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 |
119회 백제기행을 다녀와서
관리자(2009-09-03 14:00:22)
119회 백제기행을 다녀와서
8월 22일
페르난도 보테로 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우리는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서른 살에 접어들고부터 나의 화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었다. 혹여 나를 아는 누군가가 그것을 혼자 사는 여자의당연한 결핍쯤으로 여겨 안쓰러워한대도 어쩔 수 없다. 인간애에 대한 열망이나 자기 존재의 증명에 대한 갈망으로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나는 외롭고, 특별한 몇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외롭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사랑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내몸집보다 큰 외로움과 마주하게 될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언제, 어디로 가느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 말고는 아무것도 볼수 없을 때,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어떤 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어야 할지 답이 없을 때 나는 가방을 꾸린다. 그것이 119번째 백제기행을 따라나서게 된 이유였다.
추함에도 미학이 있더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김대중 전대통령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날, 서울.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을 지나서 첫 번째 목적지인 덕수궁으로 가야했기에 우리는 헌화되는 한 송이 국화처럼 말이 없었다. 무거운 공기를 떨쳐내지 못하고 덕수궁안으로 들어서자 푸른 벚나무와 때죽나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덕수궁미술관 입구에서부터 눈에 띈 것은거대한 고양이 한 마리였다. 꼬리를 엉덩이에 붙이고우아하게 앉은 청동작품이 내가 보게 될 것이 페르난도 보테로의 전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그림에서처럼 조형작품도 풍만하다 못해 곧 터질 것처럼 농익은 과일 같았다.대학시절 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보테로의 작품들은 추함에도 미학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깊은 인 상을 남겼다. 책에서만 보던 미술작품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설렘은 소나기가 곧 쏟아질 것 같은 컴컴한 하늘 도, 무거운 서울의 공기도 잠시 잊게 해주었다. 남미 콜롬 비아 메델린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 장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예술가 중 한명이다. 현재 그는 피카소, 샤갈, 호안 미로에 이어 전 세계 옥션 작품판매 순 위 4위를 기록하고 있는 화가다. 이 유명한 화가의 화폭 속 인물들은 한결 같이 펑퍼짐하게 살이 쪘다. 살이 찐 정도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펑하고 터질 정도로, 한껏 부 풀어 오른 풍선처럼 보인다. 작고 통통한 입술과 작은 눈은 포동포동한 사람들을 더 뚱뚱하게 보이도록 부추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둥글둥글한 것은 인물뿐 만이 아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과 과일과 소품들, 악기들까지도 팽 팽하게 팽창해 있다. 옛 거장들 의 작품에서 소재를 종종 빌려 오는 것도 보테로의 특징 중의 하나다. 보테로의 눈과 손을 거 치면 거장들의 명작들은 예외 없이 뚱뚱하고 동글동글해진 다. 고대의 신화를 빗대어 정치 적 권위주의를 예리하게 고발 하고 현대의 일그러진 사회상 을 풍자하는 것도 보태로의 의 뭉스러운 장기 중의 하나. 야외 조각까지 포함해 총 5 개의 테마로 나뉘는 이번 전시 는 1부는‘정물과 고전의 해 석’으로 미술사의 굵직굵직한 거장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붓 터치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고야, 벨라스케스,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미술사를 주 름잡았던 거장들의 작품들을 보테로 식으로 재구성했다. 2 부와 3부는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보여주는 작품들로‘라 틴의 삶’과‘라틴 사람들’로 꾸며져 있었다. 자신을 키워준 라틴문화와 라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는 작품들, 제4부, ‘투우와 서커스’는 나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았던 방이다. 보테로는 투우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12세 때 보테로는 숙부의 권유로 투우사 양성학교에 입학 을 했지만 투우사가 되는 일보다는 투우사를 그리는 일에 더 열중했다고 한다. 죽음의 긴장감과 관객의 열정이 한데 버무려지는 투우의 극적인 상황은 어린 보테로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제 5부는 미술관 입구에 설치 된‘고양이’,‘ 앉아있는 여인’,‘ 기대어 있는 여인’석 점. 덕수궁 뜰 안에 배롱나무 붉은 빛이 화사한 한낮, 풍만한 여인들의 배경으로 어정쩡하게 서서 사진도 찍었다. 유유자적한 듯, 무심한 듯, 보테로 작품의 매력이란 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권력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읽어내곤 하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좋 아하게 된 이유는 좀 다른데 있다. 풍부하고 따뜻한 색감이 주는 푸근함이 좋고 여유만만인 자태가 맘에 든다. 보테로 의 작품들의 인물들에게선 배불리 먹은 자의 여유가 느껴 진다. 그들은 남은 빵 조각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고 배를 곯고 있는 자식 때문에 남의 집 담을 넘어야하는 절박함도 없다. 심지어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은 샤워 꼭지 와 신발들까지도 모두 배가 불러 유유자적하는 것처럼 보 인다. 또 하나, 그의 작품들에 매료된 이유는 인물들의 표정에 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이들의 표 정이 어느 결에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에우로파의 납치’라는 작품에서 황소로 변한 제우스에게 납치되는 에 우로파의 표정도, 애인과 벌거벗고 포옹을 하는 남자도, 카 드 한 장을 엉덩이 밑에 숨기고 카드놀이를 하는 이의 표정 도 모두 샐쭉하니 일관되다.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정 제된 표정. 그저 화가가 그렸으니 자리에서 있을 뿐이라는 듯, 그러나 거기가 제 자리라는 듯, 무심하고 당연한 듯한 (여기에 나는 밑줄을 긋고 싶다). 그 자태와 표정에서 나는 어느 순간엔 안도했고, 또 어느 순간 위로 받았다. 독립예술가들의 축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제일 처음 보테로를 만나게 해주었던 능청스러운‘고양 이’를 뒤로하고 홍대로 향했다. 빗방울 뚝뚝 떨어지는 거 리를 걸어 도착한 곳은 염리동 동사무소를 다시 꾸민 예술 실험센터.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홍대를 유람하는 것이 두 번째 코스였다. 12번째 열리는 프린지페 스티벌은 1998년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순수예술의 엄숙성 으로 대별되는 획일화된 주류 문화에 균열을 내고자 시작 된‘독립예술제’가 그 모태라고 한다. 우리는 연극공연과 무용공연 두개의 공연을 나눠서 보기 로 했다. 예술실험센터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공연 시간에 늦었다. 미안한 마음에 안 그래도 좁은 어깨를 더욱 접은 채 들어선 공연장. 지하 2층의 무대로 공연은 이미 시작됐고 지하 1층의 난간도 우리보다 좀더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깨너머로 공연 을 봐야했다. 무대가 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 집중도 안 되고 다리도 아파왔다. 무대가 있는 관객석엔 빈자리도 더 러 보이건만 불편하게 서서 공연을 보고 있자니 멀리서 원 정까지 와서 공연을 보는 사람에게 서울 인심이 야박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기억의 몽타주>란 작품은 무용공연이라곤 했으나 사실 실험적인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 여자의 기억 속에 있 는 문장들은 한 남자가 읽고 한 여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 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르는 기억의 문장들로 인해 그녀 는 울고 웃고 춤춘다. 꼿꼿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공연을 보 면서 내 언어와 기억이 어디까지가 내 것인지 궁금해졌다. 고난의 시간이 가고 두 번째 공연은 다행히 아래층의 관람 석에서 공연을 볼 수 있게 됐다. <일어나>라는 제목의 공연은 5명의 여성 무용가들이 무 대를 채웠다. JD라는 댄스프로젝트 그룹, JD는 Just Dance, Just Do의 약자로 한마디로 따지지 말고 신나게 춤을 추자는 뜻이란다. 중간 중간 짧은 상황극이 극을 설명 하는 역할을 하고 일상을 표현한 춤사위들로 이어진다. 꿈 에서 깨어나라는 듯, 현실로부터 떨치고 일어나라는 듯, 극 이 진행되는 동안‘일어나’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운동복 과 잠옷 차림을 한 무용수들이 무대 위를 참 열심히 달리고 춤을 추었다. 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도, 아름다운 무용복 없이도 그들은 충분히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그들이 온몸 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을 보는 관객들은 알아듣고 있었으 므로. 예술의 틀을 벗다 프린지페스티벌을 보면서 문득 영국의 한 그래피티 작가 가 떠올랐다. 영국의 브리스톨시를 관광명소로 만들고 있 는 사람. 뱅크시라 주장하니 뱅크시로 불릴 뿐, 이 화가의 얼굴과 진짜 이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벽을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써서 그리는 그림이란 뜻의 그 래피티(Graffiti)는 최근에 와선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 로 벽에 그리는 그림을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피티계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이 화가의 그림은 실로 맹랑하다. 이라크 참전에 동의한 나라와 여왕을 조롱 하는 그림을 버젓이 그리고 경찰이나 군인의 불법 행각을 다룬 장면을 번화한 거리의 벽에 커다랗게 그려 넣는다. 밤 사이 몰래, 실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순식간에 나타나 그림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그 신출귀몰한 솜씨와 주제가 분명한 그의 낙서 그림에 브리스톨 시민들은 열광했고, 언 론은 한 술 더 떠 새로운 그림을 지도에 표시해 가며 사람 들에게 알렸다. 뱅크시는 점점 대담해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두는 이 스라엘 가자지구를 둘러친 담장에 9점이나 되는 그림을 남 겼다. 또 대영박물관 고대 전시관에 몰래 숨어들어서 걸어 놓은 <원시인 마켓에 가다>는 뱅크시가 인터넷에 자기 소 행을 고백하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전시됐다. 미국 메 트로폴리탄 뮤지엄, 부르클린 뮤지엄, 뉴욕현대미술관, 미 국자연사 박물관 등에도 그의 작품들을 몰래 전시를 했다. 뱅크시의 낙서를 보기 위해 브리스톨시를 찾아오는 사람 들이 점점 늘어나자 브리스톨 시의회에선 그림을 지우느냐 존속하느냐를 두고 투표를 실시했다. 주민 97%가 작품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졌고. 지금은 브리스톨시의 관광 상품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영국 남자에 대해서 이렇게 장황 하게 쓰게 된 것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다양하고 유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린지페스티벌이 표방하고 있는 건강한 예술생태계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거 대담론으로는 속 시원하게 만져주지 못하는 나 같은 소심 한 예술 수요자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 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뚱뚱한 사람들 도, 예술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직은 작고 거친 목 소리지만 미래의 예술 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젊은 예술 가들도, 사랑하고 싶은 가치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권리 를 누리며 살아도 된다. 지구라는 화폭 속에서 우리는 모두 고유한 색을 간직한 하나의 천연물감이기 때문이다. 정해 진 몇 가지 색만으로 이 거대한 화폭을 완성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이것이 내가 119번째 백제기행에서 만난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답 이다.
김정경 전북작가회의 간사와 혼불기념사업회 간사를 거쳐 현재 JTV 전주방송에서 구성작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