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관리자(2009-08-10 11:48:20)
전주민삼현육각 보유자 최병호
이제 전주민삼현육각이 끊어질 일은 없을 것이여
정리 최정학 전주세계소리축제 홍보팀
사진 유희중 사진가
대금, 수피리, 곁피리, 해금, 북, 장고. 이 여섯 가지 악기만 있으면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잔치판에는 흥을 더했고, 행진하는 발걸음에는 당당함을 더했다. 향교의 제례나 사찰의 불사에 있어서도 빠질 수 없었다.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이야기다.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는 그 여느 지방 못지않게 다채로운 삼현육각을 갖춘 고장이었다. 그러나 최장복, 전추산, 장원술, 백완용, 성기선, 성실용 선생 등 전주민삼현을 이어오던 마지막 악사들이 하나둘 작고하면서 전주삼현육각의 전승도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최병호 선생은 당대의 연주가들과 함께 전주삼현육각의 전성기를 관통했다. 하지만 삼현육각 명인들의 작고와 함께 그도 한동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제 전주민삼현육각을 되살리고 보존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한 그의 첫 작업은 37곡의 민삼현육각 곡을 악보위에 그대로 기록해 내는 것이다. 3년 세월 동안 피와 땀을 쏟아 부은 대작업. 지금 그는 그 누구보다 편안하다. 적어도 그가 꼭 해내야 할, 그리고 꼭 했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다.
최병호 선생 연보
1931년 전북 전주 출생
1944년 최장복(최병호 선생의 부친) 선생에게 민삼현육각곡 대금 사사
1946년 전용선(추산) 선생 민삼현육각곡 대금 사사
1952년 전주 명논대학교 철학과 졸업
1960년 충남부여국악원 민삼현육각곡 강사
1976년 대전연정국악원 민삼현육각곡 강사
1987년 전북도립국악원 상임연구위원 근무
1989년 전북도립국악원 민삼현육각연구복원 발표
2005년 전주민삼현육각보존회 민삼현육각 정기공연
2006년 전주민삼현육각보존회 민삼현육각 정기공연
막내아들이라 참 호강하면서 컸어
어려서 태어날 적에는 전주시 완산동, 저 다가공원 밑에 새 동네, 옛날에는 새 동네라고 그렸어. 지금으로는 서부 완산동인디, 거기서 내가 31년도에 태어났어. 내 호적 나이가 지금 31년 8월 4일생 인게. 그 후로는 일곱 살 땐가, 지금 살고 있는 전주시 삼천동으로 이사를 왔어. 아부지랑 같이 가가지고, 거그서 살았어. 초등학교는 우전국민학교를 나왔지. 사실 내가 막내아들로 태어나가지고 참 호강시럽게 컸어. 일제 때는 다들 어렵게 살았어. 우리 집은 그래도 우전동이라고, 지금은 삼천동이 되았는디, 거기에 논마지기라도 크게 있어서 풍족허게 살았었어. 아부지 취미가 기악이기 때문에 그냥 풍류객들 모아놓고, 늘 사랑방에서 놀고 그랬어.
우리 아부지가 율객이여. 율객이라믄 풍류도 하고 이렇게 하신 분들인디, 우리 집에다가 말하자면 객실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연주도 하고, 삼현육각도 허고 그랬어. 옛날 같으면 사랑방이지.
음악 신동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들으믄 자꾸 머릿속으로 들오드라고. 어려서부터 자꾸 그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그래서 숙제 얼른 해놓고는, 거그가서 쭈구리고 앉아서 듣곤 했지. 그거를 듣고 머릿속으로 다 외와버려. 그러다가 음이 틀리며 내가 그거 틀렸다고 그러고, 그러면 어른들이 “아 저놈 봐라”하면서 신동이라고 그랬어. 그렇게 음악에 소질이 있었어.
공부방에서 공부하다가 머리 식힐라고 나오믄 인자 그 양반들 음악이 머릿속으로 다 들어와. 그래가지고 구음으로 다 외워버렸어. 그러니까 아부지라든가 다른 분들이 “아 신동 하나 생겼다”고 해가지고는 그때부터 대금, 피리 같은 관악 계통으로 많이 배웠지. 그때 우리 집에 전춘선 씨, 백완용 씨 같은 쟁쟁한 분들이 많이들 왔으니까. 그때만 해도 일제 땐디 우리 집 생활이 그렇게 곤란하진 않았어. 그때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 만해도 보통은 아니지.
중학교 가서는 악보를 배웠어. 중학교에 가서 양악을 할 적이었는디, 색소폰 부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드라고. 그래서 아부지를 졸랐어, 나 악기 하나 사달라고. 아부지가 공부나 하지 뭔 악기를 하느냐고, 그러면서 차라리 국악을 해라고 하셨어. 나는 국악은 아직 안 배우고 싶다고 악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색소폰을 하나 사가지고 매일 악보보고 연습하고 그랬어.
삼현육각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그때 그 시절
그러다가 6.25 사변 무렵에 내가 명논대학을 들어갔지. 2년 수료하다가 6.25가 터졌어. 그래도 2년 수료로 그냥 졸업은 했어. 옛날에는 단과대학이라고 했지. 수료를 해가지고는 군인 갔다 와서 직장을 다녔지. 직장을 다니면서도 음악을 했다 이 말이여. 저녁에 퇴근해서 오면 음악을 허고 했지.
그러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삼현육각을 했어. 말하자믄 유명하신 분들, 백완용, 전용선, 신쾌동, 장원술, 신기선 씨 같은 분들하고 삼현육각을 혔어. 내가 인자 대금이라 시발을 해가지고 맨 처음 연주를 시작하면은, 다 따라서 하곤 했지. 어린놈이 어르신들 모시고 조청을 허면은 어르신들이 참 신기해 혔지. 그러고 가면 귀여움을 받아. 그때만 해도 어렸고 얼굴이 좋고 예뻤으니깐, 구경 온 분이라던가 참석한 분들이 날 귀엽게 봐줘서 상당히 호강했어.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까지는 삼현육각을 많이 찾았지. 향교라든지, 서원, 주로 절 같은데서 많이 찾았어. 충분한 생활은 안 돼도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찾으니까. 한 번씩 찾아가면 보수는 많이 받지. 그때는 남달리 대우도 좋고, 보수도 많이 받았어. 그랬는디, 이 양반들이 연세가 들은 게 하나썩 둘썩 돌아가시네. 그때 그 어르신들이랑 같이 돌아댕기면서 연주하던 때가 참 좋았는데.
삼현육각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풍류라는 것 중에 향풍류라는 것이 있었어. 향제라고도 했지. 판소리로 말하자면 동편제, 서편제 있듯이 향제가 있어. 그때는 특별한 음악이 없고, 지금같이 트랜지스터니 이런 것도 없었어.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삼현육각을 해서 어디서 초청돼 갔다 오면 보수도 좀 받고 했지. 그걸로 밥이나 술도 자시고, 그때는 생활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
생활이 어렵지 않으니깐 쉴 때에도 서로 앉아서 풍류를 했지. 관악으로는 대금, 피리, 해금 이런 게 있고, 현악으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가지고 연주했어. 또 때로는 삼현육각 조청곡을 연주하고, 조청곡은 예악이라고도 하고 제례악이라고도 혀. 제사지낼 때 쓰는 음악이여.
삼현육각이 뭐냐 하면, 대금 하나, 피리 둘, 해금, 북, 장구 그렇게 해서 육각이여. 피리는 향피리라고 큰 것이 있어. 악기 여섯 개가 모이고 현악이 들어갔다고 해서 삼현육각이라고 불러. 그것이 삼한시대부터 내려왔어. 삼현삼죽이라고도 했고, 삼현육각이라고도 부르고 했지.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거여.
옛날에는 전라북도 전주에 관찰사가 있었어. 지금 같으믄 도청 도 소재지여. 그때는 궁중음악이 보급되지 않으니깐 지방은 다 삼현육각을 썼어. 그러니까 삼현육각이 제례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취타악, 행진곡, 이런 것들이 다 삼현육각에 포함돼 있어. 그런 게 관청에서 이 사람들을 그때그때 불러다 썼어. 그것뿐만 아니라, 뭐 염불곡이라는 것이 있어서 절 같은데 가서도 많이 허고 그랬지. 그때는 기악이라고 하는 것이 삼현육각 밖에 없었으니까. 행사 때 라든지, 제례를 지낼 때도 많이 쓰고…. 한창 붐이 일어서 많이 썼지. 1948년 전까지는 그렇게 많이 삼현육각을 찾았어.
구전심수로 배우는 삼현육각
내가 맨 첨에 삼현육각 배울 때는 악보고 뭐고 암것도 없이 구전심수로 배웠어. 그런데 내가 악보를 볼 수 있잖아. 중학교 때부터 악보를 배웠으니까. 그러고 내가 테너 색소폰을 했어. 처음에는 클라리넷을 배웠다가 나중에는 색소폰을 배웠어. 그리고 군대에 갔더니 내 경력을 보더니, 군악대에 편입됐지. 내가 군악대 출신이여. 그렇게 악보에는 내가 아주 능통허잖어. 이 삼현육각 37곡을 전부 악보에다가 고정시켰어. 37곡 안에는 제례악도 있고, 연회악도 있고, 취타곡도 있고 다 있지. 염불곡, 말하자믄 절에서 스님들이 장삼풀이 할 때나 승무 같은 거 할 때 쓰던 반주도 다 넣어놨어. 37곡을 전부 오선에다가 딱 정리해놨지. 그러니깐 같은 국악인들 중에서도 남다르지. 그때만 해도 참 모다 악보로 해놓은 게 알아줬지. 지금 제자들도 전부 악보로 갈치고 있어.
후손들을 위한 악보 정리 작업
예전에 같이 삼현육각 연주하던 어르신들이 나이 잡숫고 다 돌아가셔버렸는데 나 혼자 뭣 허겄어. 삼현육각은 여섯이 있어야고 적어도 넷까지는 있어야 하는디. 나 혼자서는 못헌게. 아 이거 안되겄다 하면서 도립국악원에 들어가서 악보를 전부 정리했지. 악보 정리하는디 3년 걸렸어. 왜냐하믄 내가 불고 적고 불고 적고, 그 가락이 아니믄 또 다시 고치고…. 그것이 쉬운 줄 알어? 쉽지 않아, 안 쉬어.
아무리 내가 악보에 능통하고 양악을 했다고 하더라도, 또 양악하고 국악은 다르잖아. 성음이랄지 이런 것들도 다 틀리고, 그래도 삼현육각이 정악 비슷하니까 악보가 있지, 판소리 같으믄 악보 정리 작업도 못 혀. 그 뒤에 살풀이도 알아가지고, 살풀이도 악보화했지. 그렇게 두 가지는 했어. 두 가지는 해놨는디 악보를 볼 줄 알아야 허지, 모르믄 못봐. 일일이 장구 가락도 치고, 피리도 불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금방 할 것을 3년이나 걸렸어. 한 곡 한 곡 일일이 하나하나 악보를 정리 하느라고. 그래가지고 종합해 장구, 피리, 대금, 해금도 전부 같이 하게끔 악보를 고정시켜버렸어. 따지고 보면 이 악보가 참 중요한 것이지.
악보 남긴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힘이다
악보를 볼 줄 아는 것이 큰 힘이여. 내가 삼현육각을 입으로 가르칠게 아니라 이걸 악보화 해야겄다고 해서 작업을 시작했는디, 아 이거 쉬운 문제가 아니네. 긍게 대금은 내가 부는 방법을 아니까 쉬운디, 피리해야지, 해금해야지, 북하고 장구 장단 맨들어야지. 그래가지고 삼년 동안을 애먹었어. 악보를 고정시키는디. 악보에다가 고정시키고 나니까, 그때서야 한숨이 나오더라고. 그래가지고 갈치니까 된단 말이여. 아 이게 보물이다 싶었어. 그래서 이 악보 남겨놓은 것이 내게는 큰 힘이여.
1989년에는 악보 정리 딱 끝내놓고 전라북도립국악원 민삼현육각연구복원 발표회도 가졌어. 그때 찍은 사진도 있어. 그때는 우석대학교 학생들을 데려다가 갈쳐가지고 했어. 내가 이 삼현육각은 어떻게 해서라도 복원해서 전수시켜야겠다는 뜻은 항시 갖고 있었어. 다른 일을 해먹고 직장 일을 하고 사업을 해도 말이여. 그러니까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늘 이걸 들여다보고 했지. 그래서 악보 정리 해놓고 복원 발표하니까, 반응이 참 좋았지. 옛날 국악 악보 맨드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없잖어. 긍게 이게 아주 새로운 동지다, 큰 동지다 해가지고는 반가워들 했지.
인자 와서는 각 대학 국악과 같은데서 기악 같은 거는 전부 악보화했잖어. 그런디 그때만 해도 악보가 없었어. 그때 그래서 도립국악원 관현악단도 내가 창립을 시켜놓고 나왔어. 삼현육각으로 창립을 시켜놓고 나왔어. 그것이 인자 발전이 되가지고 지금 도립국악원 관현악단이 있지. 내가 시초여.
내가 죽어도 악보는 남는다
둘째 아들이 서울 국립국악원에 있다가 나와 가지고 지금 개인학원을 서울서 하고 있어. 걔가 인자 아쟁을 하고 있어. 전주대사습놀이 나가서 장원도 했고, 지금 전국대회에서 대통령상까지 탔으니까. 이제 걔한테 남은 것은 문화재밖에 안 남았어. 내가 죽고 나믄 이런 것이라도 남아있으니까, 가계로 넘어가는 것이지 뭐. 왜냐 악보로 고정을 시켜놨으니까. 지금 다른 음악 같은 것은 악보가 없잖아. 판소리도 지금 악보가 없어. 전부 구전심수로 서로 주고받는 거지. 그니까 그분들 죽으면 제자들이 허는디, 그 선생이 불러준 가락 같이는 못 허지. 허지만 이것은 악보가 딱 고정되어 있으니까 이 악보를 보면 전수가 가능하다는 것이지. 이것밖에 내가 자랑할 것이 없어.
그런데 왜 문화재를 신청을 안 하냐고 말들이 많았어. 그런데 문화재 신청을 내가 욕심으로 헐 필요가 뭐 있냐. 내가 국악을 좋아했고, 오늘날까지 삼현육각을 보존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걸로 만족혀. 내가 제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삼현육각 37곡 악보 정리를 했다는 것이지.
옛날에는 각 지방마다 삼현육각이라는 것이 다 있었어. 현재에도 삼현육각이 많이 남아있어. 경기도 삼현육각 있지, 나주 있지, 곡성 있지, 몇 군데 있어. 한 대여섯 군데가 남아 있을거여. 거그 그 사람들은 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지금 현재 나만 등록이 안 돼 있어. 그동안에 뭐 그런 거만 믿고 살수가 없잖아. 옛날, 국악이 그렇게 발전되기 이전에는 삼현육각을 많이 썼기 때문에 생활이 됐지만, 지금은 생활이 안 되잖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중간에 사업을 좀 하는 통에 문화재 신청은 안했었지.
그런데 주위에서 자꾸 권고를 하니까, 한번 해볼까 하고 서류만 작성해놓고 신청은 아직 안했어. 헌다고 허는디, 어떻게 될랑가 몰라. 어떻게 될랑가 모르지만은, 현재까지 내가 보존하고 있는 것은 곡 자체를 악보화했어. 그래서 이 악보를 보면 누구든지 삼현육각을 연주 헐 수 있어. 이것이 인자 내가 죽고 난 뒤라도 전승이 되는 거지. 만약에 내가 별 탈 없이 아주 몇 년이라도 지금같이 활동할 수 있다면, 각 학교 대학 같은디 연결시켜 가지고, 보수 같은 것은 필요 없응게 그냥 제자들을 양성시킬까 고민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