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내 인생의 멘토] 나의 아버지
관리자(2009-08-10 11:46:30)
당신의 그늘이 그리워지는 날
정성환 전북대학교 교수
‘당신의 그늘은 참 시원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이런 제목의 글을 보는 이는 내심 뭔가 특별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거나 혹은 드라마틱하고 가슴 찡한 것을 기대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나의 것은 전혀 그렇지 못함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가 ‘내 인생의 멘토’라고 하면 왠지 진부하고 신파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 다른 많은 아버지들과 달랐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아버지와는 여느 부자관계와 마찬가지로 살갑거나 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아버지의 지독하게 급한 성격과 독단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어릴 적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곤 했다.
내 인생의 멘토, 나의 아버지
내 인생의 멘토이긴 하셨지만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대학 졸업도 하기 전부터 한국 최고의 광고대행사를 다닌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이해가 안 되셨는지 스스로 해석하시기를 ‘제일OO’라는 회사에서 광고를 한다고 하니까 ‘제일+광고=제일광고’,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집이 ‘OO광고’, 아! 그러니까 우리 얘가 삼성그룹사를 다닌다는데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간판을 만드는 거구나. 이걸 또 동네에 자랑을 하셔서 친구 분 간판을 부탁받아 오기도 하셨을 정도였다.
내 기억으로는 30대 후반이 아버지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가 유일하게 아버지의 중절모에 양복을 입은 사진이 있는 시기이자 그때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가족은 서울의 충무로 그러니까 스카라 극장 건너편에 살았고 그래서 나 또한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어려서부터 지독한 헐리우드 키드였는데 그런 부유한 환경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헐리우드 키드였던 그것이 디자이너인 내가 많은 영향을 받은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어느 날 트럭으로 온 가족이 어디 먼 시골 같은 곳으로 이사를 한 이후로는 좀처럼 그때와 같은 때는 쉽게 다시 오지를 않았다.
아버지에게 좌절은 없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남에게서 봉급이라는 것을 받으신 적인 없으셨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탓도 있겠지만 절대 남의 밑에서 가서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정년도 없어 치매로 입원하시기 전날에도 80이 넘은 연세에 오토바이를 타고 일하셨을 정도로 워커홀릭(workaholic)이셨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이 피붙이라곤 전혀 없고 짧은 학력으로 혼자 구상해서 하는 일이어서 절반은 성공, 절반은 실패, 거기에 따라 집안 사정은 울렁증이 생길 정도로 파도타기를 했음은 물론이었다. 큰 실패를 겪으면 당연히 좌절할 법도한데 아버지는 아마 절대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던지 속된 말로 홀딱 망해서 전혀 모르는 동네 월세 방으로 이사를 가서도, 평생을 그렇게 하셨듯이, 새벽이면 어디론가 나가시곤 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오토바이 사고로 며칠, 치질수술로 며칠 빼고는 평생을.
어떤 때는 사업이 망해서 들어가 살집도 없어지자 손수 무허가 판자 집을 뚝딱 지어서 살다 몇 차례 이사를 하기도 했다. 홍수로 판자 집이 떠내려가자 그 다음날로 너무나 솜씨 있게 그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이번에는 홍수에도 끄떡없을 법한 판자 집을 지어서 살았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멀쩡하게 생긴 기와집으로 이사를 해 무허가 집 신세를 겨우 벗어났나 하면 어느새 집이 수십 채, 우리가 사는 집은 언제나 요새 말로 하자면 모델하우스였다. 아버지는 결코 좌절이란 몰랐다. 아버지는 결코 진적이 없었다. 치매에게만 빼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는 비단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 대해 신뢰했다. 나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참견을 하지 않았으며 물론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스스로의 몫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권유로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가 공부에 대한 관심은 고사하고 미술을 한다더니 급기야는 고등학교 2학년 말 미술대학에 가서 디자인을 하겠다느니 그러니 화실을 다녀야 한다느니 하자 집에는 비상이 걸렸다.
월남가족인 관계로 친척이라곤 촌수로는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는 고모 두 분과 고모부가 계셨는데 아버지 성격 탓에 왕래도 별로 없던 이분들까지 어머니와 합세해서는 미대는 안 된다 하셨다. 남자가 무슨 미술이냐, 디자인 그거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냐며 반대를 했다.
그때까지 누구나 부러워할 은행원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를 하고 계셨을 아버지가 허락인지 포기인지 침묵으로 일관하시니 다시는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나에 대한 지지의 표현은 실기시험 보는 날, 합격자 발표 날, 그 먼 대학까지 추운 1월에 부득불 아버지는 오토바이 뒤에 나를 태우고 한 마디 말없이 태워다 주시곤 하셨다. 그게 아버지의 나름대로의 애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내가 7년의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전임강사가 되었다고 하자 아버지는 무덤덤한 반응이셨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융통성이 없고 답답한 졸장부들이나 하는 것으로 영 탐탁찮게 평소에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마디 내색도 없으시더니 한밤중 깊이 잠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 두고 잔 전임강사 발령장을 아버지께서 말없이 들여다보고 계셨다. 쉽지만은 않았던 대학원과 직장생활의 병행, 그 지긋지긋한 대학원 논문, 짧지 않은 시간강사 생활,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그 긴 과정을 모르셨을 리가 없었을 것이며 그저 한 마디 ‘수고했다’란 말씀조차도 아끼셨지만 그 또한 나에 대한 지지였으며 아마 이것이 내 평생의 지지자이자 멘토이셨던 아버지께 해드린 유일한 효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평생 ‘새 나라의 어린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그리고 정말 어린이처럼 정직하셨다. 꺾이지 않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내가 살아가면서 아버지를 멘토로 생각하는 이유다.
이제 내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멘토가 돼야 하는 입장에서 정말 학생들에게 멘토가 되어 왔던가, 되고 있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정말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것과 같이 무조건적인 지지와 믿음, 말을 극도로 아껴도 전해지는 따스함.
그리고 본받아야 할 평소의 생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정성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제일기획에서 근무했다. 1989년부터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로 취임한 후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