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 |
[문화시평] 웨딩에 관한 모든 것
관리자(2009-10-09 16:48:21)
웨딩에 관한 모든 것
(9월 11일~27일) 창작소극장
낙관적인 시선으로 극복한 현학적 풍자
정초왕 전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9월 17일 저녁, 소극장을찾아 공연을기다리고 있자니고은의시에 김민기가곡을 붙인 <가을편지>가 흘러나온다.‘ 가을’과‘외로움’과‘편지’라…. 상념은 언뜻 릴케의 시「가을날」(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 / 잠들지 못하고, 책을 읽으며,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낙엽이 이리저리 흩날릴 때가로수 길을 / 정처 없이 불안스레 떠돌아다닐 것입니다)로 이어진다.두시의‘비슷함’(?)에새삼놀라기도하면서,‘ 웨딩’과릴케가말하는‘관계맺기’는또어떤관련이있을까, 외로움속에그누구에게라도가닿기를바라는 편지를 띠워 보내다 마침내‘사랑하는 짝’을 만난 두 사람의‘관계’를 구체적으로 또 제도적, 법적으로 확고히 보장해주는 장치가 결국‘웨딩’인 것일까. 두서없이 생각이 흩날리는데, 영화 <별들의 고향>에 삽입되었던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가 연주곡으로 이어진다
원작의 현학적 풍자를 웨딩에 관한 낙관적인 시선으로
사실, 두 번째로 공연을 보려던 참이었다. 처음 본 것이 9월 12일 토요일 낮 공연이었는데, 몸살기운이 심했음에도 사정상 애써 관람을 하기는 했지만, 몽롱한 정신 탓에 집중을 할 수 없어서인지, ‘글로 쓸 거리’를 뽑아내기가 만만치 않은 결과만 가져왔다. 정리할 수 없는 생각과 모호한 몇가지 의문들 가운데 분명하게 남은 유일한 것이 있었다면, 모 신문 문화부 여기자께서 공연이 끝난무대에서의‘프러포즈 이벤트’에 출연하여, 예정된‘웨딩’을 앞두고, 공개 청혼을 하던 장면이다.(부디 행복하소서).원작이 너무 부정적인 것에만 편중되어 있다고 여겨져 개작을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원작의‘틀’과‘기본설정’, 이를테면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로서의‘웨딩숍’과 두 남녀 주인공의 기본관계만 남았을 뿐, 내용은 거의 다 바뀌게 되었다는 연출자(홍석찬)의 말을 듣고,‘ 원작대본’을 구해 읽어보기는 하였다.원작(윤효상 작)이‘웨딩’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혹은 사회학적, 인류학적 분석의 단면들을 현학적 풍자적으로 삽입하며, 현 시대‘웨딩’의 행태 및 그 상업적 속성에 대한 시니컬한 언행과 그래도 포기하지 못한 낙관성의 미지근함 사이를 어수선하게 표류하다가 끝이 났다면, 개작된 공연에서는‘웨딩의 긍정성’, 혹은 낙관적 전망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점은 뚜렷해보였다.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은 두 주인공의 사랑이 결국‘성정체성의 문제’(남자가 게이라는 사실)로 인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는 설정이었다. 대체‘웨딩에관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설정이 무슨 함의를 지닐수 있는 것인지? 그러므로 두 번째의 관람은 한편으로는 내가 이 공연에 관한 글을 과연 쓸 수 있을 것인지를 결론 내보려는 마지막 시도이기도 하였다.아쉬움이 발전으로 도약하길 바라며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익은‘함 파는 장면’을 프롤로그로 공연이 시작된다. 사진을 전공한 여사장(류가연)과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일을 함께하는 그녀의 남자 선배(배건재), 이 두 사람이 운영하는, 웨딩에 관한 모든 것을 취급, 대행하는 웨딩숍이 무대이다. 그 곳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세대와 계층이 다른 갖가지 남녀 짝들의 웨딩, 또는 애정과 관련한 일종의 풍속도가 펼쳐진다. 이를테면, 임신으로 인해 불가피한 결혼을 앞두고 티격태격하는 어린 한 쌍, 성인용품점과 웨딩숍을 혼동한 중년 재혼 남녀, 웨딩숍에서 기념 누드사진을 찍으려는 남녀 공무원 짝, 독특한 결혼과 동거방식을두고 설왕설래하는 시인과 만화가 짝, 식도 못 올리고 사는 아내를 위해 결혼사진만이라도 선물해주고싶은 배추장사 아저씨 등등. 게다가 여주인공의 옛날 남자친구는 오렌지족 여성과의 결혼을 앞두고 함께 숍을 찾았다가 상처만 덧내고 떠나기도 한다. 다양한 조합의 인물들과 기발한 대사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유머러스한 상황들이 부담 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관극의 재미를 맘껏 선사한다.그러나 역시 문제는 두 주인공의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한것들에 있다. 노처녀로서 결혼을 독려하는 집안과 애써 맞서투쟁하던 여주인공의 마음이 갈수록 함께 일하는 남자 주인공에게로 향하는 반면, 그의 태도는 애매모호하기 이를 데없다. 여주인공에 대해 아주 특별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발전시킬 수 없는 이 남자의 비밀은 - 원시인 장면과 아이 가진 남자에 관한 꿈 등 - 얼핏 얼핏 실마리를 보여주다가 결국 극의 말미에 가서 여주인공과 관객들 앞에 확연히 드러난다. 자신이‘게이’이며, 미국에 있는, 자신에게 살아갈 자신감을 찾아준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는 통고를통해 그를 괴롭히던 성정체성의 문제를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는 것이다. 여주인공에게는 분명 황당한 상황이기에 그녀가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까지 들긴 하지만, 어쩌면 그의 대사 - “한쪽의 희생이 따르는 조건이라면 그 사랑을, 결혼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는 과연‘웨딩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하릴없이 홀로 남은 여주인공에게는 삶을 지탱할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일까.낙심하며 폐업을 하려는 여주인공에게 한 노인(이부열)이 찾아온다. 웨딩숍으로 바뀐 이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는노인은“찍어놓은 사진보다 사진 찍는 그 순간을 더 좋아하는”늙은 아내를 위해,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자신의 마지막선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올해는두 부부의 결혼 50주년(금혼식)이 되는 해라고 한다.결국, 여주인공은 웨딩숍 10주년 기념 이벤트로 여러 쌍들을 맞아 무료촬영을 계획하는데, 굳이 부언하자면, ‘사진예술가’로서의 자신의‘정체성’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전망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마지막 감동적인 마무리의 역할은 웨딩복장으로 금혼식 기념사진을 찍는 노부부의 그 형언키 어려운 그윽한 표정과 대사가 수행하게 된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인생을 함께 한 노년의 동반자들이 서로에게 갖는 그 애정의 깊이라니.전문적인 차원에서 이러저러한 지적을 하자면, 즉 연기에대해서, 무대장치와 동선에 대해서, 그리고 주제에 대한 너무도(?) 낙관적인 전망에 대해서 전연 얘기할 게 없는 것도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관객들의 흐뭇한 반응을 보고서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소극장 공연이고 아직도 많은 공연이 남아 있으니 끝까지 노력하여 마지막 공연을 최선의 공연으로 올려주었으면하는 바람이 있다.가을의 입구에 들어서 스산해지는 밤공기 속에 집으로 돌아오며, 느닷없이 떠오른 이런 생각에 나 스스로도 나 자신이 참 엉뚱(?)하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 “프러포즈 이벤트에서 공개청혼을 하셨던 기자님, 50년 후 다시 창작극회의공연을 찾아서‘금혼식’에 즈음한 공개청혼을 다시 한 번 해주시면 어떨까요?”
정초왕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을 지냈으며 전주시립예술단운영위원,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을 맡고있다. 현재 전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의 교수로 재임 중이며 저서로는『도이지 시문학의어제와오늘』『, 브레히트의연극세계』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