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9.8 |
[테마기획] 부채 8
관리자(2009-08-10 11:58:35)
부채와 바람과 대숲 정철성 전주대학교 교수 부채는 손으로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이다. 더위를 쫓아내려고 쓰는 물건이지만 다른 용도로 전용되기도 한다. 불을 피울 때 고개를 한 쪽으로 비틀고 손등으로 눈물을 씻어 가며 후후 부느니보다 부채를 찾아와 다시 시작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 햇빛이 무작정 쏟아져 내리는데 얼굴이라도 가릴 마땅한 물건이 없을 때 역시 부채가 제격이다. 방석 대신 사용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화톳불을 피우거나 햇빛 아래 걸어갈 기회가 일 년에 몇 번인가. 보다 심각한 것은 선풍기에 이어 냉방기가 등장하면서 부채의 본래 목적이 근대의 기계 앞에서 초라함을 면치 못하게 된 사태이다. 아직도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부채의 하소연에 어찌 귀를 기울이지 않으랴. 부채의 바람, 그 시원함을 맛보다 사정이 딱하지만 나는 부채를 접어놓고 먼저 바람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아무리 행색이 초라하다 해도 바람은 바람이고 바람을 못 만들면 부채를 부채라고 부를 수 없다. 부채가 만드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 불란서 사람의 글에서 읽었다고 기억하는데 반지가 반지인 것은 비어있음을 규정하기 때문이란다. 고리를 메우고 있는 재료의 속성이나 장식으로 붙인 보석의 가격은 부차적이다. 반지를 만나면 우리는 때깔을 살피거나 “얼마요?”라고 묻기 전에 “누구 가락지요?”를 먼저 물어야 한다. 사실 그렇게 묻는다. (노자의 수레바퀴가 이런 생각의 원조일 텐데 이 반지의 예화를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어 확인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그것의 형체가 없으므로 멀리 있으면 물건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알고 가까이 있으면 몸에 닿는 느낌으로 안다. 앞산의 나뭇잎이 반 넘어 등을 보이면 비가 올 징조라 한다. 한 줄기 바람이 온몸을 휘감아 지나갈 때 솟아나는 시원함은 사람이 맛보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바람은 한 때 흙, 물, 불과 더불어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여기에 허공이나 에테르를 넣어 다섯 원소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바람이 아니라 공기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때 공기는 고대와 중세의 용어로서 호흡 또는 생명을 뜻한다. 신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살렸다가 때가 되면 거두어 가신다거나 대지의 호흡을 관장하는 바람의 신이 저 멀리 서쪽 동굴에 산다는 신화 등에 이런 생각이 들어 있다. (16세기 갈릴레오에 이르러 비로소 공기가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잠시 공기를 잊고 옛사람처럼 숨을 쉬어보자. 생명의 기운이 끊임없이 들어와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채질은 더위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더위에 시달려 줄어든 생명의 축전지를 재충전하는 일이다. 따라서 자발스럽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콧구멍으로 들어갈 만큼 적당히 나누어 넣어야 한다. 대나무 숲의 바람 앞산과 옷깃 사이에 바람을 느끼기 좋은 장소가 하나 더 있다. 소리까지 들리는 공감각적 체험의 현장이 있으니 바로 대숲이다. 대숲에 가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복두쟁이의 외침이 상쾌하다. 세상의 썩은 환부를 찔러 고름을 짜낸 죽창이 어찌 갑오 당년에만 나왔을까. 대와 대숲을 노래한 시가 시인의 수보다 몇 배나 많은데 신석정 시인도 대나무 시를 여러 편 남겼다. 「대바람 소리」도 좋고 「대숲에 서서」도 좋은데 오늘 읽으니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가 더 좋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어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噴水)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印度)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왼 몸이 젖어…… 란(蘭)아 태양(太陽)의 푸른 분수(噴水)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 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葉脈)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또 물어 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蘭)아 푸른 대가 무성(茂盛)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 내 심장(心臟)을 삼으리라   시인은 날더러 대숲을 보라고 하고, 대숲은 날더러 푸르게, 푸르게 살라 한다. 시인 정지원이 쓴 그림 이야기에서 김경주가 그린 <대숲 2>를 만났다. 보자기보다 더 큰 작품이 엽서만큼 작게 실렸지만 정말 맞바람을 쐰 것 같았다. 화가는 보통의 부감법보다 훨씬 높은 곳에 시선을 두고 하늘에서 똑바로 아래를 내려다본 것처럼 대숲의 윗부분을 그리고 있다. 화면 가득 댓잎의 이랑이 바람결에 일렁인다. 날선 초록 댓잎과 햇빛에 무르익은 금빛 댓잎들이 우르르 함께 몰려간다. 그 소란 가운데 작은 회오리가 일며 둥글게 돌아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대바람에 소리를 실어주는 것은 검은 잎들, 그림자인지 대숲의 깊이인지 분명치 않은 검은 입구들이다. 그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역사 속으로 이어지는 죽창의 길이 보인다. 화가가 “바람의 거처”라고 부른 대숲에는 아우성이 있다.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의 의미를 되새기며 바람은 구름을 몰아와 비를 내리게 하기도 하고 불길이 세차게 일어나도록 돕기도 한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채들은 손오공이 나찰녀에게 빌린 파초선처럼 요술을 부린다. 파초 잎 모양으로 만들어 파초선인줄 알았더니 파초 잎을 말려 부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깃털로 만든 부채를 귀하게 여기기도 했다. 고구려 벽화에는 귀면이 그려진 깃털부채를 들고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시절에도 바람보다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의 의미가 더 중요했다. (그래도 내 눈에는 뼈는 대나무, 살은 종이로 만든 부채가 진짜 부채처럼 보인다.) 이익과 편리를 위해 우리는 부채를 버렸다. 그러나 자원절약과 환경보존이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우리 시대에 효용과 멋을 함께 갖춘 부채의 재발견은 단순한 복고 취미에 그칠 일이 아니다. 작은 부채라도 휴대하고 다니면서 부채질을 해 보자. 넘치는 것은 날려 보내고 모자란 것은 채워 넣으면서 부채질을 해 보자. 정철성 현재 전주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임 중이며, 문화저널 편집위원도 맡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