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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 |
[테마기획] 부채 6
관리자(2009-08-10 11:57:49)
태극선의 오묘한 이치에 빠지다 - 조충익 명인 맑은 바람, 근원 찾아 나서다 - 김동식 명인 “평생 해왔어도 자신 없네요” - 노덕원 명인 장맛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전주한옥마을의 공예명인관을 찾았다. 30여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부채를 만들어 온 조충익 명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조충익은 우리 전통문화인 태극선 제작을 인정받은 선자장이다. 반평생 부채 한 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태극선과 부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늦은 나이에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80년대 후반 즈음에 시작했습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미니병풍 만드는 일을 하다 부채를 발견하게 됐지요. 전주의 특산품인 합죽선도 좋긴 하지만 태극선은 우주만물과 음양의 근원이자 통일체의 의미를 상징하는 부채여서 더욱 좋았습니다. 또 태극선은 우리 고유의 마크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태극선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태극선은 손잡이가 고정된 부채로 단선부채라 불린다. 합죽선과 달리 대살에 조이를 대고 태극무늬를 양쪽에 붙여 만드는 것이 특징. 일백여개 대나무살에 한지를 대고 태극문양을 붙여 검정 한지로 테두리를 마무리하고 손잡이를 붙이면 태극선이 탄생한다. 그는 태극선 부채를 만들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며 제작방법을 배우려 했다. 아무도 태극선 부채 제작방법을 알려주지 않아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우기 시작한 태극선. 그만큼 그의 부채만들기 시작은 고단했다. “짚신 이야기 알아요? 옛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을 내다 파는데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잘 팔리고 아들이 만든 짚신은 팔리지가 않았답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짚신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자 아버지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죠. 그만큼 옛날 사람들은 자기 기술을 다른 이에게 전수하길 꺼려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술을 익혔지만 판매가 어려운 환경은 그를 가난으로 내몰았다. 혼자 넘기에는 너무 많은 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 부채 만드는 사람들은 옛날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름대로 전통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했죠.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우선 컸습니다. 나중엔 그것을 인정받았는지 83년엔가 한국에 교황이 왔을 때 내가 선물용 부채를 제작했죠. 아마 만개 쯤 만든 것 같아요”. 그는 서울 올림픽 유치됐던 그해 실력을 인정받아 올림픽 공예품 생산 지정업체로 선정됐다. 당시 올림픽 공예품 생산 지정업체로 선정된 이는 전라남·북도를 통틀어 그 한명 뿐. 올림픽 공예품 생산 지정업체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였다. 1998년, 그는 오랜 열망이었던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이 됐다. 부채 한 길만을 걸어온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후 그의 부채는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LA 올림픽,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등 많은 국제대회마다 우리나라 선수단의 손에 들려졌다. 태극선을 손에 든 선수들을 본 순간이 부채를 만들어 온 중 가장 보람됐다는 그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고 놀고먹는 게 아닙니다. 국가에서 더 열심히 하라고 지정해 준 것이니 나도 이름값 하려고 더욱 노력하고 있지요”. 항상 스스로를 다잡고 자세를 낮추는 그의 모습이 더욱 높아 보였다. 그의 부채 사랑은 끝이 없다. “부채는 내 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가 만드는 부채를 통해 사람들과 공감하고 대화를 나누는 거죠. 내 사상과 마음을 부채에 담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채에 혼과 열을 다하는 그에게 예전 부채와 현재 부채의 가치에는 어떤 차이가 생겼는지 물었다. “예전 부채의 주요한 기능이 더위를 식히는 일이었다면 요즘 부채는 종합예술품으로 봐야 합니다. 예전 부채와 지금 부채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지금 더위를 식히는 기능으로서만 부채를 본다면 부채는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부채는 부채로서의 맛과 멋이 있습니다. 부채에 글이나 그림을 그려 넣으면 그것이 하나의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부채의 가치를 물었다. “부채는 마음을 부치는 것입니다. 부채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켜 사람들의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는 거죠”. 마음을 부치는 부채. 부채란 사람들의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는 예술품이라는 그의 말에 새삼 그가 만든 부채에 눈길이 갔다. 부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전시를 열고 대중들에게 부채를 알리기 위해 언제나 동분서주하는 조충익 명인. 그가 만든 살아 숨 쉬는 부채가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을 날이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을 하여 자식을 낳으니 것이 바로 맑은 바람이다.” 옛 시 한 구절에 담긴 부채의 멋이다. 부채의 순수한 우리말은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인 ‘부’자와 가는 대나무 또는 도구라는 뜻인 ‘채’ 자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말로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다. 하지만 부채는 단순히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만이 아니다. 그것은 풍류와 멋을 지닌 하나의 예술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술품을 4대째 이어오는 있는 사람. 3대째 부채를 만드는 외가의 가업을 물려받아 4대째 부채 만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김동식 선자장이 그다. 140여 년 동안 전통에 대한 고집과 끈기로 만들어 온 합죽선은 김동식 명인의 정성어린 손맛이 담긴 하나의 예술품이다. 열네 살 무렵부터 부채를 만들어 온 그는 외가의 부채기술을 전승받았다. 외조부인 라학천 선생, 라이선, 라태선, 그리고 무형문화재인 라태용 선생까지 평생을 합죽선 제작에 매진한 선조들의 뛰어났던 부채제작 실력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수됐다. 외조부인 라학천 선생은 고종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뛰어난 명인. 이들 밑에서 부채 만드는 방법을 배운 그는 1998년 제21회 전북공예대전 입상을 시작으로 2007년 전북무형문화제 제10호로 지정됐다. 부채 한 길만을 고집스럽게 걸어온 지 50여 년. 부채가 선풍기나 에어컨에 밀려 팔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60년대만 해도 부채 만들면 먹고 살만 했습니다. 그런데 선풍기랑 에어컨이 나오면서 부채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외삼촌들의 부채제작 기술을 어깨 너머로 배우며 부채 만들기를 시작했다는 그는 어려운 생활고에도, 부채를 찾는 이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부채를 놓지 않았다. “외삼촌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부채를 따라 만드니깐 외삼촌이 잘한다고 칭찬해주더라고요. 그게 동기가 돼서 부채를 만들었습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부채는 저의 자부심입니다. 부채를 만들면서 쾌락을 느끼는 거지요”. 그에게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가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그가 꿋꿋이 부채를 만들었던 이유는 전통부채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품을 만든다는 작가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합죽선은 본래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장신구이기도 했습니다. 선비들이 겨울에도 부채를 가지고 다녔지요. 서민들은 가지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단오날 부채를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신하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일본이나 중국에서 온 사신들에게도 선물로 줬습니다.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임금님이 신하에게 선물로 줄만큼 귀했던 합죽선이지만 오늘날에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배우려고 찾아와서 월급부터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월급을 주면서 가르칠 만큼 넉넉한 벌이가 아니에요. 부채 만드는 일이 전망이 좋으면 억지로라도 가르치겠지만 전망이 불확실하니깐 그렇게 하지도 못합니다”. 전망이 불확실해 다른 사람에게는 합죽선 제작 방법을 가르치지도 못한다는 김동식 명인. 그런데 아들에게는 합죽선 제작 방법을 전수중이란다.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108번의 공정을 거쳐야 할 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부채제작 기술을 아들에게 전수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에게 전수해주고 싶은 이유는 옛날 부채제작기술 전체를 시연할 사람이 없는 게 안타까워서입니다. 부채를 기계로 만들면 기계 부채지 공예품이 아니기 때문이죠. 부채제작기술 전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전수해주기로 한 거죠. 국가에서도 부채제작자가 생활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부채가 발전하지요”. 합죽선 전통의 맥이 그의 열정으로 지켜지고 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보급되기 전 부채는 땀을 식히는 생활용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채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닌 전통 공예품이자 예술품이다. 부채에 담긴 시 한 수, 그림 한 점은 부채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원천이다. 부채는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끈기와 인내,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부채 만드는 일은 관심 밖의 일이다. 하지만 50여 년이 넘도록 끈기와 고집으로 부채를 만들어온 사람이 있다. 부채 명인 노덕원 씨가 그다. 전주시 덕진동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때마침 부채를 만들고 있었다. 노덕원 명인은 부채를 만들기 위해 아직까지도 모든 작업과정을 혼자 해낸다. 손에 굳게 받힌 살들은 그동안 그가 얼마나 부채에 정성을 쏟았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내년에 팔 부채를 살살 준비하는 거예요. 여름에는 부채 만드는 것 아닙니다. 풀이 잘 안 붙고 종이에 습기가 차 물건의 질이 떨어지거든요”. 여름에는 부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지만 그의 손은 부챗살 준비에 분주했다. 50년이 넘도록 부채 하나만을 만들게 된 동기가 있을 터였다. “먹고 살려고 했지요”. 생활고 때문에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그의 눈가에는 지난 시간에 대한 회환이 주름살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잣대공장에 다녔다는 그는 잣대공장을 세우려면 정부의 허가와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해 혼자서도 할 수 있고 기술력이 있는 부채를 선택했다. 한 해, 두 해 부채를 만들다 보니 부채가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 아니라 멋과 낭만이 있는 예술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잣대공장에서 일하다가 이기동 형님을 만나 부채 만드는 것을 배웠습니다. 잣대공장 사장님이 그 양반에게 데려다 일 시킨 것이지요. 잣대공장에서 기술 배웠어도 돈 없으니 기동 형님과 부채를 만들었습니다. 기동 형님하고 나는 여덟 살 차이가 나요. 그때 형님 밑에서 8년 동안 부채 만드는 걸 배우면서 같이 살았습니다. 결혼해서 독립하기 전까진 계속 함께 살며 부채를 만들었지요. 그 양반 인생 80이라더니 꼭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고 이기동 명인에게 부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는 그는 함께 모진 고생을 하며 부채를 만들었던 고인을 회상했다. 고 이기동 명인은 전주에서 전통 합죽선만 60여 년간 만들어 이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명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명인에게서 고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의 눈가에는 지난 추억의 시간들이 아련히 맺혀 있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한테 부채를 선물로 준다고 해서 만들어 준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노가고 나도 노가니 더 선물해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부채도 좋은 것으로 주고 청경이라는 글씨도 써서 줬습니다. 아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비자금을 가졌단 말을 듣고 실망했지 뭐예요”. 그가 노태우 전 대통령께 선물한 부채는 맑게 정치하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보고 실망했다며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부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신경을 쓰는 부분은 구멍을 뚫는 작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신경 쓰지만 구멍 뚫는 것이 제일 신경 쓰입니다. 구멍이 옆으로 뚫리면 비품이 되니까요. 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처럼 뚫을 수도 없고 실수가 있지요. 손으로 잘 맞춰 뚫으면 기분이 좋고 잘못 뚫으면 기분 나쁘고 속상합니다”. 부채 끝에 구멍을 낼 때 가장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그는 “평생해도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부채의 혼과 멋이 매력이다”는 그는 전주 합죽선을 이렇게 말했다. “합죽선은 임금님이 신하에게 하사했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합죽선을 몰라요. 지금은 에어컨, 선풍기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됐지만 합죽선은 전주의 자부심입니다. 전주의 대표적인 물건이고 특산품이니깐 전주 시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관심을 가져야 해요”.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물건인 만큼 잘 보존하고 개발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부채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고집으로 한평생 부채만을 만들어 온 노덕원 명인. 그의 손에 굳게 박힌 굳은 살 만큼 곧고 아름다운 그의 부채가 시대를 뛰어넘어 오래오래 보존될 것이 틀림없다. 송민애  문화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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