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문화시평] 모악에 품다
관리자(2009-08-10 11:51:06)
모악에 품다
(6월 12일~7월 19일) 전북도립미술관 전시실
그림의 숲을 거닐며
이정웅 화가, 전주대학교 도시환경미술학과 객원교수
“그림들은 논증될 수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연과 동등한 것이지, 자연에 대한 도해가 아니다. 그에 대한 시금석은 미술가가 지닌 상상력의 깊이다” (존 호일랜드)
예술의 종말 이후 다양한 희망찾기 예술프로젝트는 지배소의 역점사업이기도 하다.인간이 추구하는 다양한 지배소의 현상은 다원 결정된 율동적 특성들을 내보이고 있다. 존 호일랜드의 인식론적 상상력은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상상계의 구조들에서 수동적 부대현상이나 무화이거나 지나간 과거에 대한 헛된 성찰이 아닌 변화된 창조의 활동을 보여주고자 살아있는 영혼의 심장들을 요구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절제된 색채와 이미지로 노매디즘 시각적 화두를 객관적 논증과 상상계의 지배소(프로이의 용어로서 넓게는 서로 구조적 관계에 있는 여러 인자들에 의한 복합적 결정 작용을 의미하고 좁게는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복합적 원인들을 지닌 무의식의 모든 형성과정을 의미)로 자신들의 세계를 가꾸는 일군의 여성작가들이 있다.
동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지향점에서 만나다
지난 6월 12일부터 7월 19일까지 영산(靈山) 모악에 자리 잡은 전북도립미술관에서는 <모악에 품다>라는 제하에 이 지역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하는 8인의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는 각자 특유의 시각과 감성으로 얽힌 다양한 삶을 보여줬다. 더불어 이 지역 여성미술의 현황과 정체성을 심도 깊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전시에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문인화의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50대 후반부터 70대 초반의 여성작가 8인, 임섭수 하수정 김화래 김연익 송영숙 양화선 김수자 하수경이 참가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각 전시실마다 마치 그림의 숲을 걷고 있다는 기분에 빠져 들었다. 물론 이들은 주제, 매제, 접근방식, 표현형식도 제각각이며 현재의 지점도 모두 동떨어져 있는 듯 보였었지만 그럼에도 지향점은 하나인 듯했다. 산을 오르는 길은 다르지만 결국 다다를 곳은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이며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상상계인 것이다. 무한한 상상계 속에 그들이 요구하는 지배소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삶과의 소통일 것이다. 예술과의 만남이다.
이들의 지난 수십 년간 각자의 작품세계에서 수차례 내용과 형식의 변화과정을 거치며 독자적 정체성을 이룬 흔적들이 각 전시실에서 숲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삶과 예술의 연금술사가 되어 그들의 몸부림을 다양한 열매로 맺게 하고, 숲을 거니는 우리에게 향기로써 인식하게 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세상을 보다
작가 임섭수는 자신의 일생을 천착하는 주제 ‘자연’의 느낌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한 듯 했다. 사물의 외형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여백의 미를 중시하면서 사의적인 실경산수와 문인화적인 표현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웅장함과 숭고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수경의 작품들 속에는 드러남 보다는 가라앉음, 떠들썩함 보다는 조용함, 지리한 산문적 설명보다는 몇 줄의 운문으로서의 함축과 은유에 가까운 작품들을 선보였다. 따라서 기법적으로도 극적인 구도나 화려한 묵(墨)의 변주를 절제하고 있음이 역력해 보였다. 수더분한 붓질들마저도 어쩌면 우리네 옛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삶의 내력 속에 체질화되어 흘러온 것 같다.
김수자의 바느질 모양은 작가 자신의 인생이 물씬 베어 나왔다. 마치 한 벌의 옷을 재단하고, 바느질하고, 염색하고, 마무리해 내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꿰매고 시친 자국과 칠하고 찍고 뿌리고 흘린 과정이 그대로 모종의 이야기를 하나의 추상작업으로서의 존립을 그대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드러난 작업이다.
송영숙의 작품들 속에는 콜라주를 이용한 공간적인 느낌 속에 장식적인 오브제를 이용해 여성미가 물씬 풍기면서 의식의 자유로움과 방향감각의 자유분방함이 색과 형태에 종속되지 않는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산, 나무, 갈대, 풀, 꽃 등이 바람의 흐름을 연상시킨다. 선과 형태, 색채들을 이용한 풍경들은 자신의 내면을 대변하는 어떤 세계, 마치 음악의 율동감을 가진 듯 유동하는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이 보이면서 자신의 내면에 담긴 자연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양 화선의 작품 중 홍수가 범람하는 물위에 쪽배가 놓여있고 그 가장자리에 한 마리 새가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줄기가 물에 잠긴 나무의 무성한 잎은 모두 떨어져 지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물결에 밀린 배는 곧 침몰할 것만 같다.
그림의 숲 속에서 가득 퍼지는 숲의 향기
제5전시실의 작품들은 우리 지역의 문인화를 대표하는 하수정, 김화래, 김연익의 각기 다른 느낌의 작품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예로부터 문인화는 동양적 사고의 정신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술이다. 또한 자연을 포착하여 마음으로 그것을 연소시켜 획과 점, 선, 면으로 정착시키면서 시(詩), 서(書), 화(畵), 음(音) 무(舞)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예술이라고 한다. 소리는 없지만 회화 속에서 음악처럼 들리는 아름다움과 바람불 때 춤을 추는 대나무 모습을 뜻하는 이 말은 예술을 표현할 때 가장 적합하다.
하수정은 전통적인 문인화를 나이에 맞지 않게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실험성을 가미해 재료와 기법을 달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기존에 서예와 문인화가 문방사우(文房四友)에 작품을 담아냈다면 화선지 대신 천연염색한 삼베, 모시, 한지천과 닥지 등을 사용하고 먹 대신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또한 붓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사용한 흔적들이 작품들 속에 물씬 배어있었다. 과연 문인화의 새로운 시도, 파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시도 속에도 과감한 화면의 분할과 단순한 붓의 터치 등 신선하고도 한없이 섬세한 작품들은 전통적인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단청 또는 민화를 연상케 하는 원색적이고 강렬한 채색을 응용해 쓰는 등 문인화의 기운생동(氣韻生動), 서예의 절제되고 자상한 붓놀림들이 역력히 보였다.
김화래는 전통적인 성향이 강한 문인화로 필치의 힘이 아주 강해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한국화에서 보이는 수묵농담의 깊은 정신세계와 몰골법적인 표현, 작품마다에 표현된 원근법적인 기법이 작품에 반영되었다.
김연익의 작품은 일필에 의한 전통전인 문인화 작품으로서 여성적인 섬세함으로 우아한 품격과 서정이 넘치면서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넉넉한 비움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림의 숲에서 숲의 향기를 만끽하며 거닐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각자에게 주어진 생활의 틀에서 문화를 즐기는 새로움은 저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한정된 기간은 평범한 일로 이루어지는 발걸음일지 모른다. 그런 중 기쁨과 고통의 나열이 있고 각자의 발걸음마다 그에 따른 다채로운 사안들이 채워지는 것 일게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삶(자연,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을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덕분에 감상하는데 부담이 덜했고 친근감이 느껴져 폭넓은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전시는 또 다른 작가들을 위한 무대로 연결되며 기한을 두지 않고 계속 될 것이라 하니 기대해 볼만하다.
이정웅 전주대학교 미술학과와 동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해 전라북도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전북청년미술상 등 다수의 대회에서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도시환경 미술학과 객원 교수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