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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 |
[문화시평] 김민영 창작판소리 열사가
관리자(2009-09-03 13:56:23)
김민영 창작판소리 열사가 (8월 15일) 전통문화센터 한벽극장 광복절에 울려 퍼진 열사가 그 뜻을 새기니… 최동현 군산대학교 국문과 교수 올해로 예순네 돌을 맞는 광복절은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지나갔다. 작년과 같은 광복절 대 건국절과 같은 첨예한 논쟁이 올해는 수그러 들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미디어 관련법 논쟁이 차지했다. 자연히 광복절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남북관계가 삐걱거리다 못해 아 무 일도 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쪽에서도 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기대할 것도 없었다. 광복절 전후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이 또 연기 되었다는 소식이 광복절 관련 소식인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아마도 이런 소식을 아는 사람도 몇 없으리라. 그런 가운데 전주전 통문화센터에서 <열사가> 공연이 펼쳐졌다. 창작판소리의 하나로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 인기리에 불려지던 <열사가>를 때맞춰 무대에 올린 것이다. 망국의 비애와 고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열사가>를 부른 사람은 촉망받는 젊은 소리꾼으로 현 재 전주시립국악단에 근무하고 있는 김민영. 그는 이미 국 립극장에서도 <열사가> 초청 공연을 벌인 바 있는, <열사 가>를 부를 줄 아는 몇 안 되는 젊은 소리꾼 중의 한 사람 이다. 무더운 날씨였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보다 훨 씬 많은 청중들이 다소 나를 놀라게 했다. 방학을 맞은 학 생들이 숙제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열사가> 를 누가 안다고. 한벽극장 로비에 들어서자 광복회 전북지 회장이 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광복회 명의의 화환도 눈 에 띄었다. 광복회다웠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그래 도 광복회만은 광복절이 무슨 날인지, 또는 어떤 날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고, 반갑고,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했다. 전주전통문화센터 측의 공연 준비는 다른 공연에 비해 철저한 편이었다. 우선 무대 위에 병풍을 치고, 소리꾼 한 사람에 고수 한 명의 출연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판소 리 공연 방식을 탈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북, 가야금, 아 쟁, 대금, 피리, 타악기로 구성된 반주단이 출연했다. 처음 부터 끝까지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분위기에 맞게 악기들 의 반주가 이어졌다. 악기들의 반주가 따르자 극적인 효과 도 배가되었다. 게다가 무대 뒷면에는 스크린 위에 <열사 가>의 내용에 맞는 영상이 비쳐졌다. 노래와 영상, 그리고 반주가 어우러진 공연은 청중들에겐 참신한 느낌을 선사하 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청중이었다. 극적인 장면에서도 추임새는 터지지 않았다. 비장한 내용에 압도된 나머지 숨을 죽이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런데 본래 <열사가>의 내용과 형식은 판소리의 그것과는 다른 심각한 장면 일색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아 마 판소리 특유의 같이 울고 웃는 감정이입이 힘들었을 것 이다. 또 어린 학생들은 어쩌면‘대한독립만세’를 외쳐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열사가> 공연 중에 열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대목이 나오면 청중들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호응했던 해방 직후의 청중들과 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판소리를 들어본 경험도 없 으려니와 망국의 비애와 고통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기 때 문이다. 그래도 광복절을 의미 있게 보내려한 전주전통문 화센터 측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물나게 고 마웠을 뿐이다. 열사가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열사가>는 항일 독립투쟁을 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를 기리는 노래로서, <이준전>·<안중근전>·<유관순전>· <윤봉길전>의 네 가지에다가, <이순신전>을 합쳐서 일컫는 다. 때로 <이순신전> 외에 <권율장군전>과 <녹두장군 전봉 준>을 넣기도 한다. 이렇게 되고 보면, 항일 독립투젱을 하 다가 순국한 사람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 의 사적을 노래한 신작 판소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까지 확 대되고 만다. <열사가>라는 명칭이나, 이은상이 지은 <이충 무공 일대기>를 참고로 해서 자신이 <이순신전>을 지어 불 렀다는 정광수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본래 <열사가>는 <이 준전>·<안중근전>·<유관순전>·<윤봉길전> 등 네 가 지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에 역사적인 인물을 노래한 판소리들이 만들어지면서, 이것들까지 포함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공연에서 김민영은 <이준전>, <안중근전>, <윤봉길전>을 차례대로 불렀다. <열사가>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것만 은 분명하다. 혹 해방 전에도 이 노래가 불렸다는 말이 있으 나, 아무래도 착오일 가능성이 많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에 항거한 사람들의 전기를 노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열사가>는 박동실이 만들었다고 한다. 박동실은 전남 담 양 출신으로 1930년대부터 6.25 무렵까지 서편제 판소리를 대표하던 소리꾼이었다. 그래서 김소희, 임소향, 장월중선, 한애순, 한승호, 김동준 등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박동 실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6.25때 월북을 했다. 북한 에 가서도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하다가 인민배우가 되었다. 인민배우는 북한의 예술인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이 다. <열사가>를 부르던 사람들은 거의가 박동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박동실이 사설과 음악을 모두 만들었는지는 확실 하지 않다. 박황은『판소리 이백년사』에서 자신이「충무공 이순신 장군」·「안중근 의사」·「유관순 열사」등 7편의「열 사가」를 썼다고 했는데, 이「열사가」가 박동실이 만들어 보 급시킨 그 <열사가>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박동실은 음악을 만들었고, 사설은 다른 사람이 써주 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사설을 박황이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판소리의 본고장에서 되새긴 아픈 역사의 시간들 전주 지역에 <열사가>가 전파된 것은 김동준의 덕이다. 김 동준은 박동실에게 배운 <열사가>를 전주의 소리꾼들에게 가르쳤는데, 이성근도 이를 배워서 많이 불렀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공연 때마다 <열사가>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해방의 감격이 점차 엷어지고, 판소리마저 절멸의 위기를 맞으면서 <열사가>도 부르지 않 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필자에게 <열사가>가 발견되었다. <열사가>는 곧 창작 판소리의 모범적인 선례로 서 관심을 모았다. <열사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도 이어졌고, 1993년에는 이성근이 <이준전>, <안중근 전>, <윤봉길전>을 부르고, 정순임이 <유관순전>을 불러 음 반도 냈다. 이번에 <열사가>를 부른 김민영은 바로 이성근으 로부터 이 <열사가>를 배웠다고 한다. 젊은 소리꾼 김민영이 <열사가>를 전승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판소리의 본고 장이라는 전주의 자부심을 지켜가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광복절에 부를 수 있는 판소리가 전주에 없다면 판소 리의 본고장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무색해지겠는가. 비록 예전과 같은 <열사가>에 열정적인 청중은 없었어도 전주전통문화센터의 <열사가> 공연은 꼭 있어야만 될 공연 이었다. 그래서 그 공연을 정성들여 준비한 센터 직원들이 고맙기만 하다. 사족 : <열사가>의 사설은 벌써 잘못된 곳이 많아졌다. 잘못된 부분은 어법에 맞게 고치고, 어색한 부분은 보다 아름답게 다듬었 으면 좋겠다. 그것이 민족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열사 에 대한 우리의 예의 아니겠는가? 최동현 현재 국립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활동중이다.『 판소리의미학과역사』외판소리와관련한다수의저서를 집필했다. 판소리 연구에 매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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