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9.6 |
[환경] 장영란의 자급자족 이야기 - 잠
관리자(2009-06-03 18:59:22)
달게 자는 잠, 그 소중함을 깨치니… ‘자급자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지난 호까지 먹을거리 이야기했다. ‘자급자족’에는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물질이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는 교육이라든가, 철학이 더욱 관심사다. 이런 정신의 문제를 쓰기에 앞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 바로 ‘잠의 자급자족’.   나는 입이 달아 잘 먹는다. 입맛이 없는 때가 거의 없으니 이것도 복이다. 잠도 잘 자는 편인데 완경기를 지나며 가끔 밤잠이 안 올 때가 있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와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혼자 밤 산책을 할 때, 혹은 머릿속이 복잡해 천정에 대고 온갖 계획서를 그릴 때면 잠을 달게 잘 자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고 또 느낀다. 오래전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주에 오기 전 산청에 살 때였다. 민간의학을 하다 현행 의료법에 걸려 피신하고 있던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이 “사람들이 잠을 제대로 잘 줄 몰라요” 잘 줄 모른다? 그때까지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주제였다. 늘 자고 살아오면서 그걸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동양의 선생들이 그렇듯 그이는 어떻게 하면 잘 자는지는 알려주지도 않았고, 나 역시 대놓고 묻지도 못한 채 그저 선문답하듯 그 자리는 끝났다. 그 뒤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 이 집의 안방에서 십년을 넘어 자보면서 가끔 이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알게 된 잠자는 법은 이렇다.   첫째, 방은 어두워야 한다. 우리 집은 옆집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 불을 끄면 다른 불빛이 없다. 보름이면 달빛이 스며들어 집안까지 환하지만 저녁달이 없는 대부분은 깜깜하다. 그 깜깜한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간 듯 잠이 푹 든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짐승도 곡식도 밤에는 깜깜해야 잠을 잘 자서 건강하다. 가로등이 환한 큰 길가에 있는 곡식은 그래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해가 뜨고 지는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사람은 해가 뜰 때 일어나 해와 함께 움직이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을 자게끔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여름에는 일찍 일어나서 늦게까지 움직이고, 겨울에는 늦게 일어나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자연스럽다.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잠에도 철이 있는 거다. 둘째, 깜깜한 것만큼 조용한 것도 중요하다. 밤에 불을 끄면 정말 조용해진다. 전기불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전기와 전자파가 사람이 고요하게 쉬는 걸 얼마나 방해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이 잠자는 방에 전기전자제품을 안 들여놓고, 혹시라도 들여놓게 되면 코드를 뽑는 게 중요하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잠자는 방에는 되도록 가구나 벽걸이를 적게 놓는 게 좋다. 고요한 가운데 포근한 이불이 있는 방. 군더더기 없는 인생이 잠을 달게 잘 자는 비결이라고나 할까.   셋째, 뱃속이 비어야 한다. 잠을 자기 전에 뱃속을 비우고 자면 잠자리가 편안하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 그만두어 우리 식구들 몸의 리듬에 맞춰 먹고 자기 시작한 얼마 뒤 겨울이었다. 저녁이 당기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에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때워보았다. 그러고 나서 몸이 참 가벼워졌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니 아침도 늦다. 또 몸 움직임이 적으니 저녁이 되어도 출출하지 않다. 이때 간단히 먹고 자라는 몸의 가르침이었나 보다. 그 가르침은 지금도 이어져 아침은 되도록 잘 먹고, 저녁은 되도록 간단히 먹는다. 일철에는 뭐라도 먹지만 일이 별로 없는 겨울에는 차 한 잔으로. 이렇게 먹는 습관이 바뀌니 한 가지 곤란한 게 생겼다. 술을 마시면 그 술이 다 깨어야 잠이 오는 게 아닌가. 술을 마시다 보면 안주도 집어먹게 되니 그것도 다 내려가야 하고. 저녁에 술을 마신 날, 아무래도 불면의 밤이 오기 쉽다. 이 벌을 받기 싫어 저녁에 술 마시는 일이 줄어드는 수밖에. 넷째이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낮에 몸을 적당히 놀려주어야 한다. 낮에 너무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도 몸이 괴로워 잠을 잘 못자고, 너무 안 움직여도 못 잔다. 아이들을 보면 낮에 제대로 못 논 날은 저녁에 방방 뛰어 그 날 쓸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걸 본다. 또 하루를 너무 복잡하게 보내면 저녁이 되어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잠이 잘 오지 않는 걸 느낀다. 몸은 적당히 움직여 주고, 삶은 단순하게 가지는 것.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일을 하다 보면 자꾸 욕심이 나 ‘이것만 더, 이것만 더’하기 쉽다. 영화 무인 곽원갑에 보면 모내기를 하다가 바람이 불어오면 허리를 펴고 가슴을 활짝 펴고 바람을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 욕심 때문에 몸도 마음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뱃속만 아니라 맘속도 비워야 단잠을 잘 수 있는 복이 오나 보다. 다섯째, 방안에 공기가 꽉 막혀 있지 않고 어느 정도 흐르는 게 좋다. 어쩌다 도시 아파트에 가서 잠을 자게 되면 꽉 막혀있는 듯 답답하다. 그래서 창을 아주 조금이라도 열어 방에 공기를 흐르게 하고 잔다. 시골 구들방은 그런 점에서 좋다. 발부터 등짝까지는 따끈따끈한데, 어깨에서부터 머리까지는 싸하다. 구들은 방 전체가 고루 더운 보일러 방과 달리 아랫목만 덥기 때문에 웃풍도 있다. 그래서 이불 속 몸은 따뜻한데, 이불 밖으로 나온 머리는 차다. 이 구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어쩌다 보일러 방에서 자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머리가 후덥지근해 잠을 자고 머리가 식지를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보일러 방에서 살기 시작했나? 가만 따져 보니 이십 년 전까지 연탄 구들일망정 구들방에 살았다. 베개는 메밀껍질이나 왕겨를 넣어 머리를 차게 식혀주었다. 그 사이 우리는 보일러에 푹신한 침대와 배게 생활을 하면서 편리해지고 따스해 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급격한 변화가 우리 몸에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까? 알람 소리에 맞춰 억지로 깨어나면 괴롭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존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거다. 잘 자고 해가 창을 비추기 시작하는 기척에 스스로 깨어난다면 하루 시작이 활기차다. 자급자족은 단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장영란/ 산청 간디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지난 98년 무주로 귀농하여 온 가족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다. 자연에서 느낀 생각을 담은 <자연그대로 먹어라>, <자연달력 제철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