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9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9-09-03 13:56:53)
한지발 장인 - 유배근
전국에서 한지발 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여!
정리 김선경 문화저널 편집위원
사진 유희중 사진가
유배근 장인 연보
1940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서 태어남
5개월 만에 어머니 사망
아버지 밑에서 한지, 한지발 작업을 배움
1957년 17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지 뜨는 일을 배움
1960년 전주 좁은목(동서학동) 한지공장에 취직
1981년 한지공장 창립
직원 30여명과 함께 질 좋은 한지(유배지)를 제작해 명성을 높임
1985년 무늬발로 전라북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수상
1996년 라오스에 가서 한지 제작법 전수
2005년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한지발) 지정
2009년 현재 전국 유일의 한지발 장인으로 부인과 함께 한지발을 엮고 있음
전주 한옥마을. 그곳에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인 한지발 명인이 산다. 좁은목 근처 동서학동에서 40년 넘게 한지발을 만들어온 사람. 그가 긴 세월을 한데 묶어 한옥마을로둥지를 옮겼다. <한지발 무형문화재 유배근>이라는 문패를 자랑스럽게 걸어놓고 대나무 촉을 뽑기에 바쁜 유배근(70) 장인. 초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깥 길을 걷지 않고 오로지 한지발만 만들어왔다. 가늘디가는 대나무 세촉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이 일은 들어오는 시기가 따로 없어요 5월 중순에 이짝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쪽(동서학동)이 개 발된다고 해서 보상 좀 받고 돈 쫌 더 보태서…. 그 짝이 대 지가 크고 해서 보상비를 웬만큼 받았지요. 이사허니라 뭐허 니라 정신이 없어서 일을 통 못했어요. 일도 안 들어오고. 글다가 1개월 전부터 일이 많이 들어와요. 이 일은 들어오 는 시기가 따로 없어요. 각 공장에 한 번씩 주문이 들어오거 덩요. 특별한 날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종이 주문이 들어오면 몇 사이즈를 해다라, 그러먼 거기에 맞춰서 또 우 리집에다 주문을 해요. 인자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사이즈를 맞춰가지고 고대로 해주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 공장에서 꼭 날짜가 지정이 된 건 아니고 그때그때 들어오는 거요. 일하 는 사람도 우리 둘뿐(부부)이라 아무리 바빠도 먼저 들어온 순서대로 해줘요. 그때그때 변경이 되니까 미리 만들어 놀 수도 없고. 제작기간이 사이즈에 따라 달라요. 큰 사이즈는 기간이 많 이 걸리고 작은 사이즈는 암만해도 날짜가 덜 걸리죠. 주문 이 좀 뜸하면 그때 작품도 좀 허고 나름대로 열심히 허고 있 어요. 작품으로 무늬발을 만든 건 한 20년 전, 한 25년 됐을 거요. 그때도 일은 많이 있었는데 직원들을 좀 많이 두고 했 으니까. 그때가 전성기였죠. 한지발만 하는 직원들이 한 열 다섯 명 정도 되았었죠. 이건(무늬발 작품) 특별히 짬을 내서 만든 거죠. 옛날에는 작품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로지 한지발에 대 해서만 열심히 했죠. 어차피 한지발을 허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번 취미로 해봐야것다, 허고 시작한 거요. 이것이 전라북 도 경진대회에 나가서 장려상 받은 거요. 대나무는 오래 될 수록 자꼬 색이 붉어져요. 모친이 먹고 살라고 한지발을 배웠어요 총각 때는 완주군 소양면 면소재지에 살았었어요. 원래 소 양면 소재지에 한지산업조합이 크게 있었어요. 송광사 쪽은 주로 장판지를 많이 했고, 소양면 소재지에서는 각종 문종이 를 많이 했었죠. 일정 때부터 산업조합이 있었어요. 일본사 람들이 운영을 했던 거죠. 나 고향이 거기 소양이요. 우리 어 머니께서 이 한지발을 만드셨어요. 아버지는 고학자라 일을 잘 못했어요. 일제 때 일본사람들한테 시달리다 못해서 만 주, 중국으로 떠돌아 댕기다 방랑생활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인자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허니까 몇 년 만에 도로 고향에 들어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모친 혼자, 저는 그때 낳기도 전 에, 모친 혼자 벌어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이 한지발 일을 배 웠어요. 생계수단으로 헌 거지요. 동네에서 유일허게 모친 혼자 한지발을 만들었어요. 일본 사람들한테 배웠다고 봐야죠. 산업조합에서 생계수단으로 배웠으니까. 한지발 기술도 우리나라에서 기술이 나간 거지 만, 이미 일정 때라 일본사람들이 요직에 있으니까 그 사람 들 시키는 대로 해야 먹고 살 수 있었죠. 모친은 저를 낳자마자 5개월도 못 가서 돌아가셨어요. 젊 었을 때 돌아가셨죠. 그러고 나를 키운 사람은 서모요. 아버 지가 혼자는 못 지내시니까 서모를 얻었는데 그 서모가 내게 다 아주 잘했어요. 자기네 친 자식보다 더 잘 키워주시고, 형 들 누나들 데리고 와서 키우고. 아버지는 중국서 만주서 돌아 와서 어머니한테 이 한지발을 배우고, 서모가 또 아버지한테 배우고 그랬죠. 아버지가 선비라 억신 일을 못허고 이 일을 했던 거요. 나는 우리 부친헌테 이걸 배웠죠. 항상 허는 일이 라 어려서부터 이걸 보고 배웠기 때문에 어느 때부터 배웠다 고 딱 할 수는 없고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거죠. 본격적으로 헌 거는 한 45년 가까이 될 거요.제가 올해 칠십 살이요. 한지도 아주 잘 떴죠 예전에는 한지공장을 같이 했어요. 총각 때 한지공장에 취 직을 했어요. 한지도 아주 잘 떴죠. 소양에서도 하고 전주에 서도 하고. 소양서 내가 스무 살 때 전주로 나왔어요. 한지를 배운 건 한 17살 때 배웠고. 스무 살 때 전주로 나와서 저그 약수터 있는데 좁은목 밑에 공장이 하나 있었거든요. 거그 와서 자리를 잡았죠. 자리를 잡은 것이 영 딴 데로 떠나지도 못하고 걍 그 근방에서 놀았어요. 그때만 해도 한지공장 벌이가 제일 좋았어요. 건설허고 이런 건 한지업계에 대하면 벌이가 택도 없었어요. 한지는 기술이고 건설은 막노동이니까 한지를 따라오덜 못했죠. 한 지 초지공들이 예를 들어서 하루에 만원을 번다 허면 건설 노동자들은 한 오륙천 원 벌기도 힘들었으니까. 그렇게 잘 나갔지만 그때 한지공들이 참 열심히 한 사흘 일해야 쌀 한 말 벌똥말똥 했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새벽 4시부텀 나오면 보통 한 오후 5시쯤 작업이 끝나죠. 그렇게 열심히 해도 뭐 하 루에 쌀 몇 되. 그니까 3일을 벌어야 쌀 한 말, 그 정도뿐이 안 됐어요. 돈을 일당으로 받는 디도 있었지만, 주로 한지공장에서는 일 당으로 주질 않고 장떼기로 돈을 줬어요. 종이 한 장 떼는 데 얼 마! 이런 식으로…. 그니까 많이 뜨는 사람은 많이 벌고 쪼끔 뜨 는 사람은 쪼끔 벌고…. 그니까 인자 그것도 구분이 있어요. 종 이바닥이 매끄럽게 잘 나온 사람은 좀 우대가 좋았고 좀 거칠게 나온 사람은 암만해도 뒤로 좀 처지고…. 나는 제일 잘하는 축에 들어갔죠. 그때만 해도 아주 평이 좋았죠. 열심히 허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했으니까. 그때는 뭐 딴 디 직장 구하기가 힘들었으 니까 한지 뜨는 일이 즐거웠죠. 오로지 한지허고 한지발에만 매달렸죠 내가 학교를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입학원서를 냈었어 요. 소양초등학교 마치고. 근데 그때 집안이 너무나 기울어가지 고 중학교 시험날짜 3일을 남겨놓고 제가 포기를 했어요. 그 뒤 로 영원히 학교를 못 다니고 초등학교 졸업만 하고 말았죠. 같은 동창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녔는데 나는 초등학교 에만 머물렀다는 것이 그냥 한심스럽죠. 그러다가 제가 마흔 넘어서 공장을 채렸어요. 돈을 좀 모아 서. 다른 직장은 한번도 안 다니고 오로지 한지발허고 한지에만 매달렸죠. 다른 디 들어갈래야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까 받아주지도 않고…. 그래서 한지공장을 채렸죠. 그때는 한지발 허고 한지를 겸해서 했어요. 직원들이 한 30명 가까이 됐어요. 좁은목 집에서. 그때는 유배지를 알아줬어요. 서울 인사동 가면 지업사치고 유배근 모른 사람 별로 없을 거요. 근디 중국에서 종이가 들어 오면서 한지가 하향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거기에다 한지 폐수 문제로 시끄러워져지면서 팔복동 한지조합으로 같이 들어갔었 어요. 근디 초창기에 팔복동 지하수를 쓰는데 물이 너무나 나쁘 더라고요. 아주 나뻐. 물 자체가 안 좋아요. 그러니까 종이도 잘 안 나오고. 한지가 예민해가지고 물관계가 아주 중요하거든요. 물속에다 풀어놓고 종이를 만드니까 물이 나쁘면 종이가 안 좋 게 나와요. 좁은목은 지금도 약수 나오잖아요. 그 전에는 홈대로 꽉 차서 나왔어요. 물이 풍부했었지요. 우리집도 지하 암반수를 파서 종이를 만들었는디, 팔복동은 물이 받아놓으면 뿌연허니 안 좋아요. 그라고 쓰덜 못허고 안 되게 생겨서 공장을 팔고 나 와부렀어요. 끝까지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나중에 거그가 부 도가 나가지고 한 푼도 못 찾고 그냥 털려났지. 그리고 다시 동서학동 집으로 왔는디 그때부텀은 인자 한지 를 안 했지. 폐수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지를 만들 때 그렇게 심각한 폐수는 안 나와요. 양잿물을 좀 사용했는데 그거 흘려 보내서는 절대로 고기가 안 죽어요. 고기가 죽는 원인은 표백 젠데, 표백제를 쓰긴 쓰는데 얼마 안 써요. 조금씩만 쓰지. 라오스에서 한지 만드는 걸 가르쳤어요 하여튼 그래서 그 뒤로는 한지발만 만들다가 라오스도 한 3개월 갔다 왔어요. 라오스 사람들한테 한지 만드는 걸 가르 쳐줄려고 갔었는데, 서울서 라오스로 들어간 사람이 있었어 요. 라오스에 투자한 사람인데 그 사람 소개를 받아가지고 3 개월 계약을 하고 따라갔지. 라오스에서 닥나무가 많이 나와 요. 라오스 닥나무를 태국 사람들이 전부 다 수거해 가. 그니 까 그 닥이 태국 닥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다 라오스 닥이요. 라오스가 면적은 남북한 합친 것보다 큰데 인구는 4백만밖 에 안 돼요. 그 사람들이 못 먹고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 발달이 뒤떨어진 것이지 먹을 것 때문에 구애받지는 않아요. 먹을 것이 풍부하니까. 거그서 한지 만드는 것을 가르치는데 아주 잘 배워요. 한 달에 그 사람들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4만원. 그놈을 월급을 받으면 하룻저녁에 가서 다 써버려. 그러니까 못 사는가 어쩌는가 몰라도 돈을 모을 필요성을 못 느껴. 그놈 월급 받으면 그 이튿날은 공장에 안 나와. 돈 쓰 니라고. 인자 그 돈 다 쓰고 나면 또 와. 그때는 인자 내가 한지공장도 그만 뒀었고, 놀고 있을 때 라 잘됐다 싶어서 승낙하고 간 거죠. 한 3개월 동안 돈 천만 원 벌어서 나왔죠. 근데 나오자마자 97년도 IMF가 걸렸잖 아요? 그때 고생도 많이 했죠. 내가 그때 동생 대출 받아주고 우리 셋째아들이 장사헌다고 돈을 좀 없이고 해갖고 한 1억 가까이 빚이 있었어요. 내가 이자 다 끊고 돈 갚니라고 힘들 었죠. 쪼금이라도 돈 되는 거는 다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은행돈이 너무나 무섭더라고. 은행돈 먼저 끊고 주변 사람들 한테 빌린 돈은 좀 참으라고 하고 내가 쪼끔씩 쪼끔씩 갚어 나갔지. 그놈을 한 4, 5년 걸쳐서 빚이 청산이 났어요. 집사람 없으면 이 일 못해요 요즘에는 빚이 없으니까 먹고 사는 데는 별라 지장이 없고 외나 한 푼이나 저축이 되았으면 되았지. 지금 전수 받는 아 들이 그 셋째 아들이요. 벨라 재미있어하지는 않아도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배우는 거지. 내가 4형제를 뒀는데 큰아들 은 소방공무원이라 오래 됐고, 두채는 전자회로 설계사라 지 금 서울 가 있고... 그런 기술자가 별라 없으니까 대우를 받 는갑데. 원대 전자공학과 나와갖고 졸업도 허기 전에 모셔갔 거든. 막내 아들은 요새 백수여 백수. 금호그룹 취직해갖고 갔다가 몇 개월 허도 못 허고 상사하고 영 뜻이 안 맞는다고 사표 내고 나와버렸잖아. 한번 사표 내면 일자리 잡기가 쉽 지 않잖아. 우리 집사람은 스물여섯 살 때 중매로 만났어요. 집사람 없으면 이 일 절대로 못해요. 서로 협조해서 허니까 허지, 둘 중 한 사람만 없으면 이 일 못해요. 이게 과연 문화재가 될까? 문화재 된 지는 얼마 안 돼요. 한 5년? 5년도 채 못 되었 어요. 2005년 3월에 했으니까. 문화재는 생각지도 않았었 고.. 내가 문화재를 꿈꾸었으면 서둘러서 했을 텐데 나는 생각지도 안 했어요. 누가 옆에서 권고를 해가지고 한 거 지. 누가 그랬냐면 조충익씨 알죠? 선자장! 조충익씨가 자 꾸 권해싸. 그래서 가만히 말을 들으니까 한번 해볼 만도 하겠다 싶더라고. 근디 이게 과연 문화재가 될까? 문화재가 될 가치가 있냐?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허라고 해. 그래서 전승공예연구회에 가입을 했 지. 가입을 한 지가 한 십 몇 년 되앗구만. 그러면서 여기저 기 대니면서 상장도 받고.…. 그때 도에서 장려상을 받았는 데 상금을 10만원 주등만. 그때 10만원이었으면 상당히 컸 어요. 지금은 장려상 받아봐야 상금도 없어요. 그렇게 시작 을 해서 5년 후에 문화재 지정을 받은 거요. 전국에서 한지발을 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 아마 도 에서도 안 해 줄래야 안 해 줄 수가 없었을 거요. 한지업계 에서는 왜 도지정 문화재만 하느냐, 국가지정을 받아야 한 다고 떠들어대고 있는데, 국가지정을 신청하려고 해도 종 목이 없다는 얘기도 있고…. 한지가 있으면 당연히 한지발 종목도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말도 있고…. 하여튼 국민 대 모 교수가 기어코 만들겠다고 서두르고 있는데 어떻게 될랑가 어찔랑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별 계획이 없고 주문이 들어오는 한 끝까지 이 일을 할 거요. 문화재라 시에서 암만해도 신경을 더 써주 죠. 문화재라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때로는 특강을 내보 내기도 하고. 이게 워낙 세공작업이라 시력이 자꾸 나빠져 서 걱정이긴 한디 그래도 헐 줄 아는 일이 이 일뿐이라 죽 는 날까지는 이 일을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