기차 길 옆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른 흐드러진 코스모스의 풍경.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은 간이역을 추억했다.
춘포역│전북의 간이역
살아온 흔적, 삶의 기록을 남아 스산한 가을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면 아련히 떠오르는 간이역.
어릴 적, 두 팔을 곧게 펴고 좁은 철로 위에서 뒤뚱뒤뚱 중심을 잡으며 기찻길을 걷던 아이. 아이의 기억 속에는 간이역에 대한 추억이 가슴 깊숙이 가득 쌓여 있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간이역 대합실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격렬한 기차소리와 함께 돌아온 아버지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던 기억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월 속에서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돼버렸다.
가을 햇볕에 완연히 영근 이삭이 황금빛으로 넘실대면 그곁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보내고 맞았던 춘포역. 일제강점기, 풍요로운 호남평야의 곡식들은 일제에 의해 수없이 수탈당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또는 농사를 짓기 위한 물자를 역을 통해 들이기 위해춘포역은 1914년 설립됐다. 이리~전주간 전라선이 개통된때 일제의 수탈이라는 아픈 역사와 함께 태어난 춘포역은그 시작부터 설움의 세월을 맞이해야 했다.춘포역은 개통 당시 대장역(大場驛)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름이라 해 1996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장역이란 이름은 일본인들이 농장을 설립해 다수가 이민하게 된 이민촌으로 대장촌을 칭한 데서 유래됐다.역이 있는 마을 이름이‘춘포리’로 바뀌며 대장역은 춘포역이 됐다. 춘포(春捕)는‘봄나루’라는 뜻.7~80년대, 학교를 다니기 위해, 장에 가기 위해, 짐을 부치기 위해 찾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춘포역.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아 일제 때 물난리가 나면 사람들이 역사로 모이고,마땅한 공원시설이 없던 시절의 저녁시간이면 주민들이 잠시 쉬어가던 소중한 공간이었다.한때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던 춘포역은 효율과 실질을앞세운 철도산업합리화정책으로 1993년 비둘기호 승차권발매중지, 1997년 역원배치 간이역으로 격하, 2004년 역원 무배치간이역으로 바뀌며 폐쇄됐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춘포역에는 이제 늙은 향나무와 간이벤치, 그리고 우리들의 아련한 추억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과 100여년 가까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춘포역의 한적함은 그래서 더 쓸쓸하다.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밀려 사람들에게 외면 받던 춘포역은 그 역사적,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2005년, 임피역사와 함께 등록문화재 210호로 등재됐다.춘포역은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로 소규모농촌지역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600개의 역사 가운데 최고(最古)의 역사로 평가받고 있다.플랫폼은 다 허물어지고, 무성한 잡초들만 앙상하게 남은춘포역에 더 이상 기차는 지나가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기적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전북의 간이역│임피역
외로움도 그리움도 세월속에 녹아내고 전라북도 군산 땅 술산리.
드넓은 만경평야가 자리한 이곳에는 70여 년 동안 모진 세월에도 굴하지 않고 올곧게 자리한 임피역이 있다. 초창기에는 호남평야의 곡식을 운반했던 화물열차가, 광복 이후에는 전주와 익산, 군산을 잇는 여객수단이 잠시 머물다 가던 곳.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임피역에는 생계를 위해 매일 새벽마다 통근열차를 오르는 시골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임피(臨陂)라는 지명은 바닷물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둑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간척하기 전 임피역에는바로 앞까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갯벌 위 임피역에는 그 짭쪼롬한 바다 향이 가득 퍼져 있는것만 같다. 임피역은 본래 임피면 읍내리에 지으려고 했으나, 읍내리 유림들이 풍수지리를 이유로 반대해 술산리를경유하게 됐다.이 곳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는 군산, 옥구에 사는 독립지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역사의 현장이자, 일제에 의해 수많은 쌀을 수탈당한 아픔의 현장, 그리고 군산,익산 등을 이어주는 서민들의 생활 통로였다. 현재 임피역에는 일제강점기 때 관리들이 심었다는 벚나무만이 질곡의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존재하고 있다.기차가 중지하기 전, 술산리 사람들은 통근열차를 타고군산역 새벽시장에 나가곤 했다. “아, 그때는 군산역 가서호박이랑, 나물이랑 팔라고 맨날 새벽에 임피역에 나갔어.거가면 다 아는 사람들이었응게. 만나면 북적북적허니 사람 냄시가 났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썰렁한 역을 보면유령이 나올 것만 같다는 임용수(69) 할머니의 말이 가슴깊숙이 박힌다.1912년 역사가 신축된 이래 서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임피역은 군산선의 철도역사로 건립돼 일제강점기에전라북도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95년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됐고, 2008년부터는 여객 취급도 중지됐다. 임피역사는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며, 원형또한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2005년 11월에 등록문화재제208호로 지정됐다.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후텅 비어버린 역사. 그 안에는자식을 떠나보내던 어미의 닭똥 같은 눈물이, 장에 가기 위해 한껏 봇짐을 짊어 멘 아낙들의 고됨이, 기다란 의자에몸을 맡긴 채 꾸벅꾸벅 졸며기차를 기다리던 날들이 모진세월과 함께 서려있다.
서도역│전북의 간이역
향긋한 백일홍 향기가 가득한 그 곳
붉게 피어오른 백일홍이 만개할 때면 으레 생각나는 곳. 서도역은 전라남도 남원시 사대면 서도리라는 작은 고장에 자리한 역이다. 생전의 소설가 최명희는“고향마을에 들어가기 전 서도역 정거장의 백일홍 꽃밭에 취해 있다가 하염없이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눈물지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32년에 세워진 서도역은 1930년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오래된 간이의자와난로, 녹슨 철로, 수동 신호기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한다. 전라선 오수와 남원 사이의 이 작은 역은 예전전주와 남원 사이를 오가는 통학열차가 운행되기도 했지만, 2002년 전라선 철도가 다른 곳으로 이설되면서 문을닫게 됐다. 이제 서도역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역목한 그루만이 쓸쓸히 그 곁을 지키고 있다.서도역은 율촌역, 진남역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손꼽힐만큼 몇 안 되는 목조역사로 시골 간이역의 향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34년 이후 목조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일한 곳으로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간이역이다.또한 서도역은 최명희 소설『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혼불』속에서 이 역은 정거장 혹은 매안역(梅岸驛)이라는 이름으로 소설 전반에 거쳐 등장한다. 『혼불』의 등장인물인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기차에서 내리던 곳, 강모가 전주로 학교를 다닐 때 이용하던 곳이 서도역이다. 현재의 속도를 빗겨간 이곳의 과거는이제『혼불』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를 선물하는 장소가 됐다. 남원시가 역사를 보수하고 노봉리 혼불 문학관까지 꽃길을 조성, 문학순례객들에게 아름다운산책로를 제공하며『혼불』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서도역의모습을 보존하려 하는 것이다.기차가 다닐 수 있는 역으로서의 생명은 끝났지만, 서도역은‘빠르게’만을 외치는 시대에 과거를 돌아보고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선물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이 살아 있는 서도역. 붉게 핀 백일홍과 닮은 저녁 노을이 오늘도 서도역을 수놓는다.
전북의 간이역│노령역
마음과 온정을 이어주던 자리 쓸쓸한 바람이 머무는 자리.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노령역 주변에는 민가도, 상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예부터 갈대가 많아‘갈재’라 불렸던 노령역은 원래‘위령’이라 표기됐으나‘위’자를 갈대를 뜻하는‘노(蘆)’자로 바꿔 지금의 노령이란 이름이 생겼다.
주위 산세가 험하고 외져 1960년대까지도 무장공비가침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노령역은 번잡함과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 지역 역무원들에게 노령역 근무는‘좌천’이자‘유배생활’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동천리에 위치한 노령역은1968년 설립된 이후 1989년 호남선 복선화로 현 역사로신축 이전된 후 2008년 여객 취급이 중지됐다. 천원역이평야지대에 놓여있다면 노령역은 내장산이라는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다. 그 내장산 자락을 넘는 고개이름이 바로‘노령’이고 그 노령을 넘으면 전라북도에서 전라남도로 들어서게 된다. 노령역은 전라북도와 남도를 가르는 경계역이자 서울에서 보면 남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주변 입암산 자락의 채석장에서 만들어진 쇄석을 공급하는 기능을 하고 하루 상하행선 한 차례씩 모두 2번 여객을 위해 정차하기도 했다. 비록 몇 명 안 되지만 입암산을찾는 등산객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완전히 폐쇄돼 인적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아무도 없는노령역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무심코 지나가는 기차마저 매정하게 느끼게 한다.이제 노령역 곁을 지키는 것은 승강장 입구에 남은 작은나무뿐이다. 낡은 고무타이어가 밑둥을 감싸고 있는 이 역목 만이 쇠락한 역을 지키고 있다. 세월에 밀려 쇠락하고버려진 노령역. 찾는 이는 바람과 구름뿐인 이곳은 마치 세월의 무게를 잔뜩 이고 가는 인간의 삶을 반추하고 있는 듯하다.
송민애 문화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