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 |
[서평]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
관리자(2009-09-03 14:02:58)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항하는 독자가 동의하는 독자가 되다
고은미 전주대학교 국제교육교류원 책임객원교수
대학에서 <여성과 문학>이란 교양 과목을 강의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여성으로서의 독해를 요구한다. 여성으로서의 독해란 현실 세계에서 왜곡된 여성상을 읽어내고 비판함으로써, 독자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여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나는 독서 행위이다. 여성으로서 독해의 첫 단계에서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남성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혹은 여타 인물들을 남성 작가의 시선이 아닌 여성 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길 주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에 동의하는 독자가 아닌 저항하는 독자(The Resisting Reader)가 되라 말하곤 한다.하지만 저항하는 독자가 된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재미없고 괴로운 일이다. 작가의 의도에 반해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가 의도한감동과 재미를 잃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민규의 신작『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으면서는 그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돼 무척 행복했다. 늘 주장하는 바처럼 힘들여 저항하는 독자가 되지 않아도 좋을, 마음 놓고 동의하는 독자가 되어서 작품에 몰입해도 좋을 그런작품을 만났기 때문이다.
눈과 귀와 마음이 즐거운 작품에 빠지다.
그룹 머쉬룸 밴드의 <눈물> 들으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을 감상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일단 본전은 건졌다는 느낌을 주는『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온라인 서점 예스24 블 로그에 연재되었다(2008년 12월부터 2009년 5월까지). 현재 도 예스24 블로그에는 연재를 시작할 당시 박민규의 글과 사 진, 음악이 제공되고 있다. 표지 그림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이미 <시녀들> 을 본 독자라면 그리고 책의 제목을 본 독자라면 응당 왕녀 마 르가리타일 거라 예상하겠지만 우리의 작가 박민규는 역시나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가장 못생긴 작가가 쓰는 가 장 못생긴 여자를 위한 선물(작가의 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까. 왕녀가 아닌 그 옆에 선 난쟁이 여인이 유독 밝은 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야기는 34세의 성공한 작가인 주인공‘나’가 모리스 라벨 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면서 헤어진 첫사랑에 관 한 글을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1999년을 살고 있는‘나’는 그 녀와의 추억의 길을 더듬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 동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서울로 향한다. 19살 재수생이던 ‘나’는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너무 못생겨 충격을 주기까 지 하는‘그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한 번도 사랑받 아 본 적 없는‘그녀’는‘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죄 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담은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하지만 얼마 후‘나’는‘그녀’를 찾아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다. ‘나’의 사고 소식을 알지 못하던‘그녀’는 기다림에 지쳐 고국을 떠난다. 기적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작가가 된‘나’는 15년이 흐른 뒤에야 독일에서‘그녀’와 해후한다. 그 리고 사고가 있던 날 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나’와‘그녀’는 함께 융프라우요후에 오른다.
상처 있는 남자만 추녀를 사랑할 수 있다?
열아홉의 주인공‘나’에게는 상처가 있다. 무명의 영화배우 였던 아버지가 유명세를 타자 볼품없고 못생긴 어머니를 버리 고 떠나버렸다. 잘생긴 남자에게 버림받은 못생긴 여자가 바로 ‘나’의 어머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나’는 백화점에서 나와는 정반대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상처를 지닌‘요한’을 만나게 된다. 요한의 어머니는 너무 아름다워 돈 많은 남자의 첩이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그 아름다움이 시들자 버림받았다. ‘나’와‘요한’은 둘 다 아내를 버린 남자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그래서 불행한 아들들이다. 나와 요한의 불행 뒤에는‘외모’를 기준으로 여성을 평가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 아버지들은 하 나가 아닌 집단으로 존재하며 외모지상주의를 설파한다. 하지 만‘나’와‘요한’은 결코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로인한 불행이 곧 자신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 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 아마도(49p) ‘나’는 내 어머니의 불행이 곧 그녀의 불행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곧 나의 어머니 처럼 내 아버지와 같은 남자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바로 지금의 내 어머니처럼. 때문에‘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박민규는‘나’와‘그녀’의 해피엔딩을 보여주면서도 작품 말 미에 라이터스 컷(Writer's cut)을 도입하여 또 다른 결말을 열 어둔다. 라이터스 컷은 교통사고로‘나’가 죽고‘요한’이‘나’ 와‘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해 현재 자신의 아내가 된 ‘그녀’에게 바치는 결말로 구성되어 있다. 열린 결말을 지향한 듯한 또 다른 이야기에서, 못생긴‘그녀’와 결합하는 인물 또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남자이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려 버림받은 어머니, 그로 인해 불행한 ‘요한’은 어머니처럼 남자로부터 버려질 것 분명한‘그녀’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를 외면하는 것은 어머니를 두 번 잃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나’처럼‘요한’도 버 림받은 트라우마로 인해‘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만약 두 남자에게 어두운 기억과 그 기억 속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없었다면 못생긴‘그녀’는 결코 그들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했 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상처 없는 남자는 못생긴 여자 를 사랑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소설에서조차 못생긴 여자와 남자가 사랑을 이루는 공간은 이곳이 아닌 저곳, 독일과 일본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랑’뿐이다. 작품의 인물들은 80년대의 변두리 골목 BEER(맥주)를 BEAR(곰)로, HOF(생맥주)를 HOPE(희망)라고 표기해 놓은 정체가 불분명한, 그러나 닭고기 맛은 끝내주는‘켄터키 치킨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상의 이미지보다 내용, 즉 본질이 더 중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껍데기보다 알맹이의 소중함을 간직한 그들이었기 에 사랑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 귀족들은 계급적 차별화를 위해 끊임없 이 이미지를 양산하고 세상을 시뮬라크르의 전시장으로 전락 시키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박민규는“이 세상은 뭐든 가질 수 있다,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심어줘 끝없이 부러워하고, 끝없이 일하는 99%의 인간들”(173p)을 얻으려 하 는 1%의 인간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부끄러워 하고 부러워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박민규는 답한다.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 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193p) 그래, 적어도 인간이라면‘세상은 거대한 고아원’이란 유서 를 남기고 자살하는‘요한’을 만들어내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이 세계의 마이너리티인 99%의 우리가 누군가의‘왕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고은미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북대학교 언어교육원 한국어 강사, 국어구군학과 시간강사, 호원대학교 어학원 한국어 강사, 전주대학교교양학부 객원교수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