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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 |
[문화시평] 기산풍속도그림으로 남은 백년전의 기억
관리자(2009-07-06 17:34:05)
기산풍속도 그림으로 남은 백년전의 기억 - 전주역사박물관 6월3일~8월9일 기산의 작품은 그간 거의 소개되어진 적이 없다가 최근 수년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의외로 많은 작품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주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00여점의 작품은 기산의 회화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번 전시도 그의 작품세계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크기가 거의 일정한 형태의 화첩그림인 것처럼 보인다. 전시된 첫 작품에서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화법의 변함이 없으며, 화제 역시 같은 글씨체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엄환>에서는 원산항 기산이란 호와 함께 음각으로 된 낙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그림들이 분명 한 질로 된 화첩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마도 원산에서 같은 시기에 제작된 듯하다. 따라서 그간 단편적으로 보여 졌던 색채가 농후한 다른 작품하고도 화풍이 다르다.                                    서양에 조선을 알렸던 화가, 기산 김준근 그동안 기산 김준근에 대해서는 자세히 연구되어진 바가 없어 그의 행적이나 작품 경향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1900년 전후에 활동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가 1900년 전후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왔던 제임스 케일(J.S Keil)과  1889년 부산에서 만났으며, 그 후 1992년에 함께 원산으로 갔다는 것, 그곳에서 케일의 책에 삽화를 그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서 확인된다. 아마도 그는 부산, 원산 그리고 인천 등 외국인들이 자주 들고 날던, 당시 개항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외국 선교사나 상인들에게 한국의 풍속 등을 그려 팔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1895년 독일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캐나다 등에 적지 않은 양이 산재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도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 수백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소개된다. 이렇듯 많은 양의 작품이 남아있고 또한 작품에 기명이 분명한데도 그에 대한 연구나 작품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정통화가들의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으며, 그 화격이 높게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내다 기산의 작품은 풍속화에 속한다. 이러한 풍속화를 이해하려면 조선시대 18세기를 이해해야 한다. 이 시기는 한국 예술의 역사상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 정통회화의 발전 외에 특별히 풍속화와 민화가 대두한 것이다. 이 시기는 거장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하여 김득신 등 풍속화가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그리고 독특한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는 소위 민화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의 화풍이 급속하게 그려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 시기의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으로 인한 시민계급의 성장이 있었다. 새롭게 안정된 중산 계급의 형성이 문화적 욕구를 폭발시켰으며 이는 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미술발전을 이룩하게 된 초석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민계층이 등장하면서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고양되어 화가들이 주변 현상 즉 일상의 삶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반들의 생활과 풍류 모습은 예전부터 화원들에 의해 그려져 왔던 것이었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면 농사꾼, 장사꾼 등을 비롯한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소위 풍속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19세기로 이어지며 기산 같은 작가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산의 작품은 사실 풍속화라기보다 오히려 기록화로 이해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삶의 실상을 담아내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록화를 남기는 것은 오래전부터 화가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처럼 사진기가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국가적 대사나 궁중 혹은 양반들의 특별한 행적에 대해서는 화가가 그것을 기록화로 남겨야 했다. 다만 기산은 이러한 상류사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의 생활 장면 하나하나를 사진기에 담는 심정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들은 개화기였던 당시에 여러 외국의 상인이나 사신 등을 통해 바다를 건너갔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을 방문했던 기념으로 혹은 조선을 연구할 목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잘 보여주었던 이러한 그림들을 구해갔다. 그는 어쩌면 한 시대를 온 몸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기록했던 인물이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풍속화를 남긴 조선 후기 작가들 중에서 기산만큼 다양한 생활상을 철저하게 그려 기록으로서 남긴 작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의 마지막 풍속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산은 왜 그렇게 숨겨진 인물이었을까. 기산은 정통화가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공부하였고, 그래서 정통화가들이 갖추어야 했던 화가 개인의 독자적 표현성을 갖추지 못했던 점이 미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연유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이번 전시와 같은 풍속화 이외에 별다른 작품이 남아 있지 않고, 또한 이 풍속화도 화격이 그리 높지 않은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화법으로 동일한 화풍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상황에 따라서 의상이 달라지고 얼굴 표정에 약간씩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기법으로 변함없이 그렸다. 일관되게 가는 철선(鐵線)으로 묘사된 인물들에게서 기산 자신의 표현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철선으로 골격을 다듬고 그 위를 따라 담묵으로 다시 선을 치거나 음영을 살리는 방법을 활용하여 화면의 단조로움을 달래고 깊이를 살려내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화면에서 보이는 인물들은 왜소하고 유약해 보이며 단조로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회화적 성과를 위해서라기보다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매우 충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기록적 측면에 열심이었는지는 다른 여타의 작품들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이번 전시작품들과는 다르게 색채가 화려하게 담겨져 있는 그림에서는 당시의 의복의 구성뿐만 아니라 색감까지도 여실하게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 표현 속에서 기산이 구한말에 활동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정황을 드러내고 있다. 기산의 색채는 과거 전통적인 색채 활용과 색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100년 전의 기억, 그림 속 이야기로 남다 그는 어쩌면 조선시대 마지막 풍속화가였으며, 그러나 정통으로 그림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의 타고난 재주를 잘 살려내어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당시 최고의 상업화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기산을 끝으로 조선시대 풍속화는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산의 회화적 업적은 작품의 독자성에서 보다 한 시대의 사회상을 기록으로 남겼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구한말 조선 사람들의 생활 하나하나가 여실히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복식과 의상 그리고 부녀자들의 머리모양에서부터 선비들이 머리에 썼던 여러 형태의 모자 등 세세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 말엽까지 일반 아녀자들이 가채를 쓰고 일상을 보냈다는 사실과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니기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자들의 신분에 따라서 갓의 모양과 조복이 다른 모습을 세세하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산의 그림을 통해 쉽게 잊혀 지기 쉬운 당시의 평범한 일상 즉 짚신을 만드는 모습, 여성들이 명주실을 뽑고, 길쌈을 하는 모습에서부터 엿장수, 빗 장수 혹은 무당이 점치는 모습까지, 그리고 하찮은 노인네의 동냥하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기록한 기산의 활동은 우리 역사에서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철량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현재 전북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78년 중앙미술대전 입선, 동아미술제 입선한 바 있으며 1980년에는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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