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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
[박물관대학] 미륵사지의 비밀
관리자(2009-10-09 17:04:50)
미륵사지의 비밀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의 미륵사 창건 조경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1400년의 비밀을 간직한 금제사리봉안기의 발견 지난 2009년 1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 심주석 상면 중앙 사리공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으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이하 봉안기로 약칭) 등이 수습되었다. 미륵사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이뤄진후 왕비가 된 선화공주의 발원에 위해 창건된 절로 유명하다. 봉안기에는 금판의 앞과 뒷면에 총 19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문체는 사륙변려체에 가까우나 엄격하게 적용되진 않았다. 봉안기에 사택왕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딸이고, 미륵사가 639년 완공되었고, 법왕(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했고, 무왕을 대왕폐하라 부르고 있다.그러나 봉안기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미륵사는 선화공주가 아니고 사택씨(沙宅氏) 출신의 백제왕후(이하 사택왕후라 칭함)가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행히 사택황후의 사리봉안 연대가 무왕(재위, 600~641)의 말년인 기해년(639)이라 선화공주가 사택왕후보다 이전의 왕후일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선화공주가미륵사 전체를 창건한 주체가 아닌 것은 확실해졌다. 또한미륵을 받드는 미륵사의 서탑에서 발견된 봉안기에 미륵과관련된 내용이 적혀있지 않아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삼국유사』의 선화공주와 미륵신앙미륵사 서탑의 사리봉안기의 내용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성을 살피기 앞서『삼국유사』무왕조에서 말하고 있는 미륵신앙의 성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미륵사는 미륵(彌勒)을 받들기 위한 사찰이다. 미륵은 석가(釋迦)가 입멸한이후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다. 미륵신앙은 크게 상생(上生)신앙과 하생(下生)신앙으로 나뉜다. 상생신앙은미륵보살이 머무는 도솔천에 올라가 제도를 받는 것이고,하생신앙은 미륵이 인간세계로 내려와 자신을 제도해 줄것으로 믿는 신앙이다.미륵신앙은 미륵을 받드는 신앙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도 깔려있다. 미륵이 하생하여 중생을 제도할 때 전륜성왕이 정법으로 그 나라를 통치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상군주인 전륜성왕사상은 세속의 최고 통치자인 왕의 권위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대사회에서 미륵신앙이 광범위하게퍼질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익산의 미륵사는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륵신앙을펼치기 위하여 세워진 사찰이다. 『삼국유사』무왕조의 내용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로 너무나 유명하다.백제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를 꼬여 사랑을 이루고 왕위에 올라 부인과 함께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다. 무왕과 선화가 용화산 사자사로 가는 도중에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자 미륵삼회(彌勒三會)를법대로 본받아 각각 세 곳에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를지었다고 한다. 미륵삼회(彌勒三會)란 미륵이 하생하여 세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미륵사의 3탑 3금당의 가람배치 양식은 미륵삼회의 설법을 상징한다.미륵삼회는 용화삼회(龍華三會)라고도 한다.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하고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함을 말한다. 선화공주가 다른 곳이 아닌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연못을 지날 때 그곳에서 미륵삼존이 솟아났다고 한 것은 미륵의 용화수 아래의 출현을 비유한 것이다. 미륵삼존이 출현했고 미륵삼회나 용화산의예에서 보면 익산 미륵사는 미륵하생신앙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한편 지명법사(知命法師)가 머물고 있는 사자사(師子寺)가 용화산(龍華山)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미륵상생신앙의 요소도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사는도솔천의 미륵보살이 앉는 사자대좌(獅子臺座)와 연관되기 때문이다.다음은 선화공주다. 선화공주의 이름인 선화의 의미를알기위해서미륵선화(彌勒仙花)에주목할필요가있다『. 삼국유사』미륵선화미시랑진사자조에 의하면 신라 흥륜사의중 진자(眞慈)가 미륵에게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꿈에 한 중이 웅진(웅천)의 미륵선화를 찾아가라고 하고 있다. 진자는 미륵이 화랑으로 하생(화신)하기를 기원하고 있다.진자의 미륵신앙은 대단히 돈독함을 알 수 있는데 진자(眞慈)의‘자(慈)’란 이름도 미륵을 의미한다. 진자가 그토록 찾은 미륵의 화신은 수원사의 미륵선화였다. 미륵선화의 선화는 선화공주의 선화와 한자가 선(仙)과 선(善)으로다르지만 둘 다 미륵과 관련되어 나오므로 같은 의미라고볼 수 있다. 선화공주는 마치 미륵선화처럼 미륵의 화신이되어 미륵이 하생하는 미륵사를 건설하고 있다.한편 미륵신앙은 전륜성왕과 짝하여 나타나고 있는데『삼국유사』무왕조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미륵사와 관련하여 전륜성왕의 언급이 없지만 미륵이 내려올 때 지상세계를 다스리는 왕은 전륜성왕이기 때문에 당시 무왕이전륜성왕에 비겨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왕은 미륵사 창건을 통하여 한편으론 전륜성왕, 한편으로 미륵불을 표방하면서 자신의 종교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측천무후도 자신을 자씨(미륵불)와금륜(전륜성왕)이라고 칭하였다.왜 미륵사 서석탑에 미륵이 아닌 석가의 사리를 봉안했나이상『삼국유사』무왕조의 기사를 통해서 미륵사의 미륵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미륵신앙에 관한 내용이 어떻게 서술되어있는지 궁금하다. 금제사리봉안기의 전문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문체에 맞게 띄어쓰기와 줄바꾸기를 하고 20행으로 재배열한 것이다. 11행의‘차(此)’는 원문에 작은 글자로 보입(補入)되었는데, 문장의 의미를 부드럽게 하는의미도 있지만 사류변려체의 문장에 맞추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봉안기는 법왕(석가모니)의 간략한 일대기와 사리 영험에 관한 내용, 백제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로 그가 가람(절)을 창건하고 639년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 대왕폐하(무왕)의 만수무강과 불법홍포와 중생구제를 원한다는 내용,왕후의 신심에 의해 모든 사람이 복을 받고 불도를 이룬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왕을 대왕폐하라 하여 한경우는 고대에 왕을 폐하라 부른 처음 사례로 주목된다.당시 백제 무왕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런데 미륵사 창건의 발원주로 알려진 신라의 선화공주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사택덕적의 딸인 백제 왕후가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일견사택왕후가 미륵신앙자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미륵사에서 나온 사리봉안기임에도 불구하고 미륵신앙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렇다고법화신앙 등 구체적인 불교신앙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봉안기에서 미륵신앙과 관련된 편린도찾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보통 사리라 하면 석가모니의 사리를 말한다. 그러므로서탑에 봉안된 사리도 석가모니의 사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륵신앙이라고 해서 사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이 바라문 집에 태어난 지 12년 뒤 도솔천에 상생하는데 그 몸은 그대로 신사리(身舍利)가 되었고 여러하늘ㆍ사람이 탑을 세워 사리를 공양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륵사 서탑에 미륵의 사리가 봉안됐을 수도 있다.또 한편『미륵하생성불경』에는 탑을 세우고 석가의 사리를 공양한 공덕으로 미륵을 만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미륵사의 창건이 미륵이 하생하여 미륵삼회의 설법을 듣기위한 목적이었다면 하생경의 말처럼 서탑에 (석가의) 사리를 공양하여 미륵삼회의 설법에 참여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사실 미륵과 석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부처다. 미륵경전에서 석가는 미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상생경』에서 부처님(석가)은 미륵이 도솔천에 상생하리만 수기(授記)를 주고 있다. 그리고『하생경』에서 세존(석가)은 미륵이 자신처럼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하생할 것을 말하고 있다. 곧 미륵의 상생과 하생은 석가의수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륵사의 서탑에도 석가의 사리가 모셔질 수 있다.사택씨 귀족가문인 사택왕후의 불교신앙은 미륵신앙이 아니고 석가(법화)신앙이었다사리봉안기에 사택왕후가 서탑에 석가 사리를 봉안한이유가 미륵하생의 미륵을 만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서탑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석가불신앙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봉안기는 서두에“법왕이 세상에 나와서 근기에따라 감응하시고 사물에 비춰 몸을 드러내심이 물속의 달과 같다. 그래서 왕궁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후반부에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공양한 내용을 싣고 있다.사리봉안기에는 법왕을 언급하며 그의 사리가 8곡이 된다고 구체적인 수량을 말하면서 사리를 공양하고 있다. 미륵신앙에 의한 사리공양보다 석가불신앙에 의한 사리공양이 강조되어 있다. 지난 4월 2일 사리호 안에서 작은 사리호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사리 12과가 봉안되었다.석가의 사리신앙에 대한 또 하나의 자료로 추정되는 이 사리는 석가의 진신사리로 추정되고 있다.서탑의 사리 봉안을 통해서 신앙의 성격을 파악해 보았지만 사택왕후나 좌평 사택덕적 자체에 대한 불교신앙의성격이 파악된다면 법왕 사리 봉안의 성격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에 대한 행적에 대해서는봉안기의 기록이 전부이다. 사택왕후나 사택덕적은 모두사택씨인데, 사택씨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으로 대성팔족 가운데서도 수위(首位)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왕후를 배출하고, 좌평을 배출한 사택씨 가문의 인물을 통해서사택씨 가문의 사상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다행히 미륵사 창건 연대인 639년을 전후해서 활동한사택씨 가운데 잘 알려진 인물로 대좌평을 역임한 사택지적이 있다. 사택지적은 사택지적비를 남긴 인물로도 유명하다. 먼저 비문을 통해서 사택지적의 사상적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비문의 주인공인 사택지적은『일본서기』에 보이는 대좌평지적과 동일인물로 의자왕대 일본에 사신으로 갔고비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갑인년인 654년 정계를은퇴하고 있다.비의 성격에 대해선 비의 오른쪽 측면에 봉황이새겨져 있고 주칠이 남아있고, 비문의 내용에 몸과 마음이 늙어감을 슬퍼하고 있다고 하여 도교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어 왔다. 덧붙여 인생무상의 측면을 강조하여 8행의‘비모(悲貌)’를‘슬픈 모습’으로 풀기도 했다. 그러나 8행의‘비모(悲貌)’를‘비(悲)’를‘슬프다’로 푼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비문은 1~2행을제외하곤 모두 정확한 사륙변려체의 문장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3~4행은 강개(慷慨), 심신(心身), 일월(日月),이난(易難), 왕환(往還)으로 대구가 된다. 7~8행도 자비(慈悲), 용모(容貌), 토함(吐含), 신성(神聖), 광명(光明)으로 대구가 된다. 마찬가지로 8행의‘비(悲)’는 7행의‘자(慈)’와 대구로 보아야 한다. 비문의 해석에 보듯이 비(悲)는 슬플 비(悲)가 아니라 자비 悲가 되는 것이다. 비모(悲貌)는 자비로운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3~4행을 도교의 인간의 덧없음을 슬퍼한다기보다 모든 존재는 변한다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비문에는 사택지적이 당탑(堂塔)을 세웠다고 했다. 당은부처님을 모시는 금당을 말하며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또한 7~8행에는 불교의 대표적인 덕목인 자비(慈悲)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택지적은 도교보다는불교에 가까운 인물로 보아야 한다. 물론 불교적 입장에서 도교를 수용했을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중심은 불교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불교신앙인지는 알 수가 없다.그런데 사택지적의 이름인 지적(智積)은 그가 불교에 신심이깊어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불교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고 있다. 고려의 정종(靖宗)은 자신을 지(智)적(積)에 비유하고 원융국사를 (대통)지승여래에 비유하면서 국사에게 절을 올리고 모셨다. 지적과 대통의 관계는 중국의 천태 지의와 속가제자와의 관계에도 보인다. 영양왕(永陽王) 백지(伯智)가 법화사상을 집대성한 천태의 축원문을 쓰면서 자신을지적에, 천태를 대통불로 비기고, 같이 안양정토와 도솔천궁에 가는 서원을 세우고 있다. 이렇듯 지적은 특히 대통불과 더불어 같이 등장하고 있다.그렇다면 지적과 대통불의 관계는 불교 경전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법화경』화성유품에 의하면, 전륜성왕에게는 큰 아들인 대통이 있었는데 출가하여 대통불이 되었다.성왕은 지적과 석가 등 16명의 손자와 더불어 대통불을예배하였다. 대통불의 16명의 아들은 아버지처럼 출가하여 16방의 부처가 된다는 내용이다. 지적은 대통불의 아들이고, 전륜성왕의 손자고, 석가모니와 형제관계다. 훗날지적은 아촉불로 성불하게 된다.석가를 중심으로 본 다면 석가의 계보는 전륜성왕 - 대통불 - 석가모니로 이어진다. 지적의 계보를 보면 전륜성왕 - 대통불 - 지적이 된다. 그런데『법화경』의 석가의 계보를 백제사에 적용시키면 거의 일치됨을 알 수 있다. 전륜성왕은 백제의 성왕, 대통불은 웅진의 대통사, 석가모니는 백제의 법왕, 지적은 백제의 사택지적과 대응된다. 대통불은 왕으로 보면 위덕왕이 되겠는데 대통왕이라 하지않았지만, 대통불을 대위덕세존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대통불은 위덕왕으로 볼 수 있다. 석가모니는 법왕이라 하므로 백제의 법왕으로 볼 수 있다. 사리봉안기에도 석가모니를 법왕이라 하고 있다.전륜성왕의 손자이고 대통불의 아들이고 석가모니의 형인 지적은 백제사에서 사택지적에 비견되는데 사택지적은대통불로 자처한 위덕왕의 아들도 아니고 법왕과 형제관계도 아니어서 지적의 계보는『법화경』의 계보와 완전히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지적과 대통은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정종과 원융국사, 백지와 천태의 관계처럼 매우 가깝게 맺어 질 수는 있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다. 그래서사택씨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을 추측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봉안기에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등장하여 사택씨 집안과 왕실의 인척관계가 밝혀지게되었다. 따라서 사택지적의 지적이란 이름이『법화경』의지적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보다 높아졌다고 하겠다.사리봉안기의 사택왕후와 사택적덕은 사택지적과 더불어 같은 사택씨 귀족가문이다. 아주 가깝게는 같은 집안일수도 있다. 사택왕후와 사택지적의 관계는 무왕이 죽은 후사택왕후와 사택지적의 동향에서 유추할 수 있다. 사택지적은 의자왕이 즉위한 641년 11월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여한때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듬해인 642년 정월 국주모(國主母)가 죽자 제왕자아교기(弟王子兒翹岐)와 모매여자(母妹女子) 4인과 내좌평 기미 등 고명(高名)한 사람 40여명이 해도로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졌다.국주모는 3년 전(639) 미륵사를 창건한 사택왕후일 가능성이 높은데, 사택왕후와 사택지적은 사건 전개상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사택왕후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고 사택지적은 법화신앙자이고 둘의 정치적입장도 비슷하여 둘의 사이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택왕후의 아버지인 사택적덕(沙宅積德)도 불교신자로 볼 수 있다. 적덕(積德)이란 이름은 공덕을쌓는다는 의미로 불경에‘공덕을 쌓아 성불을 이룬다(적덕성불)’또는‘공덕을 쌓아 공을 이해한다(적덕해공)’라는말이 있다.미륵사는 선화공주와 사택왕후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다같은 사택씨인 사택지적의 불교신앙이 법화신앙인 점을감안하면 사택왕후가 서탑에 석가의 사리를 봉안한 것은그녀의 불교신앙이 석가를 주 신앙대상으로 하는 법화신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백제는 웅진시기부터 백제 말기 까지 법화신앙이 성하였다. 대표적인 승려로 웅진시기 발정, 사비시기 현광, 혜현이 있으며 신라의 국로가된 경흥도『법화경소』(실전)를 남겼다.그런데 법화신앙자인 사택왕후는 왜 미륵사에 석가불사리를 모셨을까? 석가와 미륵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석가와 미륵의 밀접한 관계는 경전에서 살필 수 있다.『 법화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로부터 성불하라는수기를 받고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 위로 온갖 꽃이 흩뿌릴 때 미륵보살은 부처님을 향해 찬탄하고 있다. 특히 보현보살권발품에『법화경』을 잘 간직하고 읽고외우고 잘 이해하면 죽은 후 악한 갈래에 떨어지지 않고도솔천의 미륵보살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법화경』을 읽으면 상생하여 미륵을 만날 수 있다고 한데서『법화경』의미륵신앙적 요소를 살필 수 있다.이상 미륵과 석가, 석가와 미륵의 관계를 통해서 미륵사의 미륵과 석가의 관계를 풀어보았다. 그런데 미륵사는 3탑 3금당, 즉 중원·동원·서원의 삼원양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중원의 미륵, 서원의 석가는 해결되었지만 나머지 동원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삼원 가운데 하나인 동원이므로 동원은 중원 또는 서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한다. 즉 동원은 중원인 미륵과 연관을 맺거나 서원인 석가와 연결되면서 셋은 다시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서산마애삼존불의 경우 주존이 석가이고 좌협시가 미륵보살이라 석가와 미륵의 관계를 충족시켜 주지만 주존이석가이므로 미륵을 주존으로 모신 미륵사의 삼원과 연결시키기에는 문제가 있다. 석가불과 나란히 나오는 다보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의하면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탑이 솟아나오는데 그 탑 안의 다보불이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와 나란히 앉아 있다. 다보탑의 이야기는 불탑 신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불상 조각에서도 다보탑속의 다보와 석가를 형상화하여 소위 이불병좌상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다음은 다보와 미륵의 관계다. 다보와 미륵은 단독으로관련을 맺고 있지 않지만 석가를 매개로 연관되어 있다.『법화경』분별공덕품에 의하면 미륵은 다보와 나란히 앉아있는 석가에게 합장의 예를 올리고 있다. 석가와 다보와미륵의 관계는 구체적인 조상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이불병좌상의 조상 예는 그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많은데,이불병좌상은 단독으로 조상되기도 하지만 미륵보살과 더불어 같이 만들어지기도 한다.이때 이불병좌상과 미륵은 병렬식 구조가 아니라 보통상하 2단의 구조로 조성된다. 운강석굴의 경우 여러 불감에 불보살상이 조성되었는데 상단에 미륵보살 하단에 이불병좌상, 또는 반대로 상단에 이불병좌상 하단에 미륵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을 상하삼존불로 부르고자 한다.그렇다면 상하삼존불은 상단이 중심일까, 하단이 중심일까. 이에 대해선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운강석굴 제11굴 제 4층의 남벽에 새겨진 탑의 탑신에 조성된 상하삼존불이 주목된다. 물론 상단이 미륵보살이고 하단은 이불병좌상이다. 그런데 다른 곳이 아닌 탑에 새겨진 상하삼존불의 경우『법화경』견보탑품에 의할 때 다보, 석가의 이불병좌상이 중심이므로, 운강석굴 11굴 탑의 상하삼존불은하단의 이불병좌상이 중심일 가능성이 높다.운강석굴 17굴 태화십삼년명(太和十三年銘)의 경우 혜정비구가 병의 완쾌를 위하여 석가, 다보, 미륵상을 만들었다는 글이 하단 아래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운강석굴등에 보이는 상하삼존불은 상하삼존불 독존의 형식으로구상된 것이 아니고 전체 굴의 수많은 감실과 조화되어 조상된 관계로 상단과 하단에 모두 미륵보살이 등장했다고여겨진다.반면 독존상인 경우 조상자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었다고 할 때 상하삼존불의 기본 형식은 상단에 미륵보살, 하단의 이불병좌상이라고 생각한다. 상하삼존불의 상단의보살은 교각의 자세로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상징하며 하단의 이불병좌는 다보불과 석가불로 지상에 펼쳐진 다보탑의 세계를 반영한다.그런데 상하삼존불의 상단의 미륵을 하단의 이불병좌상의 가운데로 내리면 병렬구조가 된다. 상단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하생하면 미륵불이 되므로 상하삼존불은 미륵을중심으로 석가불 - 미륵불 - 다보불의 구조로 바뀌게 된다. 법화신앙이 미륵신앙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이 구조는미륵사의 3탑 3금당 삼원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중원은 미륵이고 서원은 석가이므로 동원은 다보불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그렇다면 미륵사는 누가 세웠을까. 미륵사는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이 조화를 이룬 사찰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에의해 창건 될 수도 있고 법화신앙에 의해 창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륵사란 절 이름에서 당연히 중원은 미륵이므로 미륵사는 미륵신앙에 의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법화신앙에 의해 미륵사의 중원에 미륵이 모셔질 수는 없는것이다.그런데 미륵사 서원의 발원자가 법화신앙의 사택왕후로밝혀져 문제가 된다. 즉 법화신앙의 사택왕후가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미륵사 전체를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곧 법화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미륵사는 미륵신앙에돈독한 또 한 명의 발원자가 있어야 된다. 중원의 경우 기축명(己丑銘) 기와가 발견되어 629년 창건된 것으로 보고있는데 서탑의 창건이 639년이므로 둘의 건립연대의 차이가 있는 것도 두 번의 창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명의 발원자로 현재 알려진 인물로 선화공주를 들 수 있을 것이다.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중심인물은 미륵신앙의 무왕, 미륵신앙의 선화공주, 미륵신앙의 지명법사(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법화신앙의 사택왕후이다. 이들을중심으로 미륵사 삼원의 창건 발원자를 몇 가지로 유추할수 있다. 첫째, 중원은 무왕, 동원은 선화공주, 서원은 사택왕후가 세웠다고 불 수 있다. 둘째, 중원은 무왕, 동서원은 사택왕후가 발원했을 가능성이다. 셋째, 중원은 무왕과선화공주, 동서원은 사택왕후의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위 세 가지 경우 중에 첫째는 가능성이 적다. 왜냐하면동ㆍ서원은 법화의 견보탑품 신앙에 의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미륵신앙의 선화공주가 동원을 세웠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둘째는 미륵신앙의 무왕과 법화신앙의 사택왕후의 조합이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셋째 중원은 무왕과 선화공주, 동서원은 사택왕후인데 미륵신앙과 법화신앙의 조화로 볼 때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중원과 동서원의 창건의 선후 관계를 고려하여 사택왕후 이전의 선화공주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삼국유사』의 선화공주와 사리봉안기의 사택왕후의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가능성은 셋째, 둘째, 첫째의 순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미륵사 창건의 중심인물은 물론 무왕이다. 석가모니를 자처한 법왕의 뒤를 이어 무왕은 미륵이 되고자 익산에 미륵사를 세웠다. 익산은 무왕이 자신의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신도였다. 백제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 창건을 통해 미륵신앙을 표방하는 한편 백제의 대표적인 사택씨 가문의 법화신앙을 받아들이고, 자신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전륜성왕이 되고, 미래에 중생을 제도할 미륵이 되어, 백제불교신앙의 통합과 조화, 왕실과 귀족간의 통합과 조화를이루려고 하였다. 공동기획 : 문화저널, 박물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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