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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 |
[신귀백영화엿보기] 엄마! 김치를 부탁해 <애자>
관리자(2009-10-09 16:49:28)
엄마! 김치를 부탁해  <애자> 프 롤 로 그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는 섬세한 무늬의 장편소설이다. 서울에 자리를 튼 웬만큼 사는 상경민 자식들은 사느라 바빠 서울역 지하철에서 엄마를 잃어버린다. 애타게 찾지만 엄마는 해변에 써 놓은 글자처럼 지워지고 없다. 엄마를 찾아 헤매는 서울장면들은 무채색영화였다가 엄마를 추억하는 공간만은 꽃이 피고 수나 놓아져서 컬러가 되는 이 소설에서 엄마를 찾고 안 찾고는 주제가 아니다. 어두운 뱃속에서 꼬물거리며 나온 우리에게 빛을 주었던 존재를 뼈아프게 떠올리게 하는, 그것이 신경숙의 무늬다.소설을 먹을 것이라 한다면, 신경숙의 이 무늬들은 진한 에스페레소 혹은 술안주로 쓰이는 걸쭉한 탕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아플 때 먹고 일어서는 전복이 조금 섞인 맑은 죽 같은 이야기일 것. 엄마가 만지고 기르는 것들 중 자식은 물론 이파리 달린 식물에서 까만 눈에 털을 가진 작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기가 돌더라는 이야기가 깜밥처럼 마음 밑바닥에 눌어있는 참에 촌스런 포스터의 <애자>를 보았다. 역시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룬 <애자>는 모녀가 함께 차린 비빔밥이라 할까? 읽기 편하지만 읽은 후 내면이 편하지만은 않은 책 한 권과, 역시 불편하지 않지만 울고 난 후의 헛헛함을 보여주는 영화 <애자>는 닮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하다.소설과 영화 속 대한민국의 딸들은 엄마의 부재에 대한 예감 혹은 실감에 갑자기 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진것처럼 화들짝 놀랜다. 엄마를 중심으로 돌던 작은 별들이 어느 순간 궤도와 속도를 놓치고 끝내는 중력을 잃은 채 다시 엄마를 불러보는 사모곡들. 엄마를 이대로 놓아 줄 수는 없다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희망에 속지않고 우연에 목숨 걸지 않으려는 태도는 좋다.『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의 감춰진 내면을 잘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애자>는 딸의 느낌을 잘 드러내는 영화라 할 것. 같 지 만 조 금 은 다 른 서양 이름으로 말하면 마리아나 주디 같은 촌스러운 이름‘애자(최강희 분)’의 성장담은 복기가 어렵지 않지만 쉽지만도 않다. 왜? 엄마의 죽음을 두고 벌어지는 서사 구성에서 특별할 것이 없으니까. 보자‘. 대한민국대표 청춘막장 스물아홉 박애자! 해병대도 못 잡는 그녀를 잡는 단 한 사람, 인생 끝물 쉰아홉 최영희!’영화의카피 역시 이렇게 촌스럽게 시작하지만 사실 박애자는 인생 막장이라기보다는 소설을 쓰는 자긍심이 매우 강한 여성이다.박애자 역을 한 최강희는 영화 <달콤 살벌한 애인>과 텔레비전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나온 스타일리시한 동안 배우다. 거의 모노드라마처럼 러닝 타임의 반 이상을 원샷 혹은 투샷으로 채우느라 힘들었을텐데, 애썼다. 초반은 철없는 딸내미의 유머 섞인 오버가 나오는데 이것은 다 후반부 눈물샘을 위한 사전 포석. 옥상에서 담배 피다 선생한테 걸리고 비 오면 바다에 나가 술 마시며 시 쓴답시고 제멋대로 사는데, 엄마최영희 여사(김영애 분)가 맨날 후드티를 끌고 다녀서 목이 늘어날 정도. 이 아가씨에게 잘 안 되는 것은 휘파람 불기와 소설쓰기 그리고 남자. 없 는 것 과 있 는 것 ‘남자친구는 틈나면 바람을 피우고, 등단은 멀기만 해도 깡다구로 버티지만 엄마의 부재를 예감하고서 애자는운다.“ 김치가져가, 이년아!”라는엄마의악다구니에서편하게웃던극장안은쓰러지는엄마의부감샷에 팝콘 씹는 소리가 사라지는데….물론 시한부 생명이지만 냉담과 증오에 이르는 출생의 비밀 그런 극적 장치는 없다. 엄마를 위해서 맘에 안맞는 남자와 억지 결혼을 한다든지 느닷없이 개과천선하지도 않고. 카메라 역시 여배우를 예쁘게 잡으려 하지 않고 소품들 역시 팬시화 하지 않는다. 과거의 엄마와 딸의 역할이 바뀐 <마요네즈> 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막힌 듯 터진 듯, 잘 흘러간다.엄마로 변한 김영애는 한 때 잘나가던 황토팩 사장님이었지만 세상의 많은 고통을 다 겪고 난 후 그 독함이연기에 묻어난 듯. 이 연기파‘배우’김영애는 고두심처럼 고무신 신고 나오는 <엄마>가 아니다. 그렇다고 <마더>의 김혜자처럼 독한 엄마도 아닌 그동안 없던‘엄마’의 출현을 보여준다. 수의사니, 전문직이고 그러니 화학시간에 배운‘수헤리베붕탄’하는 주기율표를 늙어서도 기억하는 배운 엄마다. 그런데 똑똑한 엄마도 인터넷 채팅은 쉽지 않은 것 이것이 뒷꼬리를 연결하는 작은 에피소드. 배웠다 해서우아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니가 소설 써서 엄마 빤스 한 장이라도 사봤나?”고 구박하는 엄마의 경상도 액센트는 제법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그랬다. 항상 한 박자 늦고, 할 말 못하는 약소자 엄마는 병을 숨기고, 강팍한딸은 감정을 숨기고 그래서 저만 모르고, <애자>에는 그런 것 없다‘. 너무 늦었네, 왜 이지경이 되도록 …’하는 병원 복도 신 클리셰도 없고, 문 열고 한참 있다시선을 두니 엄마가 사라지는 장면도 물론 없다. 그냥 싸우고 억지 화해 아닌 다시 토닥거린다. 막 뱉고 나서 후회하고, 다시 아린 후회 끝에 돌아보고 이해하려는 애자나 엄마의 대사치는 모습들이 나물처럼 잘 섞이는데, 신인감독 치고는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다.어릴 적 교통사고로 몸 불편한 아들을 엄마가 더 챙겨주는 것을 애자나 관객도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엄마의 부재에 대한 예감은 그 질투를 덮는다. 피할 길 없는 죽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불안한 예감을 넘은 실감은 딸의 각성을 부르지만 애자는 바리데기 공주가 아니어서 어두운 세계에 내려가 불사약을 가져올수도 없다. 엄마의 부재를 향한 고통의 예감은 딸을 어른으로 성장시킨다. 엄마든딸이든 대놓고 서로 좋은 이야기하기보다는 원망담긴 이야기 혹은 풍자와 독설을자주 뱉는 사람들은 공감하리라.젠틀한 척하는 의사나 천방지축 딸내미의 과잉과 결핍 등 상업영화의 관습이보이기도 하지만 무너지는 엄마의 목을 따 살리거나 목욕탕에서 피로 범벅이 되기도 한 장면에서 우리는 운다. 병은 아픈 이나 보는 이 똑같이 신음과 눈물을 만들어 내니까. 결국 사람은 죽는다. 그냥 팍 죽지 않고 죽기 전에 아프다. 아픈 몸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우리 다 잘 알고 있다. 그 아픈 관계 속에서 우리는 엄마를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벌건 눈으로 엄마에게전화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 눈물은 영화가 내 삶을 엄마와 함께한 세월을 반추하기 때문이리라. 엄 마 랑 함 께 극 장 을 나쁜 일은 발생하고 나면 되짚어지는 게 있다.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싶은 것. 그리고 쏟아 붓고 났을 때는 시원하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부모 자식은 뱉고 나서 또 전화하고 또 찾아간다. 그리고 또 싸운다. 이러한반복 끝에 애자도 또 많은 관객들도 결국은 엄마를 잃고 혹은 엄마의 부재에 대한예감을 갖고서야 어른이 되는 이야기는 엄마의 텅 빈 몸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는 깨달음으로 끝이 난다.엄마가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고‘엄마’라고 생각하는 새끼들의 이 반성문은 질문을 던지기는 해도 분란을던지지는 않는다(엄마의 안락사 형태의 죽음도 조용히 지나간다). 내소사 창살 같은 섬세한 무늬들이 휙휙 지나가는 이 영화, 걸작도 문제작도 아니다. 그러니 감동과 눈물이라는 가족영화 공식에 따라 전반부는 웃을 준비 그리고 후반부는 손수건 준비하시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래서 추석이 공포로 느껴지는 여성분들 많을터‘. 니가 뭔데, 더 늦기 전에’하는 배춧잎 절이 듯한 감정폭행과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에게 권한다. 또 결혼하신 분들은 시어머니 말고 꼭 친정엄마랑 함께 보시길. 추석날 바쁘다는 핑계대고 엄마를 떼어놓고 얼른 집에 와서 맥없이 쉬는 분들은 이번 영화와 소설 한 편을 비교하는 기회가 되시길. 계몽이 아닌 척하는 따뜻한훈계에 기꺼이 또 모른 척 동참하시길. 에 필 로 그 엄마는 대표단수지만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엄마는 고유명사로 부활한다. 내게 피와 살과 알러지까지 물려준 엄마가 익산 모현동에서 작은 점방을 한다. 아들이 진짜 좋은 글을 쓸 날을 기다리는 울 엄매 73세 선쌍임여사는 금방 다정했다가 잘 삐친다. 성질 칼인 것 같은데 울기 잘하고, 말을 못 참고 분란을 일으키지만 뒤끝없는 할메다. 손자 용돈주기보다 당신 옷 사입기를 더 좋아하는 엄마는 이멜에 사진 파일도 올릴 줄 안다. 이할마씨께서 대상 포진으로 힘든 여름을 보내놓고 나니 또 당뇨로 콩팥이 안 좋다고 전화로 알려왔다.부모가 된 입장에서 멀리 보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도 생긴 것 같지만 나 아직 멀었다. 섭섭하면 안 그런 척해도 표정은 못 숨긴다. 말도 행동도 엄마 앞에서면 미끄러진다. 그래서 쉽게 상처받긴 하지만 막장을 가진않는다. 왜? 감정이든 제도든 일시적 화해가 사회적 비용이 덜 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엄마에게 은근한 협박을 한다.“운동 안하고 누워만 있다가 진짜 병나면 노인병원에 보내버릴 거야”.“흥, 나 혼자 충분히 병원에서 나갈 수 있어. 맘대로 해보시지”.참았어도 좋았을 나의 폭주와 댓거리들을 엄마는 이해해 줄 것이다. 왜? 엄마니까. 죽을 때까지 엄마니까.‘엄마, 김치를 부탁해. 포기김치 뻣신 것 말고 부드러운 얼갈이 김치로’.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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