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 |
[내 인생의 멘토] 창작극회 대표 홍석찬
관리자(2009-09-03 13:57:36)
창작극회 대표 홍석찬 - 스승 정초왕
윤상아! 잘 지내지? 극단으로 불쑥 찾아와서 나를 멘토로 삼고 싶다면서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가지 일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확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견한 일인지 몰라. 너처럼 일찍은 아니지만 나도 그런 확신을 가졌던 적이 있단다. 내 나이 스물다섯. 군대 갔다 와서 들어간 대학은 낯설었다. 캠퍼스의 낭만도 남의 것이었고, 나이 어린 동기들의 치열함도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느꼈지. 어찌어찌 하다 보니 대학에 들어왔고, 또 어찌어찌 하다가 졸업하고, 직장 잡아서 살겠구나 하는 막연함뿐이었다.네가 중학교 3학년 때‘학벌사회, 경쟁사회로 치닫는 고속열차에서 수없이 방황했다’고 했지만, 나의 방황은 늦게까지 그칠 줄 몰랐고, 젊은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지. 심지어 밑도 끝도 없는 방황 속에서 늙어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연극적으로 이야기하면 갈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반복되는 대사 같았지. 무엇인가, 누군가가 이불안을 끝내주기를 바라고 있었어. 그때 색다른 것이 날 자극했고 색다른 그것은 내 인생에 소중한분을 만나게 해주었어. 연극과 정초왕 교수님.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
홍석찬 창작극회 대표
정초왕 선생님과의 추억 하나
전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는 당시 전북 연극계에 연극 인 력을 배출하고 있었어. 전북지역에 전문연극과가 없었던 때 라 기성연극단체에서는 동아리나 연극발표를 하는 학과에서 공연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골라 단원으로 끌어들였던 때였 단다. 그때 정초왕 교수님은 학과에서 가르치던 독일희곡을 무대로까지 확장하여 공연함으로써 기성극단에서 초미의 관 심을 가질 정도였대. 텍스트를 토대로 한 정확한 분석과 표 현으로 완성도 있는 공연을 발표하셨지. 전북지역에서 활동 했거나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전북대 독문과 출신의 연 극인들만 해도 조민철, 정선옥, 장욱, 이근영, 이현숙, 김남 재, 최지훈, 서동운, 류가연, 홍석찬. 상당히 많지! 정초왕 선생님하고는 내면의 깊은 교제까지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전북연극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를 함께 했기 때 문에 선생님을 더 없이 소중한 분으로 여긴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 동안 전주시립극단의 상임연출로 계시면서 전북연극의 큰 변화를 가져왔지. 너에게 읽어보라고 준, 전북연극협회가 펴낸「전북연극 100년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부분을 난 기억하고 있단 다. 선생님은 시립극단의 단원 상임화, 창작소극장을 개관한 일, 관객들에게 시의 적절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지역관객 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다양한 작품과 연극형식, 배우들로 하여금 다양한 연출을 접할 수 있게 하셨지. 나에게 선생님 은 연극의 이론적 토대이고, 다른 지역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메신저같은 분이셨어. 네가 나중에 연출자나, 연극단체를 이끄는 리더가 된다면, 같이 연극작업을 할 배우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협조해 나가야 할지 알게 될 거다. 사회에 대한 냉철한 시각, 대상을 서로 비교할 때에 비로소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 다는 사실, 연극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지금 여기 우리들 의 이야기’에 대한 고민. 선생님은 그것들을 천천히 지속적 으로 나에게 전달하셨다. 윤상아! 우리 선생님은 너처럼 키가 커서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시는 분이야. 술에 취하시면 버들가지처럼 흔들거리 셔. 연극하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는데 이것은 사람을 만 나길 좋아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선생님 도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시지. 연극은 많은 사람들이 각 자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거잖아. 서로의 이야기를 맞춰봐야지. 너는 토론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고 했지? 선생님께서도 토론을 강조하셨다. 토론을 잘하려면 다 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도. 토론 속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선생님께서 쓰신「만남과 소통의 미학」 이라는 책은 전북과 독일에서 본 연극 리뷰집인데, 연극에 있어서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셨어. 배우와 연출, 배 우와 배우, 객석과 무대, 사람과 사람. 그래 넌 토론을 좋아 한다니, 훌륭한 연출가가 될 것 같다. 사람 간에 이야기가 없 으면 천리바깥인거지. 예술가라는 경험 네가 연출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을 몰 라 연극에 대한 확신이 떨어질 때가 있다고 말한 적 있지? 그 럴 때는 어떻게 하냐고? 우리 선생님께서 나한테 해준 독일 공연이야기가 답이 될지 모르겠다. 하이너 뮐러 연출의 <아 우트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상승>이라는 연극공연을 보고는 배우들의 놀라운 체력과 상상력, 표현력, 무대실현 능력에 기 가 눌려 다시는 연극할 맘이 안 들더래. 사실 나도 비슷한 경 험을 한 경우가 있거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공연에는 기술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는 거지. 연극에 대한 확신은, 기 술적인 부분을 많이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결정 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이 말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과 연계가 중요하다는 거야. 세상과의 연결된 끈을 놓는 날에 는 정말 무력해진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됐어.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연극이야기는 가슴을 들끓게 만들지. 파두 가수가 감정에 푹 빠져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저 사 람은 진정한 예술가이고 저 예술을 방해하는 행위는 죄악이 라고 생각하지. 난 연극 앞에서도 숭고해지고 싶었다. 한때는 나도 예술가였다. 선생님은‘나도 예술가다’라는 경험을 갖 게 해주신 분이다. 선생님과 연극을 하면 정말 예술가가 된 것 같았지. 선생님과 한 작업 속에서 내 자신을 명확하게 느 낄 수가 있었으며, 편했고, 좋은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했어. 다시 그때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지금은 제살 깎아 먹고 있는 기분이 든다. 제살 깎아 먹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모르지? 언제 연극에 대한 희열을 맛본 적이 있었나. 선장을 잃은 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던 때를 기억한다. 흔들림은 예견된 것이었으며 지혜와 용기, 의지가 바로 서지 않으면 흔들리고, 분명한 푯대가 없으면 좌초된다는 것을 배웠어. 그렇다고 지 금 흔들리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세상에서 사람으로 시선을 돌리다 대학교에서 배우로 출연했던 내 생애 첫 작품의 마지막 장 면으로 돌아가 볼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가 외치지. 자본 주의 현실을 비판하는 이 연극에서 해설자가 외쳐. “관객여 러분,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잘못된 것 일까요?”극장 안에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은 세상이 잘못되 었다고 말하고 서로들 박수를 쳤어. 하지만 내 나이 마흔다 섯에 그 대답을 달리한다. 사람이라고, 세상이라고. 이게 내 가 정초왕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연극에 관한 답이야. 이제 나의 시선은 세상에만 있지 않고 사람에게 향해있단다. 선생 님과 최근에 같이 한 작품을 통해서 내가 선생님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지. 선생님의 연출 스타일을 내가 닮았다. 작품의 해석하는 과 정을 닮았다. 배우를 존중하는 태도를 닮았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처럼 지혜롭지 않으니 성실하고 싶다. 연극 연출가의 길이 코끝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더라도 너를 믿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그 누가 있다 면 그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거야.
홍석찬 전북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마라 사드>,<상봉> 등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물고기씨 멈추지 말아요>, <막득이 실연전말기> 등을 연출했다. 현재 창작극회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