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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문화저널]
전통과 일상
문화저널(2003-07-03 16:18:54)
전통을 대하는 두 개의 다른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전통에서 권위의 근거를 발견하는 태도이다. 권력이나 지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낡은 수법이지만 언제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문학의 경우에도 전통은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미리 정해주기도 하고, 평가의 기준으로 나서기도 한다. 작품 생산의 측면에서 보면 전통을 따르는 것은 안전하지만 동시에 답습에 그치고 말 위험도 큰 선택이다.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습작기에는 성취에 대한 확신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소속감을 확인하기에도 편안한 방법을 찾다보면 자연과 고전 가운데에서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고르게 된다. 다른 하나는 전통으로부터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전통 안에서 추적하여 변화의 양태를 확인하게 되면 사태의 적확한 이해에 다가설 수 있다는 확신이 이러한 작업을 후원한다. 그러나 전통과 과거는 동의어가 아닌데다 전통을 해석하는 방법도 체질이나 혈액형의 분류보다 훨씬 다양하다. 전통을 역사와 함께 놓고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든 못하든 이 두 번째 방법은 확립된 전통 안에서 변천과정을 탐색하기 때문에 변화를 향해 열려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을 포함한다. 앞서 안도현의 「비행기고기를 넘으며」에서 나는 백석의 가락을 엿들었다. 그것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에서 안도현이 어떤 종류에 집착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안도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 줄짜리 시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역시 순간의 통찰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음을 예시하지만 그의 전부는 아니다. 이병천이 『그리운 여우』의 발문에서 예로 들었던 「겨울 강가에서」도 좋은 시이다. 이병천은 언어의 구사와 시인의 성품을 언급하였지만 나로서는 강과 눈발이라는 소박한 소재를 이용하여 긴박한 정황을 만들어내는 솜씨에 더 주목하고 싶다. 현실과 추상의 사이에서 언어의 게임을 벌이는 것이 최근 안도현의 작업에서 중요한 몫으로 보이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다음의 시는 그의 여섯 번째 시집 『바닷가 우체국』에 실린 「흔적」의 전문이다. 소나기 한차례 쏟아진 뒤에 다시 햇볕의 잔치판이다 비 맞은 흔적을 지우려고 새잎을 반 뼘쯤 내민 감나무가 빗물을 털고 일어서자 마늘밭에 줄지어 선 마늘순이 덩달아 몸을 떤다 비의 기억을 빨리 잊어버려야 한다는 듯 돌멩이는 돌멩이끼리 모여 이마를 내어 말리고 돌 틈 사이 풀들도 가는 손을 뻗어 볕을 쬐려고 옹송거린다 그리도 태연한 것들은 일찍이 버려진 것들이다 마당가에 나뒹구는 스테인레스 밥그릇, 다 삭은 고무신 한 짝, 이 빠진 옹기, 오래 전부터 퍼질러앉은 확독, 둥근 입이 몸인 것들이 온몸으로 고요히 빗물을 받쳐 안고 있다 배경은 비 끝에 햇볕이 내리쬐는 텃밭과 마당이다. 시골집의 풍경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풍경의 묘사에 우리가 익숙하다. 그러나 운율이나 용어의 선택에는 특별히 전통적이라 할 요소가 없이 넘어간다. 감나무, 마늘순, 돌멩이, 풀들과 밥그릇, 고무신, 옹기, 확독이 대칭으로 배열된 것들 보라. 인공과 자연의 넘나듬은 마지막 연에서 버려진 인공물들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적절히 표현한 ‘받쳐 안음’ 속으로 포용된다. 여기에 버려진 것들이 입과 몸을 일치시키는 단순화의 긴장이 덧붙여지면서 사색의 그림자를 만든다. 지금까지의 작업으로 보아 「비행기고개를 넘으며」와 「흔적」의 중간에 안도현 시의 본색이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흔적」이 그리는 일상에는 개인의 냄새가 없다. 전통적인 작품에 체험이 더 많이 실리는 역설적인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나의 과제라면 독자인 나의 과제를 덜어주는 것이 시인 안도현의 친절이 아니겠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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