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 |
[환경] 학교란 무엇인가
관리자(2009-07-06 17:35:29)
학교란 무엇인가, 사람이 성장한다는게 무엇인가
후배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후배는 자기 큰애 얘기를 했다. 앞뒤 사정을 들어보니 이랬다. 큰애를 지방에 있는 대안중학교에 보냈단다. 거기에서 일 년을 지내고 학교와 맞지 않은 학부모들과 집단으로 학교를 나왔는데, 그 학부모들이 새로운 학교 운영을 원하고 있단다.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학교주의자들이구먼’ 하고 말았다.
‘학교주의자’라…. 한번 내뱉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오롯이 담긴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처럼 학교주의라, 말이 될까. 사전에서 ‘주의’를 찾아보니 첫째, 굳게 지키는 주장이나 방침. 둘째,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 한마디로 사람들 안에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라는 소리인데, 학교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자식 학교 보내려고 온갖 궂은일도 마다 않는 부모, 동생 학교 보내려고 술집에 나간다는 누나. 이런 신파극이 아니더라도 학교에 다니려고 돈을 벌고, 그래도 안 되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 사회인이 되기 전부터 빚더미를 끌어안는 일이 부지기수다. 올해도 정부가 학자금 대출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세웠으니까.
경제적인 부담만이 아니라도 우리 대다수는 학교를 절대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다 자란 아이가 자기 방도 제대로 안 치우고 학교에 가도 학교에 지각하면 안 되니까, 똥오줌도 학교에 맞춰서 싸야 하고, 밥도 학교에 맞춰서 먹어야 한다. 하루하루, 일 년, 이 년, 십여 년을 학교에서 짠 스케줄에 맞춰서 산다. 자라면서 그렇게 길들여지니 학교를 졸업한지 오래 되어도 학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주부학교, 노인학교, 농부학교….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의 문화도 그렇다. 학교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지고지선의 일이고, 남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받아온다면 잘 싸웠다고 응원하며,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한 것은 집안의 명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학비가 우선이었고, 아무리 집안에 바쁜 일이 있어도 공부가 제일이었다.
그 문화에서 자란 나는 아이가 태어나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초등학교, 그 다음은 중학교, 그래서 대학교에 들어가는 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살았다. 기다가 걷고 달리는 것처럼 당연한 순리. 그걸 어기는 것은 이 사회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학교주의를 벗어나도 무슨 일이 안 생기더라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학교의 문제점에 대해 많이들 얘기한다. 『학교는 죽었다』는 책도 있다. 학교의 시작은 독일 독재정권이 청소년을 군대로 몰기 위해 만들었다는 기원론도 있다. 또 사람들은 학교를 바꾸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을 한다. 학교 안에서, 그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대안학교를 만들면서도….
학교 안에 있건 학교를 벗어났건, 학교 교육제도를 잘 이용해 성공하든, 입에 거품을 물고 학교를 비판하든, 이 모든 것이 학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만큼 학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우리 삶에서 굳게 지켜나가야 하는 기준이자 목표의 하나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 보자. 학교주의는 선택사항일 뿐이다. 학교주의에 확신을 한다면 학교주의를 신념으로 삼고 열심히 학교주의자로 살아가 영광을 보기를. 그러나 만일 이 학교주의에 의문을 가진다면, 그래서 학교주의를 선택하지 않으려 하는 분이 있다면, 그이를 위해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학교는 선택이다. 학교주의를 벗어나도 살 수 있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널려있는 현대사회야말로 자기 교육은 자급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보자. 우리는 교육의 의무가 있어서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아이들은 제도교육을 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 교육의 의무는 나라와 부모가 가지는 의무다. 아이 본인이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아이에게 학교를 강요할 수는 없다. 아이한테 학교 교육은 의무가 아닌 권리이기 때문이다. 권리란 본인이 행사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병역의 의무와 다르다. 오히려 결혼이나 자녀를 낳을 권리와 비슷하다.
학교주의를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지금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인구의 대부분이 학교를 다닌 시민으로 구성된, 반만년 역사상 처음 있는 사회다. 그 흐름을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보니 그 대열을 벗어난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더라. 오히려 어떤 일도 안 생기고 편안해 심심했다. 방학이 계속 이어지는 기분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부터 다르다. 시간 맞춰 학교에 가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으니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아니 몸이 잠에서 깨어날 때 일어난다. 그리고 눈앞에 하루가 백지로 펼쳐진다. 하고 싶은 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처음에는 너무 어색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우리 큰애를 돌이켜 보면 처음 한두 해는 잠을 자고 또 잤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나서 자기 에너지를 쓰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느라 쓰는 에너지. 그 에너지를 자기 자유로, 자신의 삶에 쏟는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서 썼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우리는 단지 학교주의자가 아닐 뿐
우리가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또 그 얘기를 담아 『아이들은 자연이다』라는 책을 내고 난 뒤 사람들과 교육에 관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공감하다 어느 순간 말이 겉돌 때가 있다. 아무리 얘기를 나누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소통이 안 된다. 가만 돌이켜 보면 그 사람이 말은 어떻게 하든 속 깊이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키운다면 무슨 그럴듯한 교육철학이나, 교육방침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대안의 대안인 ‘학교체계’가 들어있으리라고 믿는 거다. 그런데 우리 부부를 보면 교육철학이나 방식에 뭐 대단한 게 없어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런 상태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뭔가 대단한 걸 찾고 싶어 우리를 찾아왔는데….
만일 우리에게 뭔가가 있다면 그건 학교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교주의에서 한발 벗어나 학교주의를 들여다본다면 학교란 무엇인가, 사람이 성장한다는 게 무언가를 새롭게 볼 수 있으리라. 학교주의자가 아닌 삶. 학교라는 걸 중심에 놓지 않고, 교육을 스스로 자급자족하는 삶이 무얼까. 그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장영란 산청 간디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지난 98년 무주로 귀농하여 온 가족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 자연에서 느낀 생각을 담은 『자연그대로 먹어라』,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