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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 |
[내 인생의 멘토] 시인 박태건
관리자(2009-06-03 18:58:32)
길의 풍경이 된 사람, 소설가 김병용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성이란 자신이 죽은 다음 무엇인가를 불멸의 것,   즉 언제나 움직이는 것을 남겨 놓는 것입니다. -윌리엄 포크너, 『파리 리뷰』중에서 운명을 믿는가? 그렇게 된 것은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움직인다. 운명의 바깥으로 길을 내어 그 너머를 꿈꾼다. 이것이 그의 운명이라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슬픔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와 사랑하는 이의 실패에 대해서 괴로워한다. 문학이라는 나무에 목매달고 살게 되면서부터다. 언제나처럼 기다려 주는데 사람들은 인색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서둘러 평가하려고 한다. 실패는 포기한 그 순간이라고 배웠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좀 더 오래 지켜봐줄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밤이 지나면 새벽은 더 이상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었다. 또 다른 견딤의 시작. 삶은 절망, 절망, 그리고 남은 것은 절망이었다. 처음 문학의 길을 알려준 이와 다시 시를 쓰게 되었을 때 일으켜준 이들이 모두 그걸 건너온 선배들이다. 그러니 ‘나를 키워온 것은 팔할이 바람’이란 말은 하지 않겠다. 오직 이 순간, 내게 향일성의 본능을 일깨우는 존재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는 운명을 걷는 자, 무지개를 찾아 떠나는 한 소년이다. 이 글은 존재를 증명하는 불멸의 움직임에 대한 오마쥬다. 소설가 김병용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도 지난 일이다. 작가회의의 일꾼으로서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과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으나, 행사가 끝난 후라든지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통 말이 없었다. 말을 섞지 못했음으로 나는 그를 잘 몰랐다. 그 시절 나에게 말은 존재의 증명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가 내 몸과 마음에 길을 낸 것은 오 년 전이다. 전북문학지도 2권을 쓰기 전에 전북의 산하를 직접 걸어야겠다는 것. 발간의 책임을 맡은 탓에 긴 여행의 동반자로 나는 낙점을 받았다. 사람을 알려면 같이 여행을 가보란 말이 있던가? 산행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코스일수록 그(그녀)를 잘 알게 된다는 말일게다. 그와 같이 걸으며 나는 그의 걸음걸이와 시선과 그가 찍는 사진들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그의 현재는 몇 년 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학위논문을 쓸 때도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다. 얼마 전의 일이다. 강단에서 남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것에 회의가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 일단 담배 한대를 꺼내 물고 ‘태건이 그거 별거 아니야.’라며 씩~하고 웃는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사실 내 고민은 별거 아닌 듯 느껴진다. 인간은 96%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젤린스키에 의하면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와 직접 전북의 산하를 걸어보기로 한 것은 그맘때였을 것이다. 걱정이 걱정을 만드는 시절, 일상에서 사라진 내 불꽃을 찾고 싶었다. 절망에 엎드려 읽지도 쓰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무력감이 밀려왔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불 넣지 않은 방에 누워 저녁 끼 때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웠다. 그때 김병용 형과 길을 걸으며 만난 자연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길 위에서 보잘것 없는 내 몸의 현존을 내려놓고 걸었다. 인간은 누구나 복숭아뼈 아래에 걸어온 길이를 저장하고 있으리라. 그때 걸었던 1,500리길은 자연 속에 저장된 시공간을 체험하는 성령체험이었다. 나는 길가에 쓰러진 가시풀 앞에서 내 삶의 혐오와 수치스러움을 생각할 수 없었다. 용담댐의 건설 후 만난 수몰 직 전의 집 담장에 기대 삶이 고통스럽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덕유산 정상에 핀 나리꽃 군락을 지상의 끝인 듯 걸으며 허무에 대해 더 이상 엄살을 떨 수 없었다. 길은 존재의 무상함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의 유상함을 그려보인다. 길을 걸으며 내 마음의 잎들이 그에게 뻗기 시작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결과다. 식물의 향일성처럼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시 그와 나는 비슷한 고민에 있었다. 그것은 원시적인 에너지, 허무의 공기방울을 펑, 하고 터트릴 시각의 날카로움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옛사람들의 대화에 집중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에게서 상고주의 비슷한 것이 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입을 놀리며 떠오르는 감상을 표현하려는 축이었고 그는 조용히 듣고 기록하는 편이었다. 그의 입은 어지간해서 열리지 않는데 새로운 신상(신상품)에 대해선 열정적으로 변신(?)한다. 김병용 형은 내가 아는 작가 중 최고의 얼리어답터다. 요즘엔 카메라에 푹 빠져 있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필름 카메라까지의 관심이동이 그의 레파토리다. 한 시간 이상이라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가 자청해서 이런 저런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소리의 차이를 물어볼 때나 새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전 카메라의 사진평가를 요청하면 난감할 따름이다. 아무리 봐도 잘 모를 사진들을 곰곰이 살펴보곤 ‘음~ 색감이 중후해 졌어요.’ 라든지 콘트라스(양감)가 훨씬 풍부해졌다고 맞장구를 쳐주면 어린애같이 웃으며 좋아한다. 어쨌거나 그가 하는 행동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다. 기록의 매커니즘에 대해 그는 한 발 앞서 가고 있는 셈이니까. 그러나 1990년도에 소설가가 된 후에 출간한 작품집이 이제 겨우 두 권이다.-이번에 나온 <개는 어떻게 웃는가(2009)>를 포함해서 - 어지간한 과작이다. 그는 언제든,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소설가는 엉덩이로 쓰는 직업이라고 하나, 엉덩이보다 발목이 시큰거리는 병을 먼저 얻었으니 작품집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전북의 동북부 산간지역부터 남서부까지 꼬박 두발로 걸으며 선배문인들이 걸었던 길을 걸어본 일이라든지, 두 딸을 데리고 안데스 산맥일대를 답사했던 열정을 언제쯤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지나갔던 길은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한번은 어청도 등대를 보고 와서 그가 찍은 사진에 매료되어 무작정 떠난 적 있었다. 100년 된 등대를 보기 위해서 왔다고 하자, 비수기여서 무작정 하룻밤을 묵어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비가 오고 파랑이 높아져 다음날에도 배는 오지 않았다. 지갑에 몇 푼 남은 돈으로 라면을 사먹으며 버티길 3일째, 결국 호미를 빌려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 먹으며 하루를 더 견디고 간신히 돌아왔다. - 그해 봄날 부둣가에 앉아 배를 기다리며 마신 소주를 생각하며 한 잔, 나의 무모함을 위해 또 한 잔~, 내 가난한 안주를 빼앗아 먹은 갈매기를 생각하며 또 한잔~ 그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가난해서 외롭지 않다는 걸, 그리고 슬픔이 많아 두려움 또한 없다는 걸. 그는 언제고 떠난다. 나는 숨는다. 그는 길 위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며 ‘지금 여기’까지 왔다. 슬픔이 가득해서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는 길 밖으로 떠나고 나는 길 안으로 숨는다. 내면의 수많은 물음을 걷는 것으로 찾으려는 것일까?  두 해 전 아시아 아프리카의 작가들을 전주로 불러와서 반년 만에 번개불에 콩 볶아 먹듯 행사를 치러낸 일이 있다. 그 아니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결국 해냈다. 모두 힘들 거라고 아직 시기상조라며 말리는 일을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너무 급하게 달려간 것일까? 그 후유증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고 그는 한참 아팠다. 그리고 다시 몸을 추슬러 길을 떠났다. 길 위의 풍경(2009)은 그때 떠난 여행의 기록이다. 연민으로 가득한 그의 눈으로 본 경계의 풍경이다. 그리하여 그의 몸엔 그가 살아온 길을 오롯이 새겨진다. ‘처음 가는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는 여전히 중국 산동성의 기차역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숨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의 길이가 나의 최선을 증명하는 동시에 나의 한계라는 것을 잘 안다”(길 위의 풍경‘서문’ 중에서) 문학이라는 나무에 목매달고 사는 우리는, 바람에 함께 흔들리고 때론 따사로운 햇볕을 함께 쬐며 단란한 외출을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시절을 공유한 이들은 신뢰를 배운다. 그 믿음은 오랜 세월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꿈꾸는 열매, 그는 언제나 곰곰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마치 참나무 가지위에서 새로운 여행을 꿈꾸며 여물어가는 열매가 내가 상상하는 것 보다 크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낙하하듯이. 허공에 그리는 그의 괘적은 그러므로 몸으로 그린 지도다. 소설가 김병용 형은 길의 지도를 그리려 태어난 사람 같다. 대학의 보직을 놓고 난 한 시절, 그는 길 위에 있었다. 나는 믿는다. 어떤 절대적 순간을 공유한 이들은 서로에게 신뢰를 배운다고.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그(혹은 그녀)가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눈짓과 표정으로도 이해하기 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필요한 것일까? 내 인생의 멘토는 나를 키워온 수많은 컨텍스트들에 다름 아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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