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테마기획] 부채 5
관리자(2009-08-10 11:57:06)
백 여덟 손길, 비로소 합죽선을 만나다
전주 한옥마을의 한 모퉁이. 각양각색의 부채들이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서 엄재수 씨를 만났다. 전통 합죽선 재현에 매달리는 엄재수 씨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그가 부채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내가 저 일을 할거란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어요”. 부채 만드는 일이 자신의 업이 되리라는 생각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그는 천상 부채장이였다. 엄재수 씨는 부채를 만드는 일뿐 아니라 부채의 역사를 찾아 정리하는 작업에 열정을 쏟고 있다. 그로부터 부채의 역사에 대해 들었다.
좋은 부채란 무엇일까. “먼저 견고하여야 하며, 그 모양새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해요. 우리의 전통미인 선(線)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폈을 때 속살과 속살사이가 고르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펴고 접기가 수월해야 하며, 한지가 질겨야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손으로 잡았을 때 손 느낌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부채는 조선시대 와서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완숙해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해 가는데, 중국·일본과도 교류가 지속됐지요. 일본에서도 우리의 부채를 모방해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부채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우리 부채가 주위의 다른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거죠”.
정성과 끈기의 결실, 전주 합죽선
부채는 더위를 식혀주는 역할 외에도 일곱 가지 덕목이 더 있다 해 팔덕선(八德扇)이라 했다.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고, 방석으로 쓰이며, 밥상 구실을 하고, 머리에 이고 물건을 나른다. 또 햇볕을 가리고 비를 막으며, 파리나 모기를 쫓고 얼굴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이처럼 부채는 다양한 용도에서 우리 조상들의 필수품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여름철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부채를 들고 다니며 부채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부채 중 특별한 부채가 전주에 있다.
전주의 특산품인 합죽선. 합죽선은 한자의 뜻 그대로 풀어보면 대나무를 합하여 만든 부채란 뜻으로 대나무 껍질만 남기고 얇게 깎아 풀로 붙여 만든 부채다. 합죽선은 우리나라의 전통부채인 접부채(쥘부채)의 한 종류다. “합죽선은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가 아니에요. 조선시대에는 남성들이 필수품으로 합죽선을 액세서리로 가지고 다녔습니다. 부채의 실용적인 기능만을 볼 것이 아니라 부채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의미와 옛 조상들의 정신을 느껴야 해요”.
두덕두덕 기워 입은 옷만큼 해진 그의 손은 얼마나 옹골지게 부채를 만들어왔는지 말해준다. 합죽선은 쥘부채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예술품이다.
하나의 합죽선이 완성되기까지는 일백 여덟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일백 여덟 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합죽선. 정성과 끈기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그야말로 하나의 손 예술이다.
“합죽선을 만들 때 큰 공정을 육방(六房)으로 나눌 수 있어요. 초조방, 정련방, 낙죽방, 광방, 도배방, 사북방으로 나뉘는데 선자장이란 이 육방을 다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일컫지요”.
합죽선 만들기는 제일 먼저 대나무를 잘라서 얇게 깎아내는 초조방을 거친 후 정련방에서 부채의 형태(形態)를 완전하게 만든다고 한다. 다음 공방인 낙죽방은 장식을 하는 곳으로 속살에는 박쥐, 운학(雲鶴), 꽃등의 낙죽을 새기고, 겉대(변쪽)에는 매화꽃 무늬를 그려 넣어 부채에 운치를 살린다고 한다. 네 번째 방인 광방은 말 그대로 광을 내는 곳, 다섯 번째 공방인 도배방은 부채의 종이를 붙이는 곳으로 마무리 검사를 한 후 마지막 공방인 사북방으로 넘긴다. 사북방은 백동이나 황동, 은등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로 부채의 머리를 고정한 후 최종 검사를 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오랜 시간과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합죽선. 그 화려하기가 견줄 데 없고 아름다움이 비교할 데 없다고 해 옛 조상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선시대 합죽선은 귀족문화의 대표적인 물건으로 정착될 만큼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전주 합죽선, 화려했던 그때의 명성
합죽선은 종류도 다양해 먼저 속살의 모양에 따라 낙죽선, 조각선, 옻칠선, 두 번 혹은 세 번 골을 파서 모양을 낸 이등선과 삼등선이 있다. 겉대의 재료에 따라서는 단절선, 무절선, 단목선 등으로 머리 부분의 모양에 따라 승두선, 사두선, 어두선으로 나뉜다. 펼쳐진 모양에 따라선 180도가 펴지는 유무에 따라 광변선, 협변선, 360도로 펴지는 대륜선으로 구분된다. 특히 대륜선은 부채라기보다는 양산의 용도로 사용되던 별선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합죽선의 주사용 계층은 양반 귀족들이었다. 합죽선을 이용해 자신만의 신분을 과시하는 용도로 애용하기도 했다. 전주의 합죽선은 조선시대 임금님에게 진상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 제조를 위해 전주감영은 선사청, 또는 선자방이라는 부속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다. “예전에 합죽선은 양반들에게 애첩처럼 여겨져 자식에게 물리지도 않고, 친구에게 주지도 않고 무덤까지 가지고 갔어요”. 양반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던 합죽선은 일제치하에 들어서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잃어버린 전통의 부채를 되살리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람이 바로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고 엄주원 옹이다. 엄재수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통문화를 되살리고자 끊임없이 전통부채를 연구하고 재현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조선시대의 합죽선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아버지의 유품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어요. 그 책은 조선말기의 부채를 모아 전시했던 전시회의 도록이었습니다. 그 한권의 책으로 잃어버렸던 우리 부채의 선을 찾았고 전통부채를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이때부터 전통 합죽선을 재현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전통 합죽선 복원 분야에서 인정받는 장인이 되었고 여러 전시와 활동을 통해 합죽선의 명성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부채를 고를 때 겉대의 마디부터 보는 것은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부채란 무엇일까. “먼저 견고하여야 하며, 그 모양새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해요. 우리의 전통미인 선(線)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폈을 때 속살과 속살사이가 고르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펴고 접기가 수월해야 하며, 한지가 질겨야 오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손으로 잡았을 때 손 느낌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부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가장 편한 것이 좋은 부채라는 뜻일게다.
“합죽선은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부채가 아닙니다. 1~2년 사용해 한지가 해지면, 그 종이만 교환하여 정갈하게 사용하면 평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부채를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에게 부채는 종합예술이다. 그는 “부채는 겉으로 보이는 미학보다 내재되어 있는 사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8백 20년의 세월을 넘어선 전주 합죽선
예로부터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端午)에는 으레 부채를 선물하곤 했다.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이상으로 특별한 멋을 지닌 우리의 전통문화다. 부채를 분류할 때는 크게 단선(團扇)과 접선(摺扇)으로 나뉜다. 단선은 원선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둥근 모양을 한 부채로, ‘방구부채’가 아닌 ‘둥근부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단선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더위를 이기기 위해 나뭇잎이나 깃털과 같은 자연물을 부채로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부채의 원조인 셈이다.
한편 접선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다. 접선은 부챗살의 수와 부채꼭지의 모양과 장식품 및 부채 바탕의 꾸밈새에 따라 각가지 명칭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자신을 표현하는 기물로까지 인식된 부채는 언제부터 만들어 사용됐을까. 우리나라 문헌의 기록을 보면 방구부채는 삼국사기 견훤조에 공작선에 관한 기록이 있고, 유물로는 의창 다호리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부채손잡이가 있다고 한다. 이 유물은 원삼국 초기인 기원전 3,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부채를 사용했던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357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안악 3호분 벽화의 주인공이 깃털부채를 들고 있어 고구려 귀족사회에서 깃털부채가 사용됐던 것을 살펴볼 수 있죠.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부채에 관한 기록도 나타납니다”. 고려시대에는 쥘부채가 만들어졌다. 쥘부채는 당시 송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송나라 사람인 곽약허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곽약허는 고려 문종 때 고려 사신 최사훈으로부터 쥘부채를 선물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고려시기 때 쥘부채가 널리 사용됐음을 말해준다.
“우리 부채는 조선시대 와서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완숙해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해 가는데, 중국·일본과도 교류가 지속됐지요. 일본에서도 우리의 부채를 모방해 조선 골선(朝鮮骨扇)이라는 부채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우리 부채가 주위의 다른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거죠”.
우리의 전통풍속 중 단오절과 부채는 특별한 관계다. 우리 속담에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선물은 책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오와 부채는 아주 친밀한 사이. 단오가 가까워오면 곧 여름이 오므로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선물하는 풍속이 성행했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 말기까지 행해졌는데 해마다 공조에서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은 그것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부채 중에서도 전주와 남평(지금의 나주)에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내용은 <열양세시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들도 단오가 되면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며 단오 진상이 끝남을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그 풍습은 지금도 부채 장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송민애 문화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