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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 |
[박물관대학] 금석문-광개토왕릉비문
관리자(2009-06-03 19:02:16)
잠시 여유를 가지고 고개 돌아보면 우리 땅 곳곳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찬란한 과거와 마주하게 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내던 우리들의 과거와 그 역사가 박물관 대학을 통해 다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전북대 박물관과 함께하는 이번 기획을 통해 옛 조상들과 대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잘 살고   오곡이 잘 영글었도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광개토왕릉비를 발견하기까지 현재 중국에서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고 부르고 우리에게는 만주라고 일컫는 곳 가운데 하나인 지린성 지안시의 퉁꼬우 평원에는 높다란 비석이 한 개 우뚝 서 있다. 만고풍상을 맞아 가면서 풍운의 만주 대륙 역사의 부침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이 비석은 옛 고구려 도성인 국내성의 동쪽 국강(國岡)이라는 언덕 위에 자리 잡았다. 1447년에 제작된 『용비어천가』에서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리쯤에 큰 벌판이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일컫는다. 성 북쪽으로 7리쯤에는 비석이 있다. 또 그 북쪽에는 돌무덤[石陵] 2기가 있다”라고 하면서 이 비석의 존재를 언급했다. 여기서 ‘비석’의 존재는 1487년에 평안감사로서 압록강변 만포진을 시찰했던 성현(成俔)이 지은 ‘황성 밖을 바라보며(望皇城郊)’라는 시에서 다시금 언급되었다. 그는 “우뚝하게 천척비(千尺碑)만 남아 있네”라고 읊었지만 압록강변에서 아스라이나마 이 비석의 존재가 육안으로 목격되기는 어렵다. 누구도 직접 확인하지 않은 미지의 비석인 것 같지만 『동국여지승람』과 이수광의 『지봉유설』등에서는 금(金)나라 황제비(皇帝碑)로 단정하였다. 만포진에 잇댄 압록강 너머에 자리 잡은 성과 무덤 그리고 비석, 모두 12세기에 불길처럼 솟아올라 북중국을 점유하면서 동북아시아를 요동치게 만들었기에 훗날 정복왕조라고 불리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숨결이 잡초 덤불 속에서 고요히 영면(永眠)하고 있는 장소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지안 일대는 같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선 17세기 이후에는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라는 명목으로 인해 주민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봉금령(封禁令)에 묶여 역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봉금령이 풀려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간 19세기 후엽인 1875년~1876년 사이 어느 때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이 비석의 존재가 현지 주민들에 의해 다시금 발견되었다. 두텁게 끼인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비석 겉면에 우마분(牛馬糞)을 바르고는 불을 질렀다. 타닥타닥 작열하는 사이에 불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비면에 균열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 비석은 전통적인 신앙의 대상인 선돌에다가 사면에 예서체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곁에서 비석을 보면 비면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마치 물결처럼 굴곡이 져 있었다. 쑥 파여진 부분에도 글씨는 둥지 틀듯 또렷하게 자리 잡았다. 돌을 다루는 데는 가히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는 고구려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비석의 겉면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글자를 드러낸 ‘대금황제비’는 고구려의 저명한 정복군주인 제19대 광개토왕의 능 앞에 세워진 능비(陵碑)로 새롭게 밝혀졌다. 광개토왕릉비와 비문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광개토왕릉비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높이가 6.39m로서 굉대(宏大)한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석비 가운데 광개토왕릉비(이후 ‘능비’로 줄여서 표기한다)가 제일 규모가 크다. 이에 걸맞게 비석의 무게는 대략 37t으로 추정되었다. 둘째,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이 만든 비석으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간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는 최초의 사례에 속한다. 셋째, 화산암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가 12Cm에 이를 정도로 크다. 광개토왕릉비문」(앞으로는 줄여서 ‘능비문’으로 한다)은 무덤 주인의 공식적인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처럼 길게 열거된 광개토왕의 공식 시호를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광개토왕릉이 ‘국강상’에 소재하였음과 더불어, 능비가 세워진 일대가 국강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널리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었다’라는 구절은 광개토왕의 치적(治績)이 영토 확장이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호태왕’은 광개토왕 뿐 아니라 고구려왕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되는 미칭(美稱)이었다. 요컨대 길게 적혀 있는 광개토왕의 시호는 능묘의 소재지와 치적 그리고 고구려왕에게 붙는 미칭으로 구성되었다.   “널리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었다”라고 한 광개토왕의 치적은 『삼국사기』에 수록된 그의 성품과도 잘 연결된다. 즉 “나면서부터 체격이 뛰어 나게 크고 활달한 뜻을 가졌었다”라고 한 광개토왕이었다. 광개토왕은 백제 진사왕이 “담덕(광개토왕)이 용병(用兵)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나가서 대항하지 못하여 한강 북쪽의 부락들을 많이 빼앗겼다”라고 했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다. 비록 광개토왕에게 압기(壓氣)되었던 진사왕이었지만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했으며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라는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든다. 광개토왕은 용병술을 비상하게 구사하는 걸출한 군인왕이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광개토왕릉이 분명한 장군총 앞에 세워진 능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단 무덤 주인인 광개토왕의 치적이나 일대기를 담고 있는 비석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에 비석을 세워 훈적(勳績)을 명기(銘記)하노니 후세에 보여라”라고 하였듯이 「능비문」은 광개토왕의 공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능비는 고구려 왕릉 앞에 최초로 세워진 비석이었다. 이 점은 광개토왕의 치적이 역대 고구려왕들의 그것보다도 우뚝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게다가 능비를 세워야 할 특별한 동기 요인의 발생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능비문」의 저류에서 감지되는 정서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긍지와 우월적 사고였다. 가령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입장임을 과시하면서 “(광개토왕의) 위엄 있고 씩씩함은 사해(四海)에 떨쳤노라!”라고 자랑하였다. 여기서 ‘사해’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데 그 중심국은 고구려를 가리키고 있다. 그랬기에 자국 시조에 대해 ‘천제(天帝)의 아드님’·‘황천(皇天)의 아드님’과 같은 최고최상의 수식어를 총동원해 그 존엄성을 기렸다. 그러한 선상에서 ‘왕’ 그것도 ‘태왕(太王)’으로 호칭한 것은 광개토왕뿐이었다. 백제와 신라 국왕은 ‘주(主)’ 혹은 ‘매금(寐錦)’으로 각각 폄하시켜 표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변 국가들과 상하 조공 관계를 구축했던 사실을 명기했다. 이는 말할 나위없이 황제 체제의 선포였다. 「능비문」에는 이 같은 천하관과 짝을 이루며 자국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기 위한 구현 이데올로기가 보인다.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사상이 그것이다. 『맹자』에 따르면 “인(仁)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이르고, 의(義)를 해치는 것을 잔(殘)이라 이른다”고 했다. 이는 「능비문」에서 고구려에 대적하는 공동 악역(惡役)으로 등장하는 양대 세력을 ‘왜적(倭賊)’과 ‘백잔(百殘)’으로 각각 폄훼시켜 호칭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의(仁義)의 화신인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는 그것에 배치되는 백제와 왜를 정토(征討)한다는 이른바 정의관의 발현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광개토왕은 항시 은혜와 자비를 발휘해서 용서하고 구원해 주는 따뜻한 덕화군주(德化君主)의 모습으로 설정되었다. 광개토왕의 이름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 담덕(談德)이었다. 16세기에 간행된 『투필부담·投筆膚談』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전쟁의 주축은 명성과 대의다. 훌륭한 명성을 쌓되 적에게는 악명을 부여하라. 자신의 유덕(有德)을 널리 알리고 적들의 부덕(不德)을 폭로하라. 그리하면 당신의 군대는 힘을 얻어 하늘과 대지를 뒤흔들 것이다.” 이 같은 아주 멋진 표현은 「능비문」에서 광개토왕을 “위엄 있고 씩씩함은 사해에 떨쳤노라!”라고 한 칭송, 곧 명성과 연결된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인의의 구현이라는 대의를 걸고 수행한 전쟁 양상과 정확히 부합되고 있다. 비록 「능비문」은 광개토왕 사후에 새겨진 것이지만, 광개토왕 생전의 전쟁관이 응결되었기 때문이다. 총 44행, 1,775자에 3개 문단으로 나누어진 「능비문」은 건국설화와 정복전쟁 기사 그리고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묘지기인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정복전쟁 기사는 ‘전쟁의 명분+전쟁 과정+전쟁의 결산’이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정복전쟁 기사 앞에 적혀 있는 건국설화는 광개토왕이 무력을 행사하는 배경과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건국설화와 정복전쟁이라는 2개의 접속된 문단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능비문」의 마지막 문단에는 무려 330가(家)나 되는 묘지기들의 출신 지역이 낱낱이 기재되었다. 국내성에 거주하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광개토왕릉의 묘지기 가운데 3분의 2는 정복 지역에서 차출하였다. 이들은 광개토왕대 기세를 올린 정복 사업의 현현한 성과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영락 6년에 점령했다는 58성(城)과 영락 17년에 격파·점령한 6성, 도합 64성의 이름을 비면이라는 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죄다 기록하였다. 이는 영유권에 대한 권리 선언인 동시에 그것을 영원히 보장 받으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기인했다. 낱낱히 기재된 묘지기들의 출신 지역에 관한 기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로 하여금 광개토왕의 능을 영원히 관리하게 함으로써 광개토왕대에 확보한 일부 백제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근거를 거듭 반추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한 「능비문」의 핵심은 전쟁 기사이므로, 고구려 최대의 라이벌인 백제에 대한 전승기념비적인 성격마저 지녔다. 즉 백제 군대에 피살된 광개토왕의 조부(祖父)인 고국원왕의 숙분(宿憤)을 말끔히 씻었음과 더불어, 양국간 정치적 역학관계의 재정립을 노린 정치 선전문이었다. 광개토왕릉비를 세운 동기--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능비는 광개토왕이 세상을 뜬 지 2년 후가 되는 414년에 건립되었다. 고구려 역사상 최초로 왕릉 앞에 그것도 큼지막하면서도 또렷이 글씨가 새겨진 거비(巨碑)의 존재는 확실히 시선을 집중 시킬만 했다. 그런 만큼 여기에는 필시 특별한 사유가 존재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능비를 건립하게 된 목적과 관련해 “이에 비석을 세워 훈적을 명기하노니 후세에 보여라”라는 구절이 상기된다. 여기서 ‘훈적’은 말할 나위 없이 ‘큰 공업(功業)’을 뜻한다. 이는 능비문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절대적 비중을 점한 정복전쟁의 성과를 가리킨다. 「능비문」에 보면 광개토왕을 칭송하는 일대의 업적이 운문(韻文)의 형태로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즉 “은택(恩澤)은 하늘에 미치시어 위엄 있고 씩씩함은 사해에 떨쳤노라. 나쁜 무리들을 쓸어서 제거하시니 뭇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다.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잘 살고 오곡이 잘 영글었도다”라고 노래하였다. 이 구절은 영락이라는 호기 어린 연호처럼 광개토왕의 업적을 잘 집약하고 있다. 이 같은 광개토왕의 위업을 단순히 현창(顯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역사서에 게재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도 전례 없이 비석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장수왕이 전왕인 광개토왕의 죽음으로부터 분열과 붕괴의 위기에 처한 왕국 전체의 재통합과 질서를 호소할 필요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알렉산더대왕 사후 제국이 삽시간에 분열되었던 점과는 달리 광대한 영역이 유지되었던 고구려에서는 영속적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의 창출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능비문」에서는 고구려 왕가(王家)의 출신 계통을 신성화시켰고 광개토왕 뿐 아니라 고구려왕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과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령 건국설화의 많은 부분은 일시적으로 고난에 빠진 적이 있지만 시조왕의 영웅적인 분투로써 군사적인 원정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고 나라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토지를 왕가가 점유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권리를 선언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대한 영역을 가진 현재 왕국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시조인 주몽왕의 고난스러운 이동을 일종의 설화적인 형태로 서술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영원히 기억으로부터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심한 결과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늘[天]과 물[水]이 결합된 구현자로서의 주몽왕은 최후에는 지상계의 통치자인 고구려왕이 된다. 그러한 시조왕의 후손인 고구려왕은 천제로부터 위탁받은 영토를 통치하는 신성한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사실 주몽왕의 도하설화(渡河說話)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그러나 주몽왕은 왕으로서의 초능력을 부여받아 이러한 시련을 통과해서 불사신의 신체(身體)를 획득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일종의 건국자의 능력 증명서가 된다. 그랬기에 주몽왕의 사망을 하늘이 황룡을 보내어 맞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모티브를 채용하여 서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능비의 건립 목적은 천제에 연원을 둔 고구려 왕가의 성덕(聖德)이 광개토왕에게 계승되어 대왕에 의한 성전(聖戰)의 결과 주변 여러 나라와 민족이 대왕의 덕(德)에 귀순(歸順)했음을 선포하기 위한 데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를 세운 동기--평양성 천도와 관련하여 능비의 건립 배경을 평양성 천도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능비가 세워진 414년은 천도 작업이 추진되고 있던 평양성 천도 불과 13년 전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39세를 일기로 타계한 광개토왕의 급서(急逝)는 천도 반대파에게 일종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봉착한 장수왕은 평양성 천도의 불가피성을 밝히기 위해 천도를 추진했던 광개토왕의 권위를 고양(高揚)시킴으로써 그 왕대에 추진한 천도의 유효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능비문」에는 여타 비문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점들이 발견된다. 능비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그러한 능비의 문장은 왕의 계보와 생전의 행적을 수록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능비문」에는 특이하게도 광개토왕의 직계 조상들에 관한 언급이 일체 없다. 이는 일반 능비문이나 묘지명과는 크게 차이 나는 현상이다. 시조왕을 비롯한 3대까지 국왕의 성덕을 서술한 다음 껑충 뛰어 내려와서 그 17세손 광개토왕과 연결시켰다. 고구려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왕실 시조와 광개토왕을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혈통의 신성성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유도하고 있다. 광개토왕을 고국양왕의 아들로서 보다는 시조 주몽왕(추모왕)과 연결 지음으로써, 시조의 후광을 직접 입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점은 「능비문」에서 주몽왕을 ‘황천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광개토왕의 “은택이 황천까지 미쳤다”는 점을 강조한데서도 뒷받침된다. 광개토왕의 권위는 주몽왕과 마찬 가지로 황천과 연결되는 절대성을 지녔음을 선포하고 있다. 다음 단계로서는 ‘황천의 아들’인 주몽왕의 후손이기에 은택이 황천까지 미치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집약적으로 현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구가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잘 살고 오곡이 잘 영글었도다”라는 구절이다. 광개토왕대 전체의 치적을 한 마디로 집약한 이 구절을 낳게 한 수단은 전쟁이었다. 그랬기에 「능비문」은 능 앞에 세워진 국왕의 생애를 수록해 놓은 비석의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유례가 없을 정도로 전쟁 기사 일변도로만 적혀 있다. 광개토왕의 여타 치적에 관한 언급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능비문」에서 밝히고 있는 광개토왕의 치적은 말할 나위 없이 전승(戰勝)이었다. 이 전승은 단순히 승전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에 있지 많은 않았다. 여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능비문」에는 정복전쟁의 총결산으로서 64성과 1,400촌을 점령했음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왕대의 고구려는 더 많은 지역을 점유했었다. 그럼에도 「능비문」의 전과(戰果)는 오로지 백제로부터였다. 백제로부터의 전과만 성 이름까지 낱낱이 기재하였다. 이와 관련해 「능비문」에서 당시 수도인 국내성은 그 존재가 단 1차례도 언급되지 않은 반면, 평양성은 3차례나 언급된 사실이 유의된다. 가령 영락 9년 조에 “왕이 행차하여 평양으로 내려 왔다”라고 하였듯이, 광개토왕이 몸소 평양성까지 내려 왔다. 또 이곳에서 신라 사신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은 보기(步騎) 5만의 대병력을 출병시켰다. 이처럼 고구려가 신라·가야 지역으로의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는데 있어서의 출발 기점(起點)이 평양성이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왜군을 궤멸시켰다. 영락 14년 조에서도 고구려군의 왜구 격파를 가능하게 했던 출발지로서 평양성이 다시금 등장하고 있다. 요컨대 「능비문」에서는 보기 5만의 대병이 출병한 기점이자 왜구를 궤멸시킨 진원지(震源地)로서 평양성이 부각되었다. 이렇듯 평양성은 왜구와 그 배후 세력인 백제를 제압한 승전의 진원지였다. 이 같은 작법(作法)은 장래의 수도인 평양성에 비중을 실어줌으로써 미래의 수도에 대한 긍정적인 연상을 조성시켜준다. 특히 승전의 진원지로서 평양성이 2회나 언급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의 주적(主敵)인 백제와 왜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평양성 천도가 불가결하다는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국가의 중심축인 수도를 남쪽으로 옮김으로써만이 백제와 왜를 효과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북부여나 요서(遼西) 지역으로도 진출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능비문」에 일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능비문」에는 광개토왕이 생전에 “나는 구민(舊民)들이 점점 힘이 모자라게 될 것이 염려된다”라고 말했던 원(原) 고구려 주민인 구민의 열세를 우려하는 교언(敎言)을 빌려 왔다.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광개토왕대에 새로 복속된 신민(新民)인 백제 지역 출신의 신래한예(新來韓穢)를 수용할 것을 지시하면서 남진의 당위성을 밝히고 있다. 비면이라는 제한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330가나 되는 수묘인 연호를 낱낱이 기재하였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수묘제 확립과 관련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넓게 보았을 때는 남방 지역의 비중 증대와 그로 인한 평양성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능비문」의 이면(裏面)에는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은 잘 살고 오곡이 잘 영글었도다”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던 남진의 성공과, 그것의 영속성을 위한 평양성 천도에 대한 합의를 환기시키면서 광개토왕 때 추진된 천도의 이행을 호소하고 있다. 광개토왕릉 앞에 세워진 능비는 형식만 빌었을 뿐 기실 능비는 아니었다. 광개토왕의 탈상(脫喪)을 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능비는 고구려인들을 굽어보면서 ‘광개토왕 시대’를 반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동기획:문화저널, 전북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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