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9 | [문화시평]
그림으로 기록한 자서전
문화저널(2003-07-03 16:16:55)
지난 호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려진 후기(또는 탈) 인상주의 화가들의 개성적 자화상들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호기심 어린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시절부터, 자신감과 낙관에 찬 장년을 거쳐, 손에 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생생하게 한 인간의 삶을 전기적(傳記的)으로 기록한 자화상의 압권은 렘브란트의 경우이다. 드로잉과 에칭(동판을 부식시켜 이미지를 표현하는 판화의 한 기법), 유화의 기법으로 그가 남긴 이 자화상 그림들은 동서 미술사를 통해 볼 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 인간이 체험한 내면의 정신사를 기록한 그림들로, 인간적 감정의 깊이와 높이, 인생행로의 영고와 성쇠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드러내 보인다.
렘브란트 하르멘츠 반 린(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69)은 네델란드의 공업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라이든 시절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자화상 그림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만도 100여 점에 달한다. 이 자화상 그림들은 자신에 대한 관찰을 그 내적 발전의 모든 단계를 통해 반영하고 있다. 이것들은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잘난 체하거나 익살스럽게 토끼처럼 깜짝 놀라거나 환희에 들뜬 모습에서부터, 근심과 우수에 차거나 환멸과 권태에 지치고 나이가 들어 얼굴에 살이 오르고 주름이 진 모습까지 자신의 오랜 삶의 태도와 변화무쌍한 감정의 숨김없는 기록물이다.
<유태인 신부>(1665)나 <돌아온 탕자>(c. 1669)같은 걸작들에서 심오한 ‘인간성의 감정’을 등장인물들의 외모에 나타난 시간의 흔적과 강한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한 그에게 시간과 빛에 대한 감각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의 자화상 그림들에서도 시간의 흔적과 빛의 효과가 잘 나타나고 있는데, 시간과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조형적 탐구는 그가 속한 바로크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그림 1>(1629)은 그가 23살 되던 해에 제작한 자화상이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하기 전인 라이덴 시절에 그려진 이 그림은 삶과 세상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아직 갖추지 못한 한 젊은 화가의 활기있고 발랄하며 다소 경솔해보이는 모습을 잘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암스테르담에서 부유한 집안 출신인 사스키아를 만나고부터 점점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한 전기 작가가 말한 것처럼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품고 있던 환상을 대변하는 여인이었다. 그녀와의 결혼을 통해 렘브란트는 사랑과 부, 명예를 동시에 안게 된다.
<그림 2>(1636)는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다. 이국적이고 화려한 기사 복장을 하고 한껏 들뜬 그가 사스키아를 안은 채 이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에게 마치 건배를 하는 것처럼 유리잔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한 눈에도 방탕과 사치가 그의 삶에 일상화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차츰 명성을 얻어가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진 나머지 사스키아가 가지고 온 적잖은 지참금을 탕진하고 빚은 점점 늘어만 갔고 처가와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불행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이(1635)는 두달을, 둘째 아이(1638)는 3주를, 셋째 아이(1640)는 2주를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들의 죽음에 뒤이어 사랑하던 어머니(1640)와 누이도 세상을 떴다. 1641년 근심과 우려 속에 넷째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남긴 몇점의 그림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하는 이 아이의 이름은 티투스였다. 그도 렘브란트보다 1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티투스가 태어난 이듬해 끝내 사스키아마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30살을 나이로 렘브란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재혼하지 말라는 사스키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는 티투스를 돌보던 유모를 정부로 맞아들였고, 얼마 후에는 20년 년하의 헨드리케 스토펠스(1663년 사망)를 연인으로 만났다.
<그림 3>(1652)과 <그림 4>(1660)는 그의 기량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그려진 자화상이다. 이 무렵 그는 늘어만 가는 빚에 끝내 파산을 하고 전 재산이 경매에 부쳐진, 그야말로 참담한 시절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젊은 시절의 즐거움과 자신감에 찬 분위기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이 자화상들은 화사다마를 증명하듯 끊임없이 불행이 이어진 그의 장년기를 보내면서 내면화한 불안과 초조가 역력히 내비쳐 보인다. 그는 이 그림들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내면의 확실성을 찾아내 고독에 저항하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을 표현해 냈다.
<그림 5>(1669)는 그가 죽은 해에 그린 자화상이다. 1660년의 자화상에서도 어느정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의 강제력 앞에서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하(放下), 곧 적극적 체념의 기운이 엿보인다. 젊은 시절의 자화상들에서 그가 즐겨 사용한 화려한 장식과 극적인 감정의 과시는 모두 사라지고 두 손도 지긋이 모아 감싼 모습이 어딘지 처연하고 비장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머리는 흰눈이 내려앉은 듯 백발이 성성하고 권태와 회한으로 가득한 눈길은 무감각해 보인다. 깊은 주름으로 골진 얼굴에는 그러나 잔잔한 미소가 서려있다. 깨달은 자의 미소일까. 물(物)의 가혹한 숙명에 완전히 패배한 노화가이지만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성의 이념만은 굴복할 수 없다는 듯한 비장한 의지마저 서려있는 듯 하다.
그의 노년기 자화상들은 극단적인 생활의 어려움과 가족들의 잇단 죽음, 늘어만 가는 빚과 그에 따른 파산, 그의 노년기를 괴롭힌 질병으로 인한 삶의 비애 속에서도 깊은 사색에 잠긴 자기통찰을 보여주는 것들로,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초상화는 사상과 감정, 욕망을 지닌 총체적 인격이 이야기를 하는 서정시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쇼펜하우어)고 했던가. 렘브란트 반 린, 그는 운율과 보격에 맞추어 운문의 형식으로 노래한 어떤 서정시인의 시보다 더 서정적으로 자신의 삶과 운명을 담담하게 기록으로 남긴 위대한 화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