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 |
[서평] 『길 위의 풍경』
관리자(2009-07-06 17:28:27)
참 고소하고도
담백한 길 위의 해찰
김병용의 『길 위의 풍경』을 읽고
김정배 원광대학교 강사
길 위에서 길이 된 사람 소설가 김병용. 산과 강, 섬 등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직접 다니며 경험한 이야기들은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귓가를 맴돈다. 그가 풍경의 속살을 헤집으며 귀 기울였던 길들의 축제.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만나 나눈 이 쓸쓸한 고요에 나는 참 고소하고도 담백한 길 위의 해찰 한 그릇을 먹은 기분이다.
전라도 탯말 중에 ‘해찰’이라는 말이 있다. 해찰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시간과는 무관하게 살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해찰하다 보면 그 누구라도 과거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미래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해찰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소설가 김병용은 『길 위의 풍경』이라는 여행기에서 ‘길’이였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흔히 길이란 되돌아옴을 전제로 떠난다는 상징을 갖지만, 그가 배낭을 메고 떠난 길들은 마냥 들어가 살기 좋은 빈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진행형의 삶의 흔적. 그는 그 자체를 즐기며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와 삶의 흔적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풍경이 세를 내준 빈집에 꽁꽁 숨어 있다가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오래 묵혀놓은 이야기들을 솔솔 풀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머물렀다 떠났다를 반복하는 그의 여정을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섬진강에서 지리산으로, 다시 금강으로 이어지는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그 풍경의 속살을 헤집던 그의 인식은 은근슬쩍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대기가 형성된 이후 여기 지구에 갇힌 것들은 어떤 것도 지구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물은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마셨던 그 물인 것이다. 지구의 생명시스템은 자급자족과 자기정화라는 두 가지 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발원지를 찾는 행위는, 순환과 자기정화로 일관한 지구의 생애를 더듬어 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5~36쪽)
길을 나서는 동안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그의 인식은 이쯤 되면 도리어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럴 때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도 생각난다. 개구리의 생애도 가슴 저리지만, 무심코 손을 대 그 운명이 바뀐 돌멩이를 생각하면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애니미즘이나 개유불성(皆有佛性)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에게 저 바위나 자갈들의 생애를 바꿔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언제부턴가 난 물수제비 뜨는 일조차 두렵다.(47쪽)
그가 지닌 두려움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문득 프로스트의 시 「걸어 보지 못한 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프로스트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한 것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높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김병용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기며 지나갔던 길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먼저 걸어가서 더욱 쓸쓸해진 길. 그래서 다짜고짜 두려워지기도 하는 길. 길과 풍경이 꽁꽁 숨겨놓은 사연은 그를 하염없이 작고 정처 없이 만든다. ‘하나의 길은 또 다른 길을 호출하여 이어진다. 끊임없다. 그 간단없는 삶의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정처 없다. 하여, 하나의 풍경에 뛰어들 때마다 나는 망설이며 자꾸 뒤들 돌아본다, 이 낯선 풍경이 나를 또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를 자문하는 그의 고백은 길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자신이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 진안 ‘촌놈’이 전주로 가출한 기분이랄까.
가출. 초등학교 시절 『사회과부도』를 보며 황홀한 긴장감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는 ‘가출(家出)’보다는 ‘출가(出家)’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다. 지도를 본다는 일은 자신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안다는 것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늠하고 있다는 증거겠다.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 자신에게 맞는 흔적을 취사선택하는 일.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풍경에 대해 ‘사전정보’를 입수했다 라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풍경을 읽는 행위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이고, 이는 곧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방향과도 맞물려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여행을 떠나기 전 사전지식을 가지고 떠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흐의 그림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 프로방스 지방의 측백나무는 수많은 나무들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김병용은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길에 만나게 될 사연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어루만져준다. 그것이 바로 여행의 목적이 되고 풍경을 찾아 떠나는 이유가 될 테니까.
‘고군산’이란 이름이 알려주듯, 원래 ‘군산’이란 지명은 고군산 열도의 것이었다. 신의주나 신태인 등 ‘신(新)’이 붙은 지명은 의주, 태인과 함께 병렬 공존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고조선이나 고군산이란 이름은 조선과 군산이 그 이름을 직렬 계승한다는 뜻이다. 즉, 당대에는 ‘고조선’이란 국명이나 ‘고군산’이란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과 ‘군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새로운 조선과 군산이 나타나자 그만 앞에 ‘고(古)’자가 붙은 것이다.(117쪽)
그가 바라본 풍경은 지리적으로나 지명적으로나 그의 해박한 인문학적 사유가 동반된다. 수많은 여행서들이 으레 자신의 감상만을 적어놓는 반면 이 책은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버무려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 알고도 모른 척 지나쳤던 고장의 이름을 더듬어 봄으로써 풍경이 지닌 쓸쓸한 이야기와 사연을 듣는 일. 그는 역사와 삶의 흔적을 더듬는 일 외에 문학적 감수성을 재확인 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다. 그의 여정은 어쩌면 문학에 대한 열망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삶도, 문학도 다 모닥불 가의 이 풍경과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인이었다가 구경꾼이었다가 하루에 수십 차례씩 자리를 바꿔가며 살아간다. 오늘도 그렇다. 김남주가 하염없이 내려다보았을 때 해남 벌판에서, 고정희의 서재에서, 다산과 초의선상의 강진만에서 우리는 구경꾼이다. 그러다가 펜을 들어 메모를 하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카메라의 앵글을 고민하는 순간, 각자는 자신 문학의 주인이 된다.(162쪽)
길 위에서 길이 된 사람 소설가 김병용. 산과 강, 섬 등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직접 다니며 경험한 이야기들은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귓가를 맴돈다. 그가 풍경의 속살을 헤집으며 귀 기울였던 길들의 축제.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이 만나 나눈 이 쓸쓸한 고요에 나는 참 고소하고도 담백한 길 위의 해찰 한 그릇을 먹은 기분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디 출신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아테네”라고 하지 않고 “세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길 위에만 서면 하염없이 작아지고 정처 없어진다’는 소설가 김병용. 그가 먼저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그는 아마 “길”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김정배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 제2회 사이버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같은 해에 『김용시창작기금』을 수혜받았다. 현재 원광대학교와 전주대학교에서 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