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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 |
[문화시평]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관리자(2009-07-06 17:33:20)
호남우도농악 천하의 상쇠 나금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6월21일 흥얼흥얼, 굽실굽실, 한 판 푸지게 노세                            권은영  전북대학교 강사              6월 21일, 오후 7시 15분쯤,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연지홀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둘레둘레 서 있었다. 현직 장구잽이인 내 남편이 그 사람들을 쭉 한 번 둘러보더니, “전라도 굿쟁이들은 다 모인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알 만한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한 코미디언의 방송 복귀를 놓고 여러 미디어에서 ‘왕의 귀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더니만, 이거야 말로 ‘여왕의 귀환’이 아닌가 싶었다. 줄곧 상쇠 개인놀이만 보여 주었던 농악계의 여왕이 이번에는 프로젝트 공연단인 ‘금추예술단’을 꾸려 자신의 전모를 보여준다고 하니 ‘제후’들로서는 여간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농악단의 스타, 나금추 1950년대 말에 여성 농악인으로 꾸려진 ‘남원여성농악단’이 남원국악원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기존에 남자들만 연행했던 농악을 여자들이 한다니 사람들은 “참 별일 났다”고 신기해하며 광목 포장으로 된 가설극장에 모여들었다.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입장료를 셀 틈조차 없이 그냥 푸대자루에 쑤셔 담았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사방에서 여성농악단이 마구 생겨나면서 단체 간의 흥행 경쟁이 치열해졌고, 사람들은 가수들의 쇼나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여성농악단은 존속할 수가 없었고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나금추는 이런 여성농악단의 스타였다. 쟁쟁한 실력을 뽐내던 남원여성농악단, 춘향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등의 상쇠를 도맡았으며, 민요도 부르고 짤막한 창극인 ‘토막극’ 배우도 했다. 후배들은 여성농악단 초창기 멤버인 ‘언니’에게 꽹과리도 배우고 부포 짓도 익혔다. 정읍의 장구 명인인 신기남 선생이 생전에 “여자 쇠로는 나금추가 잘 치거든. 참 잘 쳐. 지금도 나금추쇠 치는 것 보고 싶어. 상쇠 짓 허는 것이나 모든 것 다 보고 싶어. 참 그짓말이 아니라 잘 쳐”라고 할 만큼 나금추의 기량은 최고였다. 하지만 그렇게 지낸 세월이 쉽지만은 않았다. 밥값이 없어 단원들과 함께 여관에 잡혀 있기도 했고, 광고용 농악인 ‘마찌마리’를 돌다가 논두렁에서 구르기도 했고, 춤추던 바라에 다리를 찍혀 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농악을 치면서 청춘을 보낸 덕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대통령상과 더불어 개인상을 수상하였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도 지정됐다. 그 뒤로 20년 가까이 전북도립국악원에 민요반, 농악반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을 했다. 그런 그가 고희를 넘겨서 제자들과 함께 공연을 마련한 것이다. 신명나는 가락, 굿판 한 번 즐겨보세 공연은 판굿으로 시작되었다. 다소 느리게 시작되는 오채질굿, 72세 노령의 상쇠는 발 디딤이 무거운 것 같았다. 하지만 첫째마당에서 둘째마당의 오방진으로 굿이 진행되자 능란한 상쇠의 진두지휘 속에 치배들은 맘껏 놀기 시작했다. 치배들의 얼굴에 환한 신명이 피어올랐고, 그것은 곧 객석으로 전염되어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 들뜬 고함을 쳐댔다. 자갈자갈한 음색에 늘였다 조였다 하는 상쇠의 쇠가락 때문에 나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배가 또 살랑살랑 간질간질’대고 있었다. 오방진굿이 끝나고 치배들은 농부가를 부르며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고, 다시 호호굿이 이어졌다. 맑고 경쾌하고 재빠른 자진삼채 대목이 되면 나는 발가락이 살짝 오그라드는 가벼운 긴장감이 들었다. 살짝 소리를 죽여 치다가 어느 순간 벼락같이 매도지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었다. 굿 하나가 끝날 때마다 묵은 것이 쑥 내려가듯 시원했고 관객들은 무대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판굿이 끝난 후, “왜 하필 신명난 판굿 뒤에 소리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꾼의 가벼운 원망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소리꾼의 옹골찬 수궁가 한 대목이 끝나고, 제자들의 나금추제 설장구가 이어졌다. 2006년부터 배우고 연습했던 제자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나금추의 상쇠 개인놀이. 굿거리장단에 맞춰 부포를 곧추세우고 가볍게 추는 그 춤은 팸플릿 축사에 나온 말과 같이 ‘천부적인 율동미’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소 긴 물채를 단 부포는 전날 비까지 맞은 터라 빠른 장단에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다소 짧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상쇠 개인놀이가 끝났다. 제자들의 두마치굿으로 본 공연이 끝나고 굿패들은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놀이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뒤풀이굿을 벌였다. 신이 난 치배들과 관객들이 한 데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연출가의 말대로 더 이상 늦출 수 없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판이었던 것 같다. 고령의 상쇠는 혼신을 다했고, 치배들은 최선을 다했다. 비록 예전 여성농악단 단원들처럼 휘모리 한 배에 두 바퀴씩 연풍대를 돌지는 못했지만, 상모의 가장자리에 흙이 묻어날 만큼 낮은 두루거리와 전설과 같은 자반뒤지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 나금추 선생님, 부디 건강하세요. 무대에 서신 모습 오래 오래 뵙고 싶어요. 권은영/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여성농악단 연구>, <20세기 풍물굿의 변화양상에 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북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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