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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 |
[서평] 『손가락이 뜨겁다』
관리자(2009-08-10 11:40:38)
‘당신’과 ‘침묵’ 사이에서 ‘돌’처럼 우직하게 미련 떨기 문신  시인 개인적으로 미련한 짓 몇 가지를 알고 있다. 짝사랑, 식탐, 밤샘공부, 술내기…. 이것들이 왜 ‘미련한 짓’으로 묶여야 하는 걸까.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것은 미련 때문이라는 것. 이럴 경우 대개 자아의 비정상성을 논하곤 한다. 결핍, 상처 , 공포의 기억, 자존감 훼손 등이 비정상적인 집착성을 키운 것이라 진단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이 비교적 옳게 판명되어 적절한 처방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런데 아예 까발려놓고 미련을 떠는 부류가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효율과 실적이 생존가치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건 미련퉁이나 하는 짓이다. 시 쓰기를 고결한 ‘일’이나 ‘작업’이라 하지 않고 ‘짓’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왜냐하면 시 쓰기가 동시대인들로부터 가치 있는 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묵묵히 시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함민복 시인의 말마따나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따뜻함에 대한 미련,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채호기 시인의 『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사)는 미련한 짓의 절정이다. 2002년 『수련』(문학과지성사) 이후 7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은, ‘힘든 시간들… 기댈 수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시에 기댔다’는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미련을 떨며 붙잡고 있었던 것들의 꾸러미이다. 그 꾸러미의 한 축은 ‘당신’이 꿰고 있고, 다른 한 축은 ‘침묵’이 관통하고 있다. 시집 전체의 구성을 보면 대략 ‘당신’이 앞에서 끌고 ‘침묵’이 뒤를 받치고 있다. 맑은 물 아래 또렷한 조약돌들 / 당신이 보낸 편지의 글자들 같네. / 강물의 흐름에도 휩쓸려가지 않고 / 편안히 가라앉은 조약돌들 / 소근소근 속삭이듯 가지런한 글자들의 평온함 / 그러나 그중 몇 개의 조약돌은 / 물 밖으로 솟아올라 흐름을 거스르네, / 세찬 리듬을 끊으며 내뱉는 글자 몇 개 / 그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겠죠, / 그토록 자제하려 애써도 / 어느새 평온함을 딛고 빠져나와 세찬 물살을 가르는 저 돌들이 / 당신 가슴에 억지로 가라앉혀둔 말이었겠죠, / 당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 심장 속에 두근거리는(『편지』전문) 보통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사람들이 나름대로 어떤 각오를 다지곤 한다. 그와 같이 한 권의 시집을 배열하는 순서에서 첫 작품도 시인에게는 하나의 다짐 같은 것이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는 『손가락이 뜨겁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핵심 단서일지도 모른다. 이 시에서는 ‘조약돌’에 자꾸만 눈길이 걸린다. 흠집 나고 상처 난 음반이 튀면서 제자리를 맴돌듯, 다음 행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조약돌’에 걸려 ‘조약돌’만 반복해서 읽는다. 이런 것이 바로 미련일 것이다. 그런데 『편지』뿐만 아니라 시집 전체에서 발견되는 시인의 해석적 경향은 썩 건강해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내면에 상처가 많은 탓일까. 채호기 시인은 드러난 현상을 전도시켜 바라보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당신’과 ‘나’의 위치를 역전시켜놓기도 하고, ‘당신’의 말을 ‘나’의 말인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거나 치욕스럽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의 보편적 정서 안에서 수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너그러운 법이니까. 그러므로 채호기 시인의 미련은 상처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시의 근육은 / 먹이를 쫓는 사자의 근육보다는 / 죽음과 경주하는 사슴의 근육이다. / 아니 그보다는 사슴에게 꼼짝없이 먹히지만 / 어느새 초원을 뒤덮어버리는 / 풀이 시의 근육이다.’(「시의 근육」 전문) 채호기 시인에게 시 쓰기는 이처럼 쉽게 상처 입는 것들의 결속이다. 이때 상처는 구체적이지 않고 ‘초원을 뒤덮어버리는’ 전체로서의 통증이다. ‘살점이 도려내지고 피가 흐르지만, 그래도 고통이 숨어 있는 부위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통점은 있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소간의 모호함과 비가시적 세계에 대한 응시가 채호기 시인의 노련함 앞에 질서를 이룬다. 이러한 시 쓰기 방식이 상처와 통증에 대한 침묵을 허용한다. 최근의 시들이 말과 이미지의 과잉, 의미의 폭주 등으로 독자들과의 소통에 과부하를 거는 것과 달리, 채호기 시인의 시는 말의 여백, 이미지의 여백, 의미의 여백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말과 이미지와 의미를 구사해낸다. 그러한 여백의 전략은 침묵의 형태로 드러난다. ‘새벽의 입안에 가득 고인 말’(『여름 새벽』)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로 혀 밑에 침이 고’(『소나기 온 뒤』)이지만, ‘마이봉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한 내 입 속의 말’(『마이산』)을 시인은 ‘몸을 자르고/피를 짜내고/갈고 갈아/허공에 날려버’(『짐승의 말2』)린다. 하지만 이처럼 ‘허공’에 날려버린 말이지만 결국에는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말은 남는다/침묵 속에도 말은 정액을 남긴다.’(『짐승의 말2』) 비워냄으로써 스스로 가득 차는 그릇처럼 침묵함으로써 오히려 온전히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채호기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를 빌려다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어있으며 자신의 일부인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시를 쓴다. 그럴 때 몸을 떠난 시의 언어는 돌의 언어가 아닐까. 누구의 말도 아닌, 발화되지 않고도 거기 있는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 아무튼 여기까지 흘러온 내 시의 정거장에서 나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 『손가락이 뜨겁다』에 실린 채호기 시인의 시편들은 ‘발화되지 않고도 거기 있는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이다. 일반적인 현상을 수용함에 있어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더러는 ‘미련한 짓’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시인에게 침묵은 가능한 모든 발화의 정점이다. 짝사랑이, 식탐이, 밤샘공부가, 술내기가, 더러는 침묵이 간절한 바람에 대한 미련이라는 사실이 유효하다면, 우리의 손가락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그 간절함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채호기 시인의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를 다 읽고 나니 ‘언어의 정자를 수정받아/꽃을 잉태하는 관능적인 신부’(『당신은 누구인가』)처럼 내 안에 어떤 생명이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그 생명을 출산하기까지는 아무래도 입 꾹 다물고 ‘침묵’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문신  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물가죽 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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