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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대학] 선사시대 삶의 풍경
관리자(2009-07-06 17:27:20)
한국 암각화의 형성과 특징
송화섭 전주대학교 교수
암각화는 시각적 언어
암각화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구석기시대부터 동굴벽화로 등장한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예술세계와 표현양식을 이해하는데 암각화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암각화에 주로 동물상과 인물상이 등장하지만, 기하학적 도형과 기호 등이 새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암각화(또는 암채화)를 새기는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구석기시대부터 암각화를 통해서 언어를 전달하고 의사를 표현하였던 것이다.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는 암각화와 도구가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암각화는 시각적인 언어로서 사람들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기호 또는 상징물이었다. 시각언어는 의사소통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며, 암각화는 심미적인 감성을 보여주는 시각예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암각화(Petroglyph)를 정의하면 자신의 신앙과 욕구, 의사를 바위 또는 암벽에 인물상, 동물상, 기호, 기하문양 등으로 표현한 시각언어요, 시각예술이라 할 수 있다.
암각화는 그냥 아무 곳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암각화가 새겨지는 곳은 제장 및 제단과 같은 공간이다. 특정한 공간의 암벽과 암석에 물상화와 기하도형을 조각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제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곳의 암각화는 정연한 논리와 규칙을 갖고 있다. 동일한 문양을 덧갈아파기해 골이 깊게 생긴 것이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암각화가 일정한 논리와 규칙을 가진 것은 종교적인 원형성을 보여준다. 러시아, 몽골 등지의 사슴돌에 등장하는 태양과 달, 인간계와 지하계의 구도에서 종교의 기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선사인들은 암각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물상화를 유감주술로 보거나 기하학 도형을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도 주술 종교적 시각이다. 구석시대부터 풍만한 여성소조상의 등장이 그것이다.
암각화는 주술종교적인 시각예술이기도 하지만, 달력이나 시간을 측정하는 도형도 있다.
윷판형 암각화가 그러하다. 암각화는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주술성과 상징성을 가진 시각예술이란 점이다.
암각화의 표현양식
암각화의 표현기법은 암화(painting art)와 각화(carving art)가 있다. 바위그림은 생업과 신앙과 생활환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수렵어로사회에서건 농경사회에서건 풍요와 다산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을 것이다. 암각화에서 풍요와 다산의 상징적 문양은 여성과 생식력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여성상이 소조상과 암각화에 등장하고, 남녀의 성적 교합 그림이 표현되는 것도 종족의 번성과 관련돼 있다고 본다. 남성보다는 여성상을 조형, 조각하거나 지모신 숭배, 여성 생식기 조각이 암각화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구석시대 이후 줄곧 여신숭배가 신앙예술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암각화의 동물양식에서 생식기가 과장되거나 교미하는 그림은 동물의 번식이 수렵사회에서 그만큼 중요하였음을 말해준다.
암각화의 표현 방식이 모두 성(性)과 관련돼 있는 것은 아니다. 암각화를 새기는 사람들이 사유세계와 종교적인 욕구에 따라 신화, 상징, 기호, 그림 등의 표현기법을 모두 다르게 제작할 수 있다. 건국신화의 구성요소인 태양신, 지모신의 문양이나 도상이 암각화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화발생의 동기는 신화형성 이전의 시기에 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사유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암각화는 창조와 모방의 예술적 표현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암각화에는 생활예술의 창조적, 관습적 표현이 있는가 하면, 모방주술적인 상징적인 도형으로 표식되기도 한다. 손바닥의 암채화가 있고, 발바닥의 암각화가 모방주술적인 기호 또는 상징적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암각화의 유형은 물상화(物象畵)와 기하문(幾何文)으로 크게 나눈다. 물상문양은 육지동물, 바다동물, 사람, 배, 창 등 사물형상을 그대로 묘사하여 조각하는 그림형태라 한다면, 기하문양은 점, 선, 동그라미, 네모, 세모, 마름모 등을 이용한 상징적인 도형을 말한다. 전자를 사실주의(寫實主義) 표현양식이라 한다면, 후자는 상징주의(象徵主義) 표현양식이다.
또한 물상문양과 기하문양 사이에 반기학적(半象徵主義) 문양도 있다. 반기하학적 문양은 사물형상의 본질적, 특징적인 면을 살려내면서 상징형상으로 조형하는 그림형태이다. 암각화는 구석기시대의 사실주의 표현양식에서 아래로 내려와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상징주의 언어로 양식 변화를 가져온다. 표현양식의 변화는 사물형상의 사실적 표현단계가 모방주술적 의례방식에서 기원기도의 의례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을 수반한다.
암각화의 조각기법은 모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면각과 선각이 주류를 이룬다. 면각은 쪼아파기로 물상의 전면을 쪼아파기로 그림을 그려내는 방식이며, 선각은 그어파기 또는 쪼아파기로 밑그림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쪼아파기를 한 후에 선각에 따라 갈아파기를 지속하여 주술종교적인 도형을 상징적 기호로 활용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동물상 내부를 점, 동심원, 사선 문양 등을 정연하게 그려넣는 양식도 있다. 이러한 문양들은 단순한 생활미술이라기 보다는 신앙예술적 가치가 크다고 본다. 이러한 표현양식은 풍요다산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암각화의 분포와 특성
우리나라에서는 구석기시대까지 올려 잡을 수 있는 암각화가 발견된 적이 없다. 한국 암각화는 대체로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주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걸쳐 제작되었다. 물론 바위면의 암각은 철기시대 이후 후대에서도 석탑의 성혈군이나 석탑회랑지 주초석에 윷판형 암각화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선사예술의 장르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크게 세 유형이 있다. 첫째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 둘째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 셋째는 경북 일원의 검파형 암각화이다.
울주 반구대는 사실주의 그림으로 바다동물과 육지동물을 주축으로 마치 ‘천연동물원’처럼 조각하여 놓았다. 동물그림 모음전을 연 ‘자연화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높이 2미터 넓이, 10여 미터의 암벽에 그림들이 빽빽이 그려져 있다. 주로 고래, 거북이를 중심으로 바다동물이 좌측을 차지하고 호랑이, 사슴, 멧돼지 등 육지동물이 우측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동물들의 틈새로 배(주)그림과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동물이 주축을 이룬 반구대암각화는 수렵어로시대의 산물로 쉽게 정리되어 신석기시대 중기에 반어반목하는 종족이 이곳에 들어와 머물면서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의 주체가 토착민인지 유이민인지 더 연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동물그림이 갖는 시베리아지역 암각화의 표현기법이 나타나 어로기술과 암각기술을 가진 북방민족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정은 반구대 암각화가 다른 지역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암각화의 표현기법과 양식이 우수하다는 점, 그리고 암각화가 동남해안과 연결되는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 점을 들 수 있다. 북방종족이 배를 타고 동해안의 해류를 이동하여 풍어의 어장을 쫓아 한반도 남해안으로 내려와 이곳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반구대에서 배를 타고 태화강을 내려가면 울산만 장생포구와 연결돼 반구대 암각화가 고래잡이 역사의 기록물이라 말할 수 있다.
울주 천전리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약 1.5㎞ 떨어진 상류역에 위치하고 있다. 천전리는 반구대 암각화와 다른 암각문화를 가진 종족의 작품으로 보인다. 천전리에는 쪼아파기 수법으로 제작한 사슴중심의 동물그림도 좌측부분에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하학적 문양이 주축을 이룬다. 그리고 천전리 암각화 아래에는 서각이 있으며 서각을 중심으로 좌우측에는 신라시대 화랑들의 이름과 선각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화랑대’로 부르기도 한다. 화랑들의 실천항목가운데 유오산수했던 곳이 바로 천전리 암각화가 위치한 화랑대였던 것이다.
다음은 경북 영일,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검파형암각화(劍把形岩刻畵)이다. 검파형암각화는 영일, 경주를 중심으로 영천 보성리, 영주 가흥동, 안동 수곡리, 경주 안심리, 고령 양전동·안림리 등 경북 일원과 전북 남원 대곡리에서 발견된다. 검파형 암각화는 마제석검의 검손잡이자루(劍柄, 劍把)를 기본적인 모형으로 하는 반기하학적 문양이다. 우리나라의 석검암각화가 전남 여수시 오림동 남방식 고인돌과 경북 영일 인비리 남방식 고인돌 덮개돌에서 발견되었는데, 검파형암각화의 모형은 영일 인비리 고인돌 암각화의 석검양식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검파형 암각화의 주체는 고인돌 축조집단이라 할 수 있다.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의 주체는 불분명하지만 한반도 남부지방에 분포하는 검파형암각화의 주체는 청동기시대 정착생활을 주도하였던 남방식 고인돌사회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검파형 암각화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문양들이 다르게 그려졌지만 검파형을 문양근본의 틀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검파형암각화가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문양이냐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신상암각의 한 표현양식이라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다.
검파형암각화가 청동기시대 고인돌사회에 생성되었다는 점은 일단 전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집중분포지가 한반도 남부이며, 남방식고인돌의 주 부장품이 마제석검(磨製石劍), 마제석촉(磨製石鏃), 홍도(紅陶)이다. 그런데 영일 인비리의 고인돌암각화에는 마제석검 2문과 마제석촉 1문이 그려져 있다. 인비리의 검파식이 독자적인 기하문양으로 변모하면서 경주, 영일 일대에 검파형암각화를 확산시켰던 것이다. 검파형 암각화의 주무대인 영일, 경주지역에는 검파형암각화와 더불어 석촉형암각화(石鏃形岩刻畵)들도 발견되고 있다. 석촉형암각화는 마제석촉이 반기하학적 문양으로 변모하여 신상암각화(神像岩刻畵)를 조형된 형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암각화의 지리적 조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한반도 남부지방에 집중돼 있다. 현재까지 한반도 중부이북 지방에서 암각화가 발견됐다는 보고는 없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반구대 암각화는 경북 울주군 언양면에 위치하고, 천전리 암각화는 울주군 두옹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암각유적 사이는 불과 1500여미터 정도 떨어진 동일지역이며 공통점은 울산만 방어진을 통해 동남해안과 연결된 태화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 유적 모두 강안(江岸)의 거대한 암벽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점은 반구대 암각화는 그림 1문이 한 번에 작품완성을 이룬 반면, 천전리는 재차 반복적인 갈아파기 행위로 선각의 골이 깊게 마연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반구대 암각화가 동물중심의 바위그림이라면, 천전리 암각화는 상단에 기하무늬 바위그림과 사슴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하단에는 통일신라시대 화랑도들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선각화들이 화각과 함께 그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바다동물과 육지동물들과 몇몇의 인물상과 배문양만이 등장하고 있는데, 천전리 암각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두 유형의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천전리 암각유적의 상단에 그려진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는 대체로 신석기시대 후기 청동기시대에 걸쳐 오랜 세월동안 제작된 데 반하여, 하단의 서각과 선각화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유오산수와 상열가악을 일삼던 화랑도들이 일시적 그렸던 낙서화라 할 수 있다. 두 암각유적은 아주 세련된 암각기법과 예술적인 표현양식까지 갖춘 암각화의 전문성을 갖춘 집단의 작품으로 한반도에 위치할 뿐 한반도 주민들과 전혀 다른 집단이 이주해와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검파형암각화들은 분포하는 지리적 특징과 공통점이 있다. 첫째, 강물과 바다가 인접한 지역의 산자락이나 뫼부리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암각화가 조각된 바위는 자연석 또는 고인돌과 같이 독립된 바위덩어리에 새겨진 경우도 있는가 하면, 경주 금장대와 영일 칠포리 처럼 토측면에 노출된 암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체로 검파형암각화가 발견되는 곳은 산세가 정상에서 내려와 머금은 암석에 새겨진 경우와 고인돌에 새겨진 경우이다. 전자는 풍수상 산진회수형(山盡回水形) 지세에 암각화가 위치하여 강물이 그곳을 감돌거나 아예 산계곡의 물가에 위치한 바위덩어리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이처럼 검파형 암각화가 위치하는 곳은 강물의 흐름과 관련성이 깊은 듯하다. 청동기시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제일 소중했던 것은 경작지와 물의 공급이었을 것이다. 정착농경에서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확보는 절대적인 생존수단이었으며, 농경의 생산활동과 더불어 농경의 풍요신에 대한 기원의례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물과 가까운 곳 가운데 바위가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신상암각을 제작하면서 농경의 풍요다산을 기원한 농경의례를 거행한 결과 암각화가 제작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작방식은 신상을 갈아파면서 기원하는 주술적인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교롭게도 고인돌이 위치하는 지리적 여건과 암각화가 위치하는 지리적 여건이 흡사할 뿐만 아니라 고인돌 덮개돌에 검파형 암각화가 조각된 사례가 영일 칠포리와 경주 안심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에 비추어볼 때, 검파형암각화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사회의 주민들이 신앙의례 차원에서 제작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나라 암각화의 유형과 성격
암각화는 성혈암각과 문양암각으로 구분된다. 성혈(Cup-mark)은 갈아파기로 제작된 바위구멍을 말한다. 대체로 성혈암각은 갈아파기와 쪼아파기로 제작된 게 많으며, 갈아파기 성혈은 다시 단일 성혈과 군집 성혈로 구분되며, 동이형 성혈도 이에 속하는 암각유적이다.
쪼아파기 성혈은 작은 바위구멍으로 일정한 정형의 틀을 갖춘 원형다공문양과 윷판형 암각화를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갈아파거나 쪼아파기로 제작한 성혈군들은 천체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성혈군들도 발견되고 있는데, 별자리 성혈군들은 성혈간에 쪼아파기와 갈아파기의 수법이 동시에 사용되어 골선각이 생겨나기도 한다.
성혈군들은 대체로 고인돌 덮개돌에 제작된 경우가 많으며, 특별히 제장, 제단의 기능을 가진 산정이나 산곡의 바위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익산 미륵산의 성혈군, 속리산 문장대, 대구 팔공산 갓바위 여래좌상부근 등 산정상에 분포하는가 하면, 경주 감은사 석탑 기단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마치 별자리와 같이 무수하게 성혈군을 제작한 곳은 영일 칠포리 제단식 고인돌 상면과 함안 도항리 고인돌 덮개돌의 성혈군을 들 수 있다.
성혈군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바위구멍만으로 윷판을 조형한 윷판형 암각화는 윷판의 기원과 용도를 밝혀주는 자료이다. 윷판형 암각화 역시 동양적 성수도라 할 수 있는데, 동지, 추분, 하지, 춘분의 사이에 하늘에 나타나는 7자리의 별자리들을 오행에 맞추어 배열한 28수도라 할 수 있다. 28수는 동양적 성수로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천문도(天文圖)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여 별자리를 농경생활에 활용하는 지혜를 가졌던 것이다. 윷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제작된 카렌다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문양암각이다. 문양은 다시 물상문양과 기하문양으로 나뉜다. 물상문양은 반구대, 천전리의 동물 및 사람문양, 배문양, 발바닥 문양과 영일지역의 마제석검, 마제석촉 문양 등이다. 반구대에는 고래, 거북이가 바다동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육지동물은 호랑이, 사슴, 멧돼지, 늑대 등 그림이 그려졌으며 사냥목책과 동물을 포획한 사냥그물 그림도 그려져 있다. 조각기법 가운데 내부투시화법(內部透視畵法)은 동물생태계에 대한 지식이 밝고 우수한 조각기술을 가진 집단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짙게 베어나오는 동물그림의 표현양식이다. 물 뿜으며 유영(遊泳)하는 고래모습, 어슬렁 걸어가는 호랑이모습, 그물에 갇힌 동물모습, 암수동물의 교미자세 모습, 새끼를 등에 업은 동물모습 등 동적(動的)이고 생명력있는 동물모습들이 잘 표현된 바위그림들이다. 수렵어로시대의 생업은 효율적인 사냥활동에 달려있다. 동물그림을 조각하는 동기는 실제사냥에 앞서 더 많은 사냥물들을 얻고자 거행하는 모의주술적 수렵어로의례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반구대암각화가 수렵어로시대 또는 수렵어로를 경제활동으로 하는 주체들이 풍요, 다산의례를 거행한 제사유적이라 할 수 있다.
기하문양은 다시 기하문양과 반기하문양으로 나뉜다. 기하문양은 동심원, 방형, 곡선문, 성혈 등 원, 네모, 세모, 점, 선 등의 도형으로 암각화가 표현된 것이다. 기하문양은 단순한 도형을 이용하여 물상이나 상상적인 형상을 심벌로 조형한 것이다. 기하문양은 울주 천전리 암각유적이 대표적이며 고령 양전동과 함안 도항리의 삼중 및 다중동심원 문양과 경주 금장대의 원형다공문양이 기하문양의 전형을 보여준다. 반면 반기학적 문양은 물상의 특징를 강조하여 바위그림으로 조형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의 생식기를 삼각형으로 조형하거나 남성의 생식기를 마제석검의 변형양식으로 조형하거나 검파형암각화 및 석촉형암각화가 대표적인 반기하학적 신상암각의 대표적 케이스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마제석검·마제석촉은 무기보다는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남성들의 장신구로서 용도가 더 컷을 것이다. 금생의 신분과 권위를 후생에 까지 지속시키고자 장엄구를 장송의례 시에 상징적인 부장품으로 묻어주었던 것이다. 고인돌 덮개돌에 조각된 석검·석촉문양은 역시 묻힌 자의 권위와 신분이 영구영생하도록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송의례는 역사시대 왕의 고분에서 출토하는 부장품과 그 의미와 하등 다를 게 없다고 보인다. 이는 현세에서 묻힌자의 신분과 권위가 저승에서도 지속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진 조상숭배의 한 유형이다.
마제석검의 검파식에서 검파형 암각화가 파생한 것도 조상신상(祖上神像)을 양식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이승과 저승을 구분하지 않으려하는 내세의식은 이미 고인돌시대부터 계승되어온 우리민족의 정신적 기층문화라 할 수 있다.
암각화에 나타난 선사인들의 세계관
암각화는 주술종교적 상징성이 발달하였던 선사시대의 시각언어요, 신앙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역사시대에 종교의례가 발달하면서 주술의례는 하위존재로 밀려나 철기시대에 암각화를 조각하는 신앙의례는 발달하지 않는다. 주술의례와 종교의례의 궁극적 목표는 같다. 다만 의례행위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호신부와 암화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아 제작하거나 그렸다. 구석기시대의 종교예술은 여성조각상과 동굴벽화가 많다. 당시에는 수렵어로의 생활양식에 맞게 이동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방식으로 신앙의례가 행해지고 그에 걸맞은 신앙예술품을 만들어 졌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생활환경에 적합한 장소를 택해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의례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의 변화는 모든 생활방식에 변화를 추구했겠지만 의례변천도 수반되었던 것이다.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 정착생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주거지에서 가까운 곳에 성소를 정하고 제의를 거행하는 관행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렵어로시대를 여행하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 표현양식을 보여준다. 조각기법도 쪼아파기, 그어파기, 모두쪼으기로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내부투시화법(內部透視畵法)은 바라볼수록 선사인들의 연상력, 인지력과 관찰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한 시각예술을 바위 면을 캔버스로 활용하여 조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울 일이다. 정말 석기시대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성과 조각기술에 감탄할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짙게 배어나오는 동물그림의 표현양식이다. 반구대암각화에서 물 뿜으며 유영(遊泳)하는 고래모습, 어슬렁 걸어가는 호랑이모습, 그물에 갇힌 동물모습, 암수동물의 교미자세 모습, 새끼를 등에 업은 동물모습 등 동적(動的)이고 생명력 있는 동물모습들이 잘 표현된 바위그림들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은 사냥활동과 동물의 생태계를 사실 그대로 묘사해놓은 선사인들의 거대한 자연화랑(自然畵廊)이라 할 수 있다. 선사인들이 생동감 있는 동물그림들을 다양하게 그린 것은 주술적 의미가 크다. 수렵어로시대의 생업은 효율적인 사냥활동에 달려있다. 동물그림을 조각하는 동기는 실제사냥에 앞서 더 많은 사냥물들을 얻고자 거행하는 모의(模擬)사냥의 주술적 기원의례였을 것이다.
이러한 동물그림은 반구대 바위그림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만, 거의 동일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천전리 바위그림에서도 조각되어 있다. 천전리 바위그림이 위치한 곳은 반구대에서 상류를 따라 약 1.5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천전리 바위그림은 사슴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보다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 그림들이 가득 암벽을 메꾸고 있다. 이러한 사슴 그림과 기하문 그림은 선사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보이지만, 통일신라시기에 조각된 세선각 그림들과 신라 화랑도들의 이름과 그와 관련하는 서석명문도 발견된다.
천전리 바위그림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난해한 기하학적 그림들로 구성돼 있다. 기하무늬들은 주로 연속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사선문, 연속타원형 등 삼각, 사각, 원, 마름모를 기초로 하는 추상적 무늬가 대형암벽에 그려져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하무늬들은 우리나라에서 천전리 바위그림이 유일하다. 그렇지만 천전리 바위그림이 어느 시대에 제작된 것인지 제작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언급하기 어렵다. 선사인들이 그려놓은 문양을 현대인들이 풀어내지 못하는 문양들로 빼곡하게 그려진 암각화가 천전리 암각유적이다.
선사시대의 바위그림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낙서가 아니며, 기하무늬마다 상징적 의미가 담긴 조각품들이다. 기하문 암각화는 분명히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림이지만, 과거와 현대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칠포리 암각화는 모두 오랜 세월동안 갈아파서 생긴 선각을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서, 제작 당시 이 기하무늬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나 기호 또는 문자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정보매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와 의례가 단절된 현대인들은 무슨 영문으로 새겼는지에 대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당시에는 선사인들이 꼭 새겨야할 필요성과 절대성을 가진 기호, 부호, 상징 등 정보와 전달매체의 그림으로 그렸거나 주술종교적인 표현양식으로 그렸음에도 오늘날 그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문양들은 청동기시대에농경생활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임이 분명하다.
암각화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한다. 공통점은 번식과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주술종교적 의례 수단으로 그려진 것이 일반적이다. 수단의 목적은 동물 및 인간의 번식, 그로 인한 부족의 번창과 지속을 바라는 작은 소망이 암각화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냥과 번식, 제의, 성적 행위 등의 그림은 암각화를 통해서 선사인들의 정신세계를 접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떠난 사후세계의 영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도 있고, 샤먼의 영혼천도의례와 관련된 그림들도 있다. 이 모든 암각화들은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 전달매체로서, 말하고자 하는 표현방식과 욕구를 그림으로 놓은 시각언어요 상징적인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구대·천전리 암각화는 마치 한권의 그림책을 보는 것 같다면, 칠포리·금장대·양전동 암각화는 종교의 기원과 원형을 보여주는 제단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공동기획: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