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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 |
[저널초점] 우리시대 대중의 정서에 다가가기
관리자(2009-07-06 17:44:40)
우리시대 대중의 정서에 다가가기 거기, 답이 있으니… 유영대  고려대 교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전주는 전통사회인 19세기부터 이 나라 유일한 판소리 축제인 ‘전주대사습놀이’를 관장해온 유서 깊은 ‘소리축제’의 고장이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자원이자 다양한 방식의 운용이 가능한 문화 콘텐츠다. 우리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판소리 명창들이 ‘전주대사습놀이’를 통하여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자산 때문에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전주는 소리예술에 관한 한 세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정창업은 대사습장의 분위기에 이미 압도되어 버렸다. 사군자정’의 위용도 위용이려니와, 낙점을 찍어 심사하는 아전들의 당당함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이 사군자정을 휘감고 있는 수많은 청중들이었다. 전주라는 소리판 원래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 숙종 때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애초에는 ‘말타고 활쏘기 대회’, ‘아전놀이’ 등 무예놀이의 성격이 강한 민속행사였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전통적인 전주대사습놀이 행사에 ‘판소리 경연’이 합쳐지면서, 종합적 성격을 갖춘 전통 축제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주에 ‘재인청’과 ‘가무대사습청’이 설치되고, ‘사군자정’을 지어서 그곳에서 처음 대사습 대회가 열린 뒤부터, 주로 판소리 명창의 등용문이 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를 통하여 배출된 명창이야말로 서울의 양반집이나 임금 앞에서까지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으므로, 전주대사습놀이는 판소리꾼에게 그야말로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경연대회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판소리 명창 정창업이 전주대사습놀이 경연대회에 참가했던 장면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두고 있다. 한번 시간을 돌려 정창업이 출연한 전주대사습놀이 장면을 재구성해보자. 전주대사습놀이의 판소리 경연에 나온 명창들은 바짝 긴장하기 마련이다. 심사위원들이 어떻게 구성되었을 지가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군자정을 꽉 채운 귀명창 수준의 관객이었다. 이 자리에 참여한 명창 정창업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면서 입술이 바짝 바짝 마르고, 가슴도 두근거렸다. 자신의 이름이야 이미 조선팔도가 다 아는 바이지만, 그래도 명창이라는 보증을 최후로 서주는 것이 바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해를 벼르곤 했던 출전이었다. 정창업은 대사습장의 분위기에 이미 압도되어 버렸다. ‘사군자정’의 위용도 위용이려니와, 낙점을 찍어 심사하는 아전들의 당당함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이 사군자정을 휘감고 있는 수많은 청중들이었다. 전주 청중들의 수준이라는 게 보통 높지 않은가. 꼭 짚어줘야 될 데서 추임새하는 품새며, 고수와 함께 가는 보비위 솜씨도 가히 일품이다. 게다가 이면에 맞지 않은 소리를 할라치면, 이 귀명창들은 소리판을 금세 야유의 분위기로 몰아가버린다. 정창업은 자신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자신감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의 차례가 오자 그는 그동안 연습해두었던 <춘향가>의 ‘초압’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자신을 압도해오는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의 무대는 얼마 가지 못했다. “방자 분부 듣고 나귀안장을 짓는다…. 나귀 등에 솔질 솰솰….” 여기까지 두어 소절 노래하다가 그만 가사가 막히고 말았다. 다음 가사가 뭐였더라. 이 대목은 천 번도 더 불렀는데…. 한번 소리가 막히자 ‘솔질 솰솰’만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자 매몰찬 청중들이 “나귀 껍질 벗겨지겠다”, “무슨 명창이 가사도 못 외우고….” 혀를 차며 야유하는 관중의 두런거림에 정창업은 그냥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참담한 패배였다. 아마도 이 자료가 가장 진솔하게 전주라는 소리판을 증언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리꾼들도 전주의 소리판에 와서 소리를 할 때면, 다른 어느 곳보다 긴장감이 더 느껴진다고 한다. 관객과 주고받는 기가, 다른 지역의 무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어느 해인가, 판소리를 섞어서 새롭게 무대를 만들어가는 마당놀이 공연차 전주에 온 소리꾼 한 사람은 관객이, “자네 연기는 좀 재미있는디, 소리는 영~ 아니여”라고 품평해주는 바람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국립창극단이 전주에 와서 근사한 공연을 할 때도 전주의 관객들은, “참 음악은 좋은디 소리가 모자라네”라는 평을 대곤 한다. 전주대사습놀이가 쌓아온 아우라 전통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던 경창대회인 전주대사습놀이가, 19세기 말에 중단되었다가 지난 1975년에 부활되어, 그날의 잔치를 이어온 것이 벌써 서른다섯 해나 되었다. 우리에게 서른다섯 살은 장년의 원숙함이 느껴지는 나이다. 장년이 된다는 것은 그간의 어린 아이 수준에서 벗어나, 청년기도 지나 시행착오도 쉽게 범하지 않은 성숙한 차원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전주대사습은 단순한 경연대회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델이 되는 전통축제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전주에 머물었던 10년 동안, 그리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심사위원으로 혹은 평가위원으로 참여하거나, 그냥 전주대사습놀이를 즐기는 관객으로 자유롭게 싸돌아다니면서 축제적 분위기를 즐겼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음력으로 오월 단오에 개최되는데, 올해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과 겹치는 바람에 며칠 연기됐다. 6월 2일 예선이 벌어졌고, 3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판소리 명창부, 판소리 일반부, 농악, 시조, 무용, 기악, 가야금 병창 등의 부문의 경연이 진지하게 실시되었다. 올해 전주대사습놀이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참여했다. 어느 해였던가, 송순섭 명창이 긴장하여 떨면서 소리하는 것을 보고, 지금부터 백여 년 전, 전주 ‘사군자정’에서 벌어졌을 판소리 경창대회 장면과 비교해 본 적도 있다. 송순섭 명창은 자신이 장끼로 여기는 <적벽가> ‘불지르는 대목’을 노래하여 장원이 돼 대통령상을 받았다. 수상식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데, 송순섭 선생은 “대통령상이니까 대통령이 직접 와서 상을 줘야 한다”면서 한동안 대통령 나오기를 기다리는 해프닝을 보여줬다. 1993년은 ‘국악의 해’였는데, 이임례 명창이 <심청가> ‘부녀상봉’ 대목을 불러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해 4월에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대성황을 이루면서 판소리와 국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환기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영화 <휘모리>가 제작되었다. <휘모리>는 지난해 이 대회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한 이임례의 삶의 역정이 드라마틱해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대사습 측으로서는 망외의 소득이 된 셈이다. 특히 영화의 장면에 전주대사습놀이 장면이 재연되기도 해 흥미를 끌었다. 이듬해에는 이태백이 아쟁으로 기악부 장원을 하였다. 전주대사습놀이는 경연대회로만 치러지고 있으나, 이 자리에 모인 청중들은 오히려 축제적 성격을 더 즐기고 있다. 실내체육관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모여앉아 연신 추임새를 하면서,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실내체육관 주변은 자생적 난장이 생겨나 온갖 먹을거리와 볼거리들이 어우러져 또 다른 판을 이룬다. 경연대회와는 별개로, 주민이 직접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축제의 무대가 전주대사습놀이의 본령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사습의 경연이 끝나고 청중들이 모두 밖으로 쏟아져 나올 때, 실내체육관 앞의 너른 마당에서 상모도 돌리고 농악놀이를 한바탕 해대면, 구경 온 사람들이 잡색패거리의 일원이 되어 그 행렬에 끼어 신명을 풀어낸다. 자연스럽게 집단광란의 장면이 연출되고, 대동합일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전주대사습이 갖는 문화적 열기의 절정이라고 생각된다. 전통 사회에서의 유가(遊街) 풍습처럼 이 대사습이 진정한 하나 되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는데 좀 더 긴밀한 연출이 필요하다. 전주대사습놀이의 계승방향 그 동안 전주대사습놀이로 인하여 형성된 아우라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적 경연대회로 활성화되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전주대사습에는 우리시대 전통축제가 가져야할 다양한 내용이 풍성하게 있다. 대사습이라는 문화 콘텐츠는 문화기술의 연구개발(흔히 CT R&D라고 부르는)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이 자리에서 전주 대사습놀이가 몇 가지 보완했으면 하는 사항을 제언하고자 한다. 애초에 전주대사습은 음력으로 5월 단오를 전후하여 전주지역에서 개최되었던 경연대회이자 대동적 축제라고 밝혔다. 오늘에 와서 대사습은 경연대회 성격만을 고집하면서 진행된다. 대사습을 심사위주의 경연대회로 갈 것이냐, 대동놀이 마당으로 갈 것이냐에 대한 반성과 전망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술가를 골라내는 경연대회이면서 관람객들이 참여해 한 마당을 이루는 축제도 되는 방향성을 열어줘야 한다. 공정하고도 정당한 심사를 행하는 경연대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이 직접 축제에 참여하고 체험해보는 대동놀이판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한국전통예술의 저변 확대를 위하여 전주대사습놀이는 종목이나 경연 형식을 확대, 개편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전통이란 전래해 온 우리 민족의 예술이 현재에도 다수의 대중에게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시대 대중의 정서에 다가갈 수 있는 종목의 개발과 심사규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전통예술에 기반을 두고 새롭게 창작된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경연 종목을 늘이거나 변이의 가능성이 있는 종목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가야금 병창의 경우 새로운 대목을 개발할 수 있다. 해금이나 거문고 병창의 활성화도 기대해볼만 하다.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모방해내는 것에 시상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스스로 변이시키고 새로이 개발한 창작품에 좋은 평가를 주는 부문이 개발됐으면 좋겠다. 오늘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경연자를 중요시하는 심사풍토를 마련하는 것이 과제이다. 대사습 대회장을 찾는 관객층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의 시각이 필요하다. 대사습의 관중은 말할 것 없이 노인층이 대부분이다. 노인들이 해마다 전주실내체육관을 다 메웠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더욱 확연히 구분이 생겼다. 그나마 관객의 수가 점점 줄어 빈자리가 많이 눈에 띠고 그래서 한산함을 느꼈다. 나이든 관객층은 자연 감소되고, 젊은 관객이 충원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이 축제는 생명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끝없이 지속될 젊은 관객을 유인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무대의 변화를 모색할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 몇 해 사이에 젊은층 관객이 늘어났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관객이야말로 전주대사습놀이의 전통을 담보해주는 핵심적인 부문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전주대사습놀이가 지나치게 무대공연화 되면서, 일종의 방송을 위한 프로그램 정도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대는 TV방송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대사습을 중계방송하는 것이 대사습의 명성과 권위를 부각시키고 전통예술의 대중화를 이끌어 냈다는 성과를 이뤘다. 그렇지만 TV 중계를 위하여 본래의 프로그램 진행이 장식물에 가깝게 변질이 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TV를 통해 대사습의 결선장면은 7~8시간 생방송되지만 시청자들의 감성과 얼마나 맞아떨어질지 의문이다. 비빔밥 식의 진행에서 시청자들이 전통예술에 대한 이미지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고착시켜 식상해버리는 기회를 만들어주지는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하나의 예로 지금은 병창·무용·기악·농악·판소리 등을 한 번씩 돌아가면서 부문별로 차례로 진행하는데, 이렇게 나누어 하지 말고 진행을 부문별로 차례로 하는 것은 어떨까. 먼저 병창을 다 모아서 듣고 심사결과를 발표하고, 다음에 기악을 하고 심사결과를 발표하고, 이런 방식으로 하면 좀 더 집약적이고 핵심적으로 이 잔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상의 공정성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심사의 공정성에 대하여 구설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심사위원의 선정이며 심사과정에 대한 전체 과정을 공정하게 진행할 전담기구가 만들어져야 하고, 심사위원 인재풀제(pool system)가 가동되어야 한다. 심사위원은 유파나 사제관계를 적절히 고려하여 공정하면서도 다양하게 구성돼야 한다. 대사습 뒤에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심사의 불공정성에 대하여, 적절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공표된 결과에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부분의 전문실기인만으로 심사위원을 구성하는 일은 문제점으로 제기될만하다. 공명정대하면서 국면 전체를 읽을 수 있는 인사가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판단을 흐릴 소지가 있는 경우, 적극적으로 기권을 유도하는 방식이 전담기구에서 맡아야 될 책무이다. 유영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다. 1997년에서 1998년까지 서울 KBS가 주최한 <서울 국악제>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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