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 |
[환경] 장영란의 자급자족 이야기
관리자(2009-08-10 11:45:14)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보자
전화가 왔다. 무전여행을 하는 고등학생인데, 우리 집에 하룻밤 묵어가도 되겠느냐며. 그러라고 하고 오는 차편을 알려주려니, 히치하이킹을 해서 갈 터이니 주소만 알려달란다. 서너 시간 뒤 집으로 들어서는 걸 보니, 자기 몸집만큼 큰 배낭부터 보인다. 배낭을 내리고 인사를 하는 얼굴이 풋풋하다. 땅끝 마을에서부터 몇날며칠을 걷다가 이렇게 무작정 걷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단다. 학교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휴학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어서 그 길로 쭉 가다 어느 순간 그게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내가 살아갈 방향을 찾아가는 길
우리나라 고등학생. 정해진 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그저 앞으로 쭉 대학까지 가는데, 이 아이는 중간에 멈춰 섰다. 그것도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얼까’를 찾아보겠다고.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길. 이 얼마나 소중하며 인생에서 한번은 맞닥뜨려야 할 일이긴 분명한데 고등학생이 그런 결단을 했다니….
부럽다. 자신을 세우는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유신세대인 나는 서른이 넘어 마흔으로 갈 때가 되서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었으니까. 박정희 정권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중학교부터 대학을 10월 유신 아래서 보냈다. 대학 4학년에 올라가던 해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보내는 동안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족과 역사에 흔들리고 맞서고…. 그러다 살만하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모르겠더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는다고 찾아보았다. 하루아침에 딱 떠오를 리가 있나. 남이 세운 철학과 가치관 가운데 근사해 보이는 걸 따라해 보곤 했다. 그 연장선으로 시골에도 오게 되었다. 자연에서 산다는 게 근사해 보여서.
시골 와서도 근사한 철학을 따라 살았다. 그런데 도시는 똥을 누고 물을 내리면 끝이 나지만, 시골은 똥을 누고 그 구린 똥을 자기 손으로 뒤처리까지 해야 하는 곳이더라. 사람들한테 근사한 이론을 펼쳐 보이니 돌아오는 것은 뒤통수 따가운 눈총이다. 자기 게 아닌 걸 자기 것인 냥 하니 뒤가 다 보이는 것이다.
“아, 내버려둬. 내대로 해 보게”. 이 말을 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이불 밑 활갯짓이라 식구들 앞에서나 하지, 남 앞에서는 잘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지난 십여 년 시골 산 보람을 느낀다.
유행에서 소외되고 사람들을 적게 만날 수밖에 없는 시골. 아무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남들 따라 가면 중간은 가는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는 손수 하는 일이 많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일도 많다. 그 덕에 내 바깥으로 향했던 눈이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으리라.
내 대로 해 보겠다고 호기 있게 외치고 논밭으로 간다. 거기서 내 맘대로 해본다. 그러면 그때는 될 것 같다. 내가 심는 대로 곡식이 심기고, 내가 베는 대로 곡식이 베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순리에 어긋났는지 아닌지 대번 표가 난다. 자연에 순리가 있다는 걸 자연이 온몸으로 가르쳐 준다.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일은. 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맞닥뜨린 청소년들을 보며, 나는 그 청소년이 아닌 그 부모 세대가 더 안타깝다. 사오십 대인 부모 세대들. 우리들은 모든 걸 희생하며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아침이면 눈 뜨고 출근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또 하고, 안식년은커녕 휴가 한번 변변히 쓰지 못하고 살아왔다. 무엇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과 성장을 위해? 그렇게 살아온 이가 참 드물지 않은가.
한 출판사 사장님은 집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나눌 말이 없단다. 뭐라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속상해 한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건 집 바깥에서 이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어찌 사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이들이 하루를 어찌 보내는지 알지 못한다. 밖에서는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집에서는 외로운 존재다. 그래서인지 그이는 지금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는 듯 보인다.
아이들의 부모인 우리들이 그럴진대, 아이들이 어떻게 자기가 하고픈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길을 찾을까.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식구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인내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얼마 전에 우리 큰애가 “엄마, 나한테 관심을 그만 가져주세요. 그걸 사춘기 동생한테로 돌리든지”. 그러자 작은애가 “엄마, 저도 사양이에요”. 아, 허전하도다. 그래서 남편을 보고 “당신은?” 그랬더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애들 뒷바라지한다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는 일이 뒷전이었구나. 원하지 않는 애들한테는 그렇게 열심이면서…. 애들 인생은 애들한테 돌려주자. 그리고 내 넘치는 에너지로 내 인생을 살아가자. 엄마고 아버지고, 그동안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미뤄둔 것이 있다면 하나하나 시작해 보자.
그럼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할까.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는 우리 아이가 행복하게 사는데 있다. 행복하려면, 자기 일거리도 있고 돈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자기 삶에 주인이 되는데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 머릿속 회로는 이렇게 굴러간다.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 주자. 나부터 내가 하고픈 걸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자.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철학의 자급자족부터 시작해보자.
장영란 산청 간디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지난 98년 무주로 귀농하여 온 가족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 자연에서 느낀 생각을 담은 『자연그대로 먹어라』,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