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6 |
[신귀백영화엿보기] <박쥐>의 태주....
관리자(2009-07-06 17:38:56)
<박쥐>의 태주, <마더>의 문아영, 그리고 무쉐뜨 - 적막한 계절의 사운드
<무쉐뜨 1967>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內地人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 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백석의 「八院(1939)」 전문
보라, 시인 백석(1912-1995)의 시선과 로베르 브레송(1901-1999)의 카메라는 닮아있지 않은가. 손등이 밭고랑처럼 터진 나이 어린 계집애 무쉐뜨가 평안북도 영변군 팔원면에서 버스를 탄다. 묘향산 어드메에 삼촌이 산다는 이 소녀는 운다. 흐느끼며 운다. 본토인 주재소장 집에서 오래도록 밥 짓고 아이보기를 하면서,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치던 소녀가 죽었다. 그 소녀가 죽지 않고 살아간다면 상심으로 수척해지다가 바보와 함께 묶여지는 <박쥐>의 태주가 될까. ‘엄마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라’는 김혜자 같은 한국의 영웅적 엄마도 없는 그 소녀가 빨래처럼 옥상에 널브러진 채 죽으면 <마더>의 기초수급자 문아영일 것이고, 문아영이 죽지 않고 살아가면 발꿈치 단단한 태주가 되리라.
한 짐 가득 짊어진 삶의 무게
브레송의 <무쉐뜨, 1967>은 병든 엄마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내가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설정 숏이나 적당한 인트로 그런 것 없이 카메라는 한 사나이가 올무를 놓는 숲 속으로 간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다른 눈이 있다. 오래도록 정지한 카메라가 붙드는 파닥거리며 죽어가는 새 한 마리 장면은 앞으로 일어날 비유이자 상징이다. 어렵지 않다.
봉긋한 가슴, 뽀송한 솜털이 일어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올 시절일 텐데, 아이는 더러운 옷을 입었다. 날렵한 스니커즈와 스키니 진이 아름다울 나이인데, 무거운 신발의 열네 살 소녀는 지옥에 산다. 앓아누운 엄마를 간병하고 나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어린 동생의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인다. 카페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밀주배달원 아비에게 빼앗기고 남은 돈으로 그녀도 한 잔 마신다. 사춘기라는 범퍼카가 몸속에 들어있을, 놀이공원에서 놀고 싶어 하는, 이 아이는 주정뱅이 아비에게 뺨을 맞고 운다.
소녀는 학생이다. 학교에서는 노래를 가르친다. “희망을 품고 사흘만 기다려라.” 희망을 노래하라며 윽박지르고, 음이 틀렸다고 선생님은 머리를 쥐어박는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남자애들은 고추를 내놓고 소녀를 놀리고 깨끗한 옷에 새 가방을 든 여자애들은 지들끼리만 논다. 왕따다. 남학생들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사라지는 향수뿌린 지지배들을 향해 무쉐뜨는 다만 흙덩이를 던진다. 흙덩이라.
절벽 끝에 매달린 희망
그들을 피해 소녀는 외딴길로 들어선다. 카메라는 그녀의 나막신 같은 검은 신발을 따라간다. 은사시나무가 잎을 뒤채는 숲에 비가 떨어진다. 비가 그치고 나면 구름에 가린 열나흘 달이 뜬다. 그리고 길을 잃는다. 진흙탕에 낡은 신발 한 짝을 남긴 소녀에게 밀렵꾼 아르센이 나타나는데…. 비를 피하려 함께 들어간 오두막에서 발작이 일어난 아저씨를 간호해주던 어린 양은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른다.‘희망을 품고 사흘만 기다리라’는 기막힌 반복의 아이러니라니. 깨어난 아르센은 무쉐뜨를 덮치고, 밤새 사이클론이 분다. 강간은 있어도 연애는 없는 소녀는 빗물에 발이 불었을 것이다. 시큼한 냄새는.
비가 그치고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운다. 서서 또 운다. 흐느낀다. 흐느끼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아이를 안고 우는 아이에게 등잔불을 끌만한 힘도 없는 엄마가 말한다. “너는 못된 직공이나 술꾼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 돼.” 문아영과 태주에게 그 옛날 엄마가 들려 준 말도 이런 말 아니었을까. 딸이 따라준 독주 한 잔을 마시고 엄마는 아침 성당 종소리와 함께 눈을 감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엄마마저 없는 이 길갓집 소녀는 칭얼대는 아이의 우유를 얻으러 우유통을 들고 문밖을 나선다.
엄마의 죽음은 이웃집 커피숍 여자에게 잠시 관심과 친절을 부르게 하지만, 여자는 이내 가슴의 생채기를 보고 더러운 계집애라는 비수를 꽂는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걷는 소녀에게 엄마의 수의를 마련해준 할머니의 질문은 역시 사랑이나 관심이 아닌 동정에 다름 아니다. “넌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니?”라고 묻던 할머니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소녀가 던지는 복수는 겨우 카펫에 흙을 묻히는 것일 뿐.
죽음에 관한 사실과 진실의 외줄타기
조준하고 총을 갈기는 남자들과 총에 맞아 버둥거리는 어린 토끼, 올가미에 걸린 새의 운명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그림이지만, 마지막 장면은 브레송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고통스런 축제의 한 장면이다. 이제 소녀는 물가에 앉는다. 드레스는 날개가 아니어서 날아갈 수 없는 소녀는 언덕에서 저수지를 보고 앉아있다. 그 때 잠깐, 트랙터 소리가 들린다. 그 트랙터 아저씨가 “저기요”하는 소녀의 손짓을 보았더라면, 그 귀먹은 천사가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 한 번, 두 번의 실패, 그리고 세 번. 이 세상은 그냥 쉽게 물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간절히 반복해야 겨우 작은 문이 열려, 쉴 수 있는 나라. 음표와 쉼표를 구별하지 못해 두들겨 맞은 소녀는 이제 쉼표 아닌 마침표를 찍고 만다. 숲 속 지켜보는 눈도 없이 첨버덩 하는 소리가 들리고 물에 이는 파문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무쉐뜨의 수난 그리고 이어지는 죽음은 이토록 몇 번에 걸쳐 시도할 만한 일인가. 지옥을 벗어나는 이 드라이한 장면의 사운드가 은총의 통행증이라고 말하는 브레송의 구원론 앞에 지울 수 없는 생각 한 토막. 2009년 상반기의 키워드는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같은 것일 것. 소녀의 죽음에 이르는 모욕을 두고 부엉이 바위가 생각날 만하다. 자살은 살인보다 큰 죄라는 오래된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단호히 아니라고 파문을 일으키는 브레송에게 태클을 걸 용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미니멀리즘이란 이런 것인가. 78분에 아름다움은 없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엄숙한 감정도 없는데, 뺄 것이 없다. 그렇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끝맺음에 대한 통찰은 난해하지 않고 단순하다. 말수 적은 어린 배우의 행동과 표정, 그리고 적재적소에 들어맞는 사운드는 어떤 장치보다 디테일을 충실하게 해준다. 구멍 난 양말과 신발에 고인 물, 머리에 붙은 덤불, 몸에 난 생채기 등 사소한 디테일도 뺄 것이 없지만, 역시 사운드가 최고다. 궁금증을 일게 하는 총소리, 술 따르는 소리, 천둥소리, 스쳐가는 자동차 소리, 나무가 불에 몸을 맡겨 타닥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영화 이후 눈을 감고 묘향산행 승합 버스에 오르는 찬물에 걸레 친 소녀를 생각하는데 딸각거리는 나막신 같은 무쉐뜨의 발소리가 계속 따라온다. 어쩔 수 없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