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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 |
[테마기획] 부채 7
관리자(2009-08-10 11:58:07)
부채의 결, 그 곱고 황홀한 자태 나는 텃밭을 보고나서야 부채를 생각해 냈다. 쥘부채의 살처럼 뻗어 있는 이랑을 보고 있자니, 텃밭을 활짝 펴서 흔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에어컨이며 선풍기에 밀려나 요즘 보기 힘든 부채를 골목에서 마주친 것이 약간은 우습기도 하지만, 밭을 활짝 펴서 흔드는 상상만큼이나 시원한 것은 없는 일이다. 여기를 부채라고 부른다면 동네의 모든 바람은 고랑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일 테다. 옥수수 대도 부챗살처럼 퍼져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땅 위에 구름이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으니, 저 밭뙈기만큼 훌륭한 부채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땅바닥에 골을 파고 뿌리를 내리는 부채가 추수를 끝낼 무렵이 되어야 선선한 바람이 불 텐데, 세상은 아직 한 여름이다. 부채의 결은 바람을 낳는다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에는 달력이라고 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우리의 조상들은 부채를 주고받으며 여름을 준비했던 것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 인위적으로 바람을 만들 수 있는 부채는 그만큼 소중한 것이었겠지만, 글씨와 그림이 그려진 귀한 부채는 풍류를 아는 양반들의 것이지 밭이나 가는 서민들의 부채는 아니었을 테다. 까막눈인 자들은 손바닥을 펼쳐 흔들어대거나, 대나무에 싸구려 한지를 붙인 방구부채나 가지고 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마루에 대자로 뻗어 밭뙈기처럼 함부로 생겨먹은 부채를 흔들며 달콤한 낮잠을 청하는 것만큼이나 여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 없던 시절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에어컨이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똑같이 부채를 펄럭였을 테니, 누구나 팔뚝이 아팠을 것이다. 비싼 부채나 싸구려 부채나 똑같이 뼈대를 가졌을 테고 부채의 뼈는 아무데서나 쑥쑥 잘 자라니 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채에서 뼈대의 중요성은 옛 시조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것이 바로 맑은 바람이다.’ 이 두 행의 시구가 그것인데, 대나무와 종이가 만났을 때의 시원하고 상쾌한 아름다움이 바람 불 듯 문장으로 흘러가고 있다. 종이에 뼈대를 심으면 부채가 되고, 뼈대는 종이의 결이 되어 바람을 낳는다. 그러니까 바람 속에 뼈가 있다고 보면 되는 것인데, 요즘은 이 뼈대 있는 바람이 몹시 귀해 좀처럼 접할 수가 없다. 오늘처럼 선풍기가 뜨거운 바람이나 내뱉고 골목에 바람 한 점 없을 땐 부채가 아쉽기만 하다. 세상 모든 것이 부채 결이 아닌가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쉬운 김에 신문지를 접어 부채를 만든다. 이놈이 생긴 것은 그래도 부채라, 바람을 썩 잘 만들어낸다. 가만 보면 생긴 것만 부채가 아니다. 결이 계곡처럼 파져 있고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처럼 퍼져 있다. 나는 이 결 속에서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훔쳐듣고 우거진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도 듣는다. 종이로 접어 만든 부채도 이처럼 시원한 계곡의 그늘을 만들어주니, 대와 한지로 만든 부채는 얼마나 더 시원할 것인가. 부채가 만드는 바람이야 모양새가 달라도 매한가지겠지만, 대숲에서 부는 바람을 생각해보면 바람의 질은 신문지로 만든 바람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바람에 흔들리는 애인의 주름치마를 생각한다. 애인이 주름치마를 펄럭이며 걸을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고 그 사이에서 바람은 태어나 세상을 누빈다. 부채에서 치마를 본다는 것이 억지스럽지만은 사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부채를 잘 이용한다. 쇠고기의 한 부위를 보고 부채를 떠올려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고, 빛이 구름 사이나 지평선 가까이의 불규칙한 형상의 틈을 지날 때의 햇살을 보고 부챗살빛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또 껍데기 겉면에 있는, 부챗살처럼 도드라진 줄기를 보고 부챗살마루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으니, 이 세상의 곳곳에 부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반대로 부채 속에는 한 세상이 들어 있고 그 세상에서 바람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조만간 결이 잘 빠진 부채를 하나 살 작정이다. 내 손가락 뼈마디를 닮은, 아니 대숲의 그늘을 닮은 부채로 여름을 견디고 싶다. 동네 텃밭의 고랑 같은, 뒷산 능선에 패인 주름 같은, 수련의 잎맥 같은 부챗살을 가진 부채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면서 다시 수련 밭에 꽂혀 있는 바람의 갈비뼈를 생각하며 신문지로 접은 부채를 연신 흔들어대는 것이다. 이리 쉬운 바람을 두고 너무 먼 세상을 상상했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바람의 뿌리를 찾고 있으니, 통장을 압박하는 나의 부채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든다. 부챗살이 예쁘게 그려진 수박 한 통을 쪼개 오후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활짝 펼쳐진다. 이 여름도 한 고비를 넘겼다. 백상웅 2006년 최명희청년문학상 시부분과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2008년에는 제8최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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