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 |
[김규남의 전라도 푸진사투리]
관리자(2009-09-03 13:58:02)
“동서,
그 뒤꼭지 개떡조깨 띠내 버려!”
발령 시행, 그러니까 1895년 이후 반세기가 지난 어느 해, 전북 임실의 한 마을에 갓 시집 온 여염 집 아낙이 쪽진 머리를 잘라내고 비녀를 내려놓는다. 이 양반 이몬네 말허자먼 셍이 동갭 이라도 생얼로 따져서 형님빨이 되아 요, 동갑 냥반이…. 인자 그 동서가 아들 한나 나갖고 밤나 딜레딜레 업 고 댕김서 우리집이 와서 늘 놀면서“동서 그 뒤꼭지 개떡조께 띠내버 려”. 비네, 비네를 찔르고 댕긴 게 비네를 띠내 버리라고 <조사자, 왜?> 자기맹이로 파마를 허라 그 말여. <웃음> 지금부터 60여 년 전 임실 오수 서후리에 살던 한 새댁의 사연 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손위동서가 새댁에게 자기처럼 파마를 하 라고 종용했던 기억을 반추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비녀머리를 비유한 표현으로 동서가 선택한‘뒤꼭지 개떡’은 당시 젊은 여자 들의 비녀머리에 대한 태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디 파마를 허고잔 맘은 있어도 내가 쬐깐헐 때 시집은 왔어도 속 에 옹코랭이가 있어. 왜 그러냐. 아, 우리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가 민 촌으로 시집보내고 사오 선 봤다고 구박은 들었는디 내가 그 머리를 끊고 친정을 가머는 민촌 티가 완연허다고 헐 것 아니요. 긍게 고 옹박 안 딛 길라고 어린 맘이라도. 우리 작은아버지 딸이 하나 컸는디‘재겐네 딸은 얼매나 반촌이다 잘 여운가 보자’히 갖고넌 속오로 내가 꼬꼬롬히 갖고 는 딱 참고 있었어요. 새댁이‘뒤꼭지 개떡’을 떼어내고 파마를 하고 싶었던 마음을 꾹 참은 사연인즉 자신이 민촌으로 시집을 온 것을 흠잡았던 작은 아버지 내외에게 반촌 여식으로서의 자존감을 보여주기 위한 선 택이 바로 비녀머리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민촌 티 안 내고‘옹 박’안 들을 요량 이면에는‘어디 그러는 당신 딸은 얼마나 좋은 데로 시집보내는지 보자’는‘꼬꼬롬헌’속마음에‘옹코랭이’가 야물게 들앉아 있었던 것이렷다. 그 동생이 시집을 갔는디 곡성으 로 갔어. 곡성으로 갔어도 곡성도 민촌여. 반촌이 아녀. 그러드니 인 자 친정으를 왔는디 머리를 딱 짤라 갖고 파마를 허고 왔네이‘옳다 되 았다 내가 인자는 끊어도 허겄다’ 인자 재겐네 딸도 끊었으니까. 그리 서 인자 그 때도 내 손으로도 못 끊고 이 동네 친구분덜이 대여섯이 뫼아 갖고 놈선 가운데다 놓고 탁 짤라버리고는 나는 인자 집이 못 들어가고 어쩌랴 했싼게 우리가 가서 말해줄 튼게 걱정말라고 허드니 앞뒤 서고 가 운데다 딱 넣고 옴선 야들 한아버지보고“우리가 집이 메느리 머리 끊어 버렸소”헌게“잘 힛소”그러등만 그리서 참 싱낙 받고 오늘날까장 끊고 댕기요…. ‘뒤꼭지 개떡’은 떼어냈을망정‘뒤꼭지 개떡’으로 상징되는 자 신에 대한 자긍심이야말로 온갖 시련을 버티게 만든 버팀목이었 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 군대 가고 없을 적에. 아, 나가라고 찧빠수는 사람도 있고 또 인자 제대히 와갖고 송아지를 한 마리 이 양반이 샀어요잉 바로잉. 제대 허고 와갖고 송아지 한 마리 멕인디 내가 깔망태를 미고 저 건네 들에 가 서 깔을 빈게 인자 칠얼이나 되았던가바요. 부잣집 할마니 시방 저 지앗 공장 저건네 벽돌 그 집 어머이가“어찌 저 또로 젊은 각시가 요센날 깔 망태를 메고 댕긴가. 내가 존 디다가 중신허께 가소”. 아, 그런 냥반이 다 있어. 아 그런디 그 소리가 고지가 안 듣기요 하나도 귀담아 딛기들 안 혀. 인자 여그 와서 이얘기는 안 힛어도 나 혼자 인자 그렇다 허는 중심 은 먹었지. 그리서 참 그런 일도 있었당게. 신랑은 결혼하자마자 징병에 끌려가고 홀로 남아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힘은‘바댁이 그만헌 디서 왔응게 이 러고 살았제. 뭣헌 사람 같으먼 벌쎄 도망가 버리고 말았어’의 ‘옹코랭이’가 그 바탕이었으리라. ‘뒤꼭지 개떡’같은 비녀머리 로 살아온 수많은 우리 할머니들, 그 마음에 있었을‘꼬꼬롬헌 옹 코랭이’그 찰흙 같은 삶에 새삼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