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테마기획] 부채 4
관리자(2009-08-10 11:56:40)
바람의 길, 부채의 역사를 쫓다
송의성 JTV 전주방송 프로듀서
봤다면 업어주고 싶다. 재미없는 지방방송. 그 가운데 내가 밤새서 만든 프로그램을 봤다는 사람을 만나면 업어주고 싶고 때로는 그들 앞에서 몰래 눈시울을 붉힌다. 교양 프로그램 PD에게 이보다 더한 감동은 없다. 재미있고, 화려하고, 짜릿한 중앙방송 대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용기 있게 선택한 시청자. 이런 훌륭한 시청자가 있기에 나는 밤새 손바느질하듯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볼 사람은 본다는 것, 감히 말하는데 그것이 내 방송의 시작과 끝이다.
<바람의 길>을 따라 걷기까지
<바람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도 그랬다. 부채로 방송을 만든다. 에어컨, 선풍기가 있는 21세기에 대체 부채에 관한 프로그램을, 그것도 다큐멘터리를 만들 가치가 있는가. 고뇌어린 자문(自問)을 반복했고 볼 사람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 지역의 훌륭한 시청자들이 볼만하다는 결론을 말이다. 돌아보니 다큐멘터리 <바람의 길>의 시작은 2006년 정초에 전파를 타기 시작한 <TV에세이 고향사람들>을 제작하면서부터다. ‘전북의 원형질을 다시 보자’는 취지로 기획하고 이 땅의 사람, 문화, 자연을 찾아다니며 아직 숨이 붙어있는 오래된 날 것들과 생생히 조우하던 그 해 6월 1일. 나는 이기동이라는 선자장과 그가 만드는 합죽선 이야기를 방송했다. 그리고 속된말로 필(feel) 받았다.
사실 그전까지 내게 합죽선은 노인들의 여러 구식 액세서리- 죽부인, 효자손, 담뱃대 같은 물건-와 별 차이가 없는 사물이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 합죽선처럼 접고 펼치는 부채는 말여, 고려시대에 한 여인을 사모하던 스님이 처음 만들어서 나중에 중국 사람들이 모방한거여. 긍게 세계 최초지, 세계 최초”라는 이기동 선자장의 말에 “네? 최, 최, 최, 초, 라니요?” 나는 잠시 말을 더듬었다. 최초(最初). 이 얼마나 군침 도는 단어인가. 그리해 바람난 이 젊은 PD는 합죽선의 전설을 시작으로 부채에 관한 초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의 합죽선을 원형으로 하는 접는 부채이야기. 하지만 자료를 찾고 공부하면서 합죽선이 세계최초라고 하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중국보다 앞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이 먼저 만들었다는 역사적 근거 또한 상당수 발견되었고 이는 논쟁의 여지가 충분했다.
또한 접는 부채는 유럽에서도 각광받았다는 사실도 발견된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우리 합죽선의 재료(한지와 대나무)와 달리 자신들의 문화에 맞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접는 부채를 만들고 있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았으며 대개 일본, 또는 아시아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한국, 고려를 꼽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의외의 발견으로는 미국에서는 북미부채협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N.A.F.A(North America Fan Association).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부채 애호가의 모임으로 해마다 각주를 돌아가며 약 3일간의 일정으로 정기 포럼을 개최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이 단체에는 한국인 회원이 단 한명 있는데 서울에 사는 여류부채수집가가 바로 그녀다. 그렇게 코피 터지는 정규방송 틈틈이 자료를 찾아 공부했고, 프로그램 기획서를 작성해 나갔으며 두어 달 뒤 다큐의 타이틀을 <바람의 길>이라 정했다. 접는 부채가 전해진 길, 접는 부채가 만들어낸 문화적 반향, 그리고 우리의 접는 부채인 합죽선의 전통 문화적 의미를 다시 보고자 함이었다.
부채, 바람길 따라 찾아 나서다
<바람의 길>은 위 명제를 바탕으로 기획되었고 출발은 순탄했다. 제작비를 서울의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곳에 응모해 받아낸 것이다.
본격적인 촬영은 중국에서 시작했다. 먼저 항저우(沆州)와 쑤저우(蘇州). 특히 항저우는 지난날 동서양 교류의 중심이었던 항구도시로 용정차, 비단, 부채로 이름난 곳이다. 또한 고려의 접는 부채인 백송선(白松扇)을 시로 읊었다는 소동파(蘇東坡)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역사도 역사지만 이 항저우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아시아에서 사용하는 접는 부채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부채기업인 왕성기(王星期) 공장에서는 연간 약 1,000만개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여타 공장에서는 보통 단일 사업장에서 약 100만개가 생산된다고 하며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이 중 한국으로 가는 양은 약 10~20%라고 한다)
항저우에서 서북방향으로 3시간 거리에 위치한 쑤저우는 단향선이라는 접는 부채로 유명한 곳이다. 전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이기도 한 쑤저우(蘇州)에서는 유서 깊은 부채의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졸정원(拙政園)이라는 중국 전통의 정원은 부채형 창문과 정원배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현재에는 이 부채의 전통이 소주 부채역사관을 중심으로 서적, 그리고 영상물로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영상물은 최근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으로 접는 부채가 과거 고려에서 들여온 수입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상하이, 1,200만에 이르는 이 거대 도시 한 복판에는 전통기념품 판매특구가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부채축제를 하고 있었다. 부채축제에서는 주로 부채제작 시연과 전시 그리고 부채수리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떠난 촬영은 유럽의 부채를 찾아서이다. 먼저, 접는 부채를 들고 플라맹고 춤을 추는 나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번화가에는 접는 부채를 파는 노점상이 곳곳에 있으며 태양(sol)의 광장은 특히 유명한 관광명소이다. 이 광장 가장 목 좋은 자리에는 3대째 부채를 파는 전문점 카사 디 디에고(Casa De Diego)가 있다.
주인장에게 우리의 합죽선을 건내 주고 어떤가 물었더니 “니네 접는 부채는 부드럽게 접히고 펴지질 않는다. 좀 빡빡하다. 근데 봐라. 우리 스페인 부채는 손가락 하나로도 잘 펴지지 않느냐. (부채 펴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더니)이것은 큰 차이다”라고 했다. 칭찬을 기대했건만 이건 뭐 본전도 못 찾았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합죽선이 깔끔하게 접히지는 않는다.
아무튼 쓰린 가슴안고 스페인 남동쪽에 있는 항구도시 발렌시아를 찾았다. 여기가 우리로 치면 전주(全州)다. 부채를 만드는 전통장인들이 모여 산다. 특히 블라이(Bly) 가(家)에서는 4대째 부채를 만들고 있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했다. 스페인 여왕에게 진상하는 진주조개 부채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 블라이(Bly)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바다에서 나는 진주조개, 그리고 스페인 해양교역의 중심지인 발렌시아의 해양인접 환경이 부채를 만드는 주요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보여준, 스페인 여왕을 위해 만들었다는 약 2억 원짜리 부채는 정말 ‘억’ 소리 나게 아름다웠다.
프랑스에서는 유럽부채의 유행이 남아있다. 아직도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에서는 소량의 명품부채 컬렉션을 출시한다. 특히 100년 역사의 샤넬 설립자인 코코 샤넬은 검정색 정장과 검정색 부채를 들고 다녔다고 하며, 최근에는 샤넬사의 수석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가 접는 부채를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독특한 미의식을 알렸다고 한다.
부채 전문점도 파리의 공예품 구역 곳곳에 있고 접는 부채만을 전문적으로 경매하는 곳도 존재한다. 또한 루브르 박물관은 접는 부채를 다양하게 디자인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다음은 영국 런던. 300여개의 박물관이 있는 세계적 고도(古都). 이곳은 참으로 전주의 미래가 되었으면 한다. 바로 세계 유일의 부채박물관이 있어 더욱 그렇다. 스페인에도 한 곳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서는 부채와 전통의상을 같이 전시한다. 규모 작은 사설 박물관이지만 부채를 형상화한 세심한 디자인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문고리도 부챗살, 정원수도 부챗살, 창문도 부챗살이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박물관이다. 때문에 찾는 사람도 꾸준하고 그 운영도 탄탄해 상근 직원 두세 명과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운영된다. 정부의 지원 없이도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있다는 형편이다. 박물관 큐레이터인 톰 폭스는 런던 지하철이 더워서 여름이면 접는 부채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 부채라고 자신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갔다. 남쪽의 교토(京都). 이곳의 국립 박물관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부채가 있다. 회선(檜扇)이라는 종류의 이 부채는 회나무를 얇게 잘라 부채꼴로 엮고 그 위에 금박과 채색으로 장식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식 접는 부채의 현존 최고(最古) 원형이 교토의 한 사찰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에서 만난 할리 프레스턴 씨가 말한 대로 글씨가 적힌 목간을 엮은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자. 목간을 엮다보니 우연히 접히게 된 부채꼴 목간이 일본 접는 부채의 원형이라. 일본인 부채 장인도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이 이는 엄밀한 의미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의 도구가 아닌 기록을 위한 목간첩, 혹은 사찰에서 발견된 불교 제의용품이 아니었을까.
반면, 한일 간 누가 먼저 만들었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어떤가. 천 년 전쯤 일이니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이제 그 누가 먼저인가는 좀 따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현재만 놓고 좀 생각해 보자. 적어도 일본은 전통문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교토만 봐도 다수의 부채 장인들이 남아있어 그들이 결성한 부채조합은 시에서 마련해준 공예품 센터에서 공동으로 부채를 전시·판매하고 있다. 교토가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봐도 그렇다. 거리에는 부채를 든 시민들이 보인다. 일본 국민들에게 부채란 집에다 모셔두는 불용품이 아니다. 부채를 쓰는 사람이 있기에 여름에 잡화점이나 백 엔 숍에 가면 부채가 즐비하다. 시민들이 막 쓰는 부채도 있고, 품격 있는 자리를 위한 고급부채도 있다는 것이다. 어른도 쓰고 아이도 쓰니 중국산 저가품도 팔리고, 지역의 장인들이 건재하니 고급품도 소비된다. 이렇게 깨어있는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부채를 사랑하는 것, 그들의 전통문화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지켜진다.
전주, 바람의 도시가 되기를 바라며
이제 먼 길 돌아 전주 땅에 서서 이 합죽선을 다시 보자. 유럽에서는 예술로, 중국에서는 산업으로 일본에서는 살아있는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접는 부채와 비교해보자. 우리의 전통문화 합죽선은 현재를 말이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밥 먹고 살기 바쁜 전주 시민의 시선으로 보자. 합죽선은 한옥마을의 경기전 인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노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예품이다. 또한 TV에 가끔 나오는 극소수의 장인들이 비전(秘傳)하는 수공예로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도구이자 나와 상관없는 전통문화다.
이런 반응들은 나열하기 부끄럽고 두렵다. 합죽선은 이 시대에 자연사(自然死) 혹은 멸종의 상황을 맞이했다. 천 년 전 태어나 그 오랜 여정을 뒤로 하고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합죽선. 시대는 이 합죽선을 존엄사 시키고 내장을 긁어내어 포르말린에 담갔다가 박제로 만들어 유리전시실에 안치한 뒤 무척 흐뭇해하는 듯하다. 똑똑히 보라. 여기 전주 땅 곳곳에는 합죽선이 자랑스럽게 죽어있지 않은가.
내가 본 문화란 그런 것 같다. 대저, 합죽선을 통해 본 문화란 생명을 가진 것. 특히 전통문화는 멸종위기의 생명체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죽어 박제가 되어야만 전통문화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니…. 대체, 살릴 방도는 없는 것인가. 합죽선이라는 위기의 전통문화 생명체가 스스로 자생력을 갖추도록 우리 전주에서만이라도 최소의 생존환경을 만들어 주면 안 될까. 전주가 아닌 최적의 보호장소가 있던가. 아니, 전주만큼 번성해야 할 땅이 한국에서 어딘가.
이제 전주에서 시작해보자. 그리고 아이디어 좀 내보자. 식당에서는 찍어낸 메뉴판 대신 합죽선 메뉴판을, 젊은이들은 USB가 내장된 작은 합죽선을, 아이들에게는 서양식 교구 대신 부채 만들기 제작 키트(kit)를 쥐어 주면 어떨까. 부가가치도 필요하다. 반야심경 한 구절, 잠언 한 구절, 사서삼경의 한 구절 멋지게 합죽선에 써서 관광객에게 좀 팔아보자. 싸구려가 아닌 잘 만든 한옥마을 지도를 부채에 담아 파는 것도 좋겠다. 아니 그냥, 전주시에서 해마다 단오날이면 주민등록증 나온 모든 성인들에게 합죽선 한 자루씩 주면 좋겠다. 그래서 음력, 5월 5일을 합죽선의 날로 정해 부채 든 시민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하자.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도 좀 시작하자. 이는 비단 합죽선뿐만이 아니다. 누구보다 전통문화의 가치를 어른들이 먼저 좀 배우자. 그래서 젊은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치자. 어른들도 모르는 전통문화를 후손들에게 막연히 주입시켜서는 도무지 문화적 생명력이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성세대가 그 원형질을 제대로 갖추되 다만 그 학습방법만큼은 다양화해 배우는 사람 지루하지 않게 해줬으면 싶다. 특히 이럴 때 공교육에서 좀 배려해 주면 고맙겠다. 우리의 지역사, 지역문화를 하나의 교과목으로 만들고 한지, 합죽선, 전라감영 이런 것들로 내용을 채우고 재미있게 가르치면 금상첨화리라.
마지막 선자장 이기동 선생님이 지난 6월 1일 작고했다. 늦었지만 지면으로나마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환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대나무를 깎던 당신의 모습이 선하다. 그가 남기고 간 합죽선, 전주의 부채이자 우리 모두의 부채(負債)다.
송의성 2001년 JTV 전주방송에 입사한 이후 주간 <시네마 토크! 아줌마 극장에 가다>라는 프로그램과 <TV 에세이 고향 사람들>, 다큐멘터리 <바람의 길>을 제작한 바 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주간 <전북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