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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 |
[박물관대학] 목간
관리자(2009-08-10 11:40:07)
나무에 남긴 고대인의 생활상 윤선태  동국대학교 교수 목간의 자료적 특성 목간은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목재를 다듬어 세로로 길게 만든 목제품을 말하며,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가장 널리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였다. 나무를 서사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은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기원(起源)하였는데, 이것이 한반도를 경유해 7세기에는 일본열도에까지 전파되었다. 목간은 주변에서 누구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라는 재질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목간의 탄생은 ‘신(神)에서 인간(人間)으로’ 독자(讀者)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서사문화의 혁명을 기초로 문자향유층이 더욱 증가하였고, 보다 광범위한 지역으로 국가의 의지가 전달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목간에는 개인의 간단한 글자 연습에서부터 국가의 복잡한 행정문서에 이르기까지 고대사회의 각종 기록물이 모두 확인된다. 목간의 자료적 가치가 남다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의 목간연구는 주로 목간의 ‘묵서(墨書)’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로 인해 주로 목간에 대한 역사적, 국어학적, 서예사적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목간은 문자자료임과 동시에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되는 고고유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묵서와 함께 목간의 출토지점, 형태와 크기, 수종(樹種), 마름질방법, 폐기행정(廢棄行程) 등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목간 개개의 물질적 특징을 추출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목간의 제작과 폐기에 이르는 ‘목간의 일생(life cycle)’과 고대인들의 문자생활 전반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또 목간 묵서의 정확한 판독을 위해 적외선 사진이나, 디지털편집 기술을 향상시키는 일, 그리고 묵서를 선명하게 보존하는 방법 등 과학 분야의 연구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고대목간에 대한 기존의 연구현황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전망해보려고 한다. 이미 기존에도 여러 차례 목간 연구 성과들이 정리된 바 있다. 이 글도 이러한 선행연구에 큰 도움을 받았다. 목간의 출토현황 한국고대목간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안압지에서 1975년에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의 유적에서 출토사례가 증가해, 현재 묵서가 있는 목간만도 300점 가까이 된다. 이제 목간은 수량 면에서도 고대사자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목간은 9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매년 출토되고 있다. 이는 발굴건수가 증가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재유물이 잘 보존된 ‘저습지(低濕地)’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91년에 발굴이 시작된 경상남도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하나의 유적에서 무려 156점에 달하는 많은 목간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앞으로 목간이 더 출토될 가능성도 남아있다. 성산산성목간의 발굴을 통해 한국고대에도 목간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우리의 본격적인 목간연구도 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산산성목간은 묵서내용을 통해 목간의 제작연대가 561년 무렵이라는데 중지가 모아지고 있고, 또 목간의 형태나 기능 면에서도 고대일본의 7세기 목간으로 이어지는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목간 전파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성산산성목간의 발굴은 한국의 ‘목간학’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생각된다. 목간문화의 추이 한사군(漢四郡)의 진출로 인해 한국고대사회는 매우 일찍부터 중국 한대(漢代)의 목간서사방식에 접하게 된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유물이 경상남도 창원의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붓과 삭도(削刀)다. 한편 『삼국지』로 알 수 있듯이, 3세기에는 삼한에만도 낙랑ㆍ대방군과 교역하였던 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 한자문화 수용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자사용목적도 중국 군현과의 교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 내부의 성장과 국가체제의 확립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이전과 큰 차이가 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고대국가 성장과정이다. 고구려는 낙랑·대방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강력한 중국세력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수용을 통한 국가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적어도 4세기에는 고구려사회에 중국의 전적(典籍)이 유통되고, 문서행정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편철간(編綴簡) 그림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또 국립대학인 ‘태학(太學)’(372년)을 통해 문서행정에 필요한 식자층(識字層)이 상당수 배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백제는 450년에 송(宋)에 점을 치는 책인 『역림(易林)』과 ‘식점(式占)’을 요구한 사실이『송서(宋書)』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서(周書)』에는 백제인이 음양오행(陰陽五行), 의약(醫藥), 그리고 점복(占卜)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5세기에 이미 백제 식자층들은 단순한 한자학습이나 유·불의 경전이해를 뛰어넘어 도교, 의약, 점술 등 중국의 보다 다양한 문화를 섭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평양의 석암리 201호분과 205호분에서 출토된 ‘식점(式占)’을 치는 도구인 낙랑군시대의 ‘식반(式盤)’에 주목할 때, 4~5세기 백제의 중국문화 이해과정에도 고구려처럼 낙랑·대방군과의 교류나 백제로 남하한 낙랑·대방계의 식자층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발굴된 한국고대목간은 모두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런데 월성해자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은 각각 ‘6~7세기’와 ‘8세기 이후’로 목간제작연대가 명확히 구분되기 때문에, 신라목간문화의 시기별 변화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유물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압지목간에 비해 월성해자목간에는 단면이 4각형 내지 3각형인 ‘석면’목간과 별다른 가공 없이 나무의 껍질만 벗긴 채 사용한 ‘원주형(圓柱形)’목간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 주목된다. 월성해자에서 출토된 29점의 전체 묵서목간 중 원주형과 다면목간은 11점이나 된다. 특히 원주형목간 중에는 6행에 걸쳐 묵서된 것도 확인되었다. 이에 비해 안압지목간에는 다면목간이 전체 69점의 묵서목간 중 단 4점에 불과하다. 다면목간은 어떤 면의 글자를 읽거나 외울 때 다른 면의 글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초학자들의 암기학습에 널리 사용되었다. 김해 봉황동유적과 인천 계양산성유적에서 출토된 신라의 『논어』 목간들도 4각형과 5각형의 막대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동일한 용도의 목간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한국고대사회에서는 이 다면목간을 학습용뿐만 아니라 문서용, 습서용으로도 널리 사용하였다. 현재 보고된 한국고대의 묵서목간은 300점이 되지 않는데도 전국의 유적에서 고르게 다면목간이 25점 이상 출토되었다. 이는 그만큼 이러한 다면목간이 한국고대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월성해자와 안압지목간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지만, 다면목간은 6~7세기에 월등히 많이 사용되었고, 8세기 이후에는 현격히 축소, 소멸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목간문화가 건너간 일본에는 목간출토 점수가 30만점을 상회함에도 불구하고, 다면목간의 출토례가 매우 희귀하다. 원주형목간은 아예 한 점도 보고된 사례가 없다. 또한 일본에는 편철간은 고사하고 단독의 행적조차 발견된 사례가 없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는 이처럼 목간서사문화의 낙차가 존재한다. 한국고대사회가 중국 한대의 편철간시대부터 종이시대까지를 모두 경험했다면, 고대일본에는 한반도에서 지목(紙木)이 병용되던 7세기 이후의 목간사용법이 전파되어 갔다. 지목이 병용되었던 시대에는 많은 양의 정보는 종이에 서사되었고, 목간은 주로 부찰용으로 제작되었다. 문서목간도 대체로 납작한 형태로 손쉽게 만들어 간단한 메모나 발췌용, 아니면 정서하기 전의 연습용으로 사용하였다. 8세기 이후의 안압지목간이 이에 해당된다.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의 종이장부들인,「녹봉문서」나 「공물문서」는 작성연대가 안압지목간과 겹치는 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그 기재형식상 6~7세기대의 다면목간을 대체해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고대사회에서 다면목간은 편철간의 변형된 형태로 잔존하다가 종이의 일반화 추세 속에서 사라져갔다고 생각된다. 목간의 형태와 용도 목간의 형태와 용도를 이해하는 것은 목간이 한국고대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었고, 또 어떤 기능을 수행하였는가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아직 한국학계에는 목간분류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 간에 동일한 사항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등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목간은 애초 그 용도와 목적에 맞게 제작되기 때문에, 목간의 ‘형태’를 통해서도 목간의 용도와 기능을 추론할 수 있다. <편철간>은 여러 개의 목간을 연결해놓은 책형목간(冊形木簡)을 말한다. 목간문화의 추이로 볼 때, 한국고대사회에도 목간의 종류 속에 편철간의 범주화가 필요하다. <세장형목간>은 목간의 폭이 좁고 긴 가장 일반적인 기본형목간을 말한다. <방형목간>은 서사할 양이 많아 목간의 가로를 길게 늘인 것을 말하는데, 기본형목간을 횡으로 돌려놓은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월성해자에서 이러한 <방형목간>이 출토된 바 있다. 목간은 이미 쓴 묵서를 삭도(削刀)로 깎아내, 정정하거나 재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존에 써놓은 묵서를 삭도로 깎아내면, 문자가 있는   <목간부스러기>가 발생된다. 이 <목간부스러기>도 문자자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유일하게 백제의 <목간부스러기>가 여러 점 출토된 바 있다. 한국고대사회에서 목간은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 종류다. 즉 첫째, 전적목간(典籍木簡), 둘째, 문서목간(文書木簡), 셋째, 휴대용목간(携帶用木簡), 넷째, 꼬리표목간, 다섯 째, 기타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전적목간>은 신라 논어목간과 같이 전적(典籍)을 기록한 목간을 말한다. <문서목간>은 문서수발자(文書受發者)가 명확한 ‘수발문서목간’을 비롯해, ‘장부목간’, 전표(傳票)나 각종 행정처리를 위한 메모, 발췌용으로 사용된 ‘기록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휴대용목간>은 사람이 휴대하면서, 출입과 신분증명, 여행허가용으로 사용한 목간을 말한다. 관북리 286번 목간은 형식상 조선시대의 호패(號牌)나 부신(符信)처럼 낙인(烙印)을 이용해 궁궐출입 시 신분증명용으로 사용한 부찰목간으로 추정된다. 고대사회의 인적 통제(人的 統制)를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이러한 용도의 목간이 출토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한편 물품에 부속된 <꼬리표목간>은 전적이나 문서의 ‘표지용(標識用)’, 세금상납 때 납부자를 기록한 ‘세금공진용(稅金貢進用)’, 창고물품의 정리와 보관을 위해 부착했던 ‘창고정리용(倉庫整理用)’, 그리고 끝으로 기타 ‘일반물품용(一般物品用)’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휴대용목간과 꼬리표목간은 목간이 사람이나 물건과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에, 목간 출토지를 곧바로 목간 제작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준다. ‘표지용’ 꼬리표목간으로는 백제 중앙의 『병여기』라는 장부에 매달려있었던 관북리 285번 목간이 주목된다. 또 ‘세금공진용’ 꼬리표목간은 성산산성 출토 신라목간이 대표적이며, 안압지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성산산성목간은 6세기 중반 신라의 국가유통망과 수취구조를 알려준다. 성산산성의 꼬리표목간에는 [지명+이름+물품명(+액수)]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납세자 “개인(또는 호주)”의 탄생은 문서행정상 호적류 문서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창고정리용’ 꼬리표목간은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에서는 이미 6세기 중반에 물품의 창고보관과 정리를 위해 꼬리표목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반물품용’ 꼬리표목간으로는 열쇠고리(keyholder)로 추정되는 안압지 213번 목간을 예로 들 수 있다. 기타용도목간으로는 우선 ‘습서용목간(習書用木簡)’이 있다. 안압지의 습서용목간은 일반목간보다 월등히 커서 애초 크게 제작했다고 생각된다. 백제에는 폐기목간을 활용한 습서가 많이 확인되며, 사면목간도 습서용으로 사용하였다. 다음으로 ‘주술의례용목간’으로는 능산리 남근형목간이 대표적이다. 백제 사비도성의 ‘도제(道祭)’에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기타용도로는 ‘권축용목간(卷軸用木簡)’도 매우 중요하다. 묵서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제첨축형 목제품’이 주목된다. 관청에서는 방대한 양의 문서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들을 분류ㆍ정리하여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권축(卷軸)을 이용해 말아놓는 두루마리 종이문서의 경우, 그 문서의 제목을 꼬리표목간에 써 권축에 매달거나, 권축 자체에 기록하여 문서의 표지(標識)로 삼았다. 이 중 전자는 앞서 표지용 꼬리표목간에서 설명하였고, 후자는 다시 제첨축(題簽軸)과 목첨축(木簽軸) 등 두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제첨축(題簽軸)>은 마치 네모난 숟가락 모양처럼 권축의 두부(頭部)를 넓적하게 만들고, 이 부분이 종이 두루마리 위로 삐죽이 나오도록 권축의 길이를 좀 더 길게 만든 특수한 권축을 말한다. 이 권축의 넓적한 두부에 해당 문서의 제목을 적어 표지로 삼았다. 종이문서를 권축에 말아도, 권축 두부에 쓴 문서 제목은 그대로 드러나 표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한편 <목첨축(木籤軸)>은 굵은 권축을 사용하여 그 권축의 마구리 부분에 직접 문서의 제목을 적었던 권축을 말한다. 이들 권축의 모양과 표지 위치로 보아 <제첨축>은 권축 두부가 위로 오도록 항아리나 상자 등에 수직으로 꽂아놓는 방식으로, <목첨축>은 권축 마구리가 보여야 함으로, 선반에 수평으로 올려놓는 방식으로 정리·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제첨축>은 관료가 항상 가까이 두고 수시로 빼서 보는 각 관청의 일상용 문서에 주로 사용되었고, <목첨축>은 지방에서 중앙도성으로 보고한 상신문서나 장기보관용 문서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고대일본의 경우 이러한 <제첨축>을 통한 문서분류법과 호적의 작성이 7세기 말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함안 성산산성의 <제첨축형 목제품>이 실제로 <제첨축>이 맞다면, 신라 서사문화의 수준을 새롭게 바라봐야만 하는 놀라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고대일본의 <제첨축> 사용법도 한반도에서 기원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의 전망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목간은 문자자료임과 동시에 발굴조사에 의해 출토하는 고고학적 유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목간은 그 폐기된 상황, 혹은 그 출토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필두로, 공반목간, 그 외의 공반유물과 유구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목간의 묵서내용에 대한 이해를 극대화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지난 2007년 1월 9일 한국에도 출토목간의 신속한 보고와 체계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술단체인 ‘한국목간학회’가 창립되었다. 필자도 이 학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목간연구의 발전을 위해 역사학, 고고학, 보존과학, 국어국문학, 서예학 등 관련분야의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학제간 연구의 모범을 만들어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목간연구와 성과에 비한다면, 한국의 목간연구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심 있는 많은 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목간연구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생각된다. 공동기획 :  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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