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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명장] 옻칠장 이의식 명인
관리자(2009-06-03 18:57:07)
옻칠장 이의식 명인
배고파서 배운 옻칠, 이제는 예술이죠
구술 이의식ㅣ정리 김선경ㅣ사진 유희중
전주 효자동에서 태어났어요. 박물관 옆에요. 거그서 태어났어요. 전주가 고향이에요. 그때는 다들 가난했어요. 우리가 태어났을 때가 그때가 젤로 어려울 때죠. 54년도니까…전부 다 뭐…우리 나이 때는 누구든지 다 어려웠으니까.
우리 때에는 육이오 전쟁 끝나고 그때가 보릿고개잖아요? 저뿐만이 아니고 온 세상이 다 어려운 시기죠. 먹고 살기 전부다 힘들고 그런 땐데..그러다 보니까 인자 그 뭐 동생들도 많이 있고 하니까…우리가 3남2녀 5형제였었는데 내가 그 중 장남이었어요.
그니까 뭐 먹고 살기 위해서 어린 동생들도 있고 아버님이 또 사업에 실패하시는 바람에…그때 당시 채소랄지 과일이랄지 이런 거 유통업을 하셨는데…그러다가 아프시고…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제가 기술이라도 배워야죠. 인자 그때부터 기술을 배워서 생활전선에 나선 것이죠.
그때가 한 열 여섯이나 됐을 거예요 아마. 중학교 저기하다가 말았으니까. 그래가지고 이거를 동네에 아는 형들이 가구점에를 다녔었어요. 선배 형들이. 그래서 같이 다니다가 이 기술을 배운 것이죠. 그때는 가구점에서 이런 기술을 배웠었어요. 가구점에 직원들이 많았는데 저는 인자 들어가서 ‘시다바리’를 했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하고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몇 년 하다보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이렇게 배워서는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죠.
[걸어온 길] 이의식 장인
1954년 전주시 효자동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1969년 중학교를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옻칠을 배우기 시작
1972년 본격적으로 옻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
최환창, 백선원, 홍순태 선생 등에게 사사
1978년 서울에서 <행촌칠예공방>을 차리고 작품활동 시작, 공모전 출품
1986년 한국전통공예 특별전(윤보선 전대통령 자택)
1990년 대한민국 공예품 경진대회 장관상 수상
1993년 일본 국제디자인전 은상 수상
1993년 전통공예특별대전(전북예술회관)
1994년 한중 칠예 교류전
1998년 무형문화재 제13호 옻칠장 지정
1999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1999년 전라북도 도지사 표창
2006년 제1회 개인전(전주공예품전시관)
2007년 (사)정부조달 문화상품협회 회장
2009년 현재 전주시 덕진동 행촌칠예공방에서 작품활동에 전념
옻칠기술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다
서울하고 지방하고는 틀리니까…지방에서는 체계적인 것도 없고 어깨너머로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저거 하라면 저거 하고 눈치로 배우니까. 월급이라고 받아봐야 차비도 안 됐어요.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녔으니까. 박물관 근처가 저희 집이었는데 거그서 전주시내까지 걸어 다녔어요. 도시락 하나 들고 전주 중앙가구점이라고 있었어요. 거그까지 걸어 다녔죠.
그러다가 인자 잘 배워봐야겠다, 좋은 선생님 밑에서 제대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울에 가서 선생님들을 찾아갔죠. 그때 당시만 해도 옻칠 허는 데가 많이 있었어요. 아는 분들도 많이 있고 해서. 제가 좀 소질이 있었던지, 재주가 아깝다고 서울로 와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서울로 가야 빨리 크기도 하고 좋은 선생님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죠.
그렇지만 옻칠을 제대로 허는 데는 그리 많지 않았어요. 일반적인 상품으로 파는 옻칠허는 데는 많이 있었지만-전주에도 약 백여 군데가 있었으니까-서울도 마찬가지로 많이 있었기는 하지만, 작품으로 허는 데는 많지 않았죠. 장인들이 분류를 허기를, 여기는 시장 물건만 하는 곳이다, 여기는 좀 고급스러운 물건을 하는 곳이다. 여기는 작품 쪽으로 하는 곳이다, 해서 이렇게 세 가지로 옻칠을 분류를 했죠. 작품으로 하는 데가 있고 고급으로 허는 데가 있고 상품으로 허는 데가 있고… 상품은 일반 저렴한 시장에다 갖다 내는 것이고, 고급은 인자 서울로 말하자면 충무로 인사동 이쪽으로 내놓는 것이고, 작품은 그래도 백화점이랄지 고급 갤러리 같은 데 납품을 하고 그랬죠. 그때 당시만 해도 그랬어요.
그때 내가 서울로 갔을 때가 70년도, 80년도니까 경기가 굉장히 잘 될 때에요. 이런 공예가 뭐 없어서는 못 팔 때였어요. 가구가 됐든 작품이 됐든 간에. 굉장히 그때는 좋았죠. 저 같은 경우는 좋은 선생님을 잘 만났죠. 최환창 선생님이라고. 배호진 선생님은 작고하셨는데 그 분 밑에서 배우신 분인데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거든요. 그 분이랑 어느 정도 같이 하다가 그 선생님이 “아 인자 독립해도 되겠다” 하시면서 어디 가서 책임자나 공장장으로 일해도 되겠다 하셔서 독립을 하게 됐죠.
제가 서울로 올라갔을 때가 스무 살도 못 됐을 때였는데, 스물네 살에 독립을 했어요. 뭐 제가 최환창 선생님 밑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조금씩은 다 있어봤죠. 한 군데만 있다 보면 그것빼끼 못 배우니까. 그래서 인자 다른 데 가서 좀 보고 오고 몇 달 있어보고 또 저그 가서 몇 달 있어보고… 유명하신 분들만 찾아다니면서 그렇게 배웠죠. 백선원 선생님이랄지 홍순태 선생님이랄지, 그런 분들한테 찾아다니면서 배우기도 하고 또 거그 가서 몇 달씩 있어보기도 하고 그랬죠. 근데 다 비슷비슷하긴 해요.
스물네 살에 공방을 차리다
근데 그때 당시 저는 작품에만 미쳐 가지고 돈 벌 생각을 별로 못했어요. 제가 그때 책임자로 올라서니까 월급도 많이 받았어요. 아무래도 서울이 인건비가 좀 쎄니까. 그래서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인자 작품만 주로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래가지고 인자 공방을 차리게 됐어요.
그라꼬 인자 공방을 차려서 스물다섯에 결혼을 했어요. 돈을 벌기로 했으면 그때 많이 벌었는데 그냥 좀 주문 들어오는 것이나 해주고 그 다음에는 내 작품만 했죠. 그때 당시는 일일이 다 손으로 했기 때문에 많은 양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작품만 하다 보니까 있는 돈 다 까먹고 사정이 어렵게 됐어요.
제가 나이에 비해서 작품활동을 굉장히 빨리 시작했어요. 78년도부터 공모전 출품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다가 우리 딸 낳고 생활이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서울 공방을 접고 경기도 파주로(지금 금천인데) 이사를 가게 돼요. 작품만 하다 보니까 누가 그 작품을 사가겠어요? 그래가지고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됐죠. 그래서 직원들 월급 때문에 도저히 안 돼가지고 이것저것 처분을 하고, 어차피 그때는 망한 상태니까 직원들 월급은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때 당시 500만원 선금을 받고 물건을 해주기로 하고 직원들 일린 임금을 싹 정리했죠. 그리고 파주 들어가서 세를 들어서 사는 거예요.
그때가 우리 딸내미 ‘돌’ 때네요.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돌 때 돌잔치도 못 해주고… 참 어려웠죠. 그렇게 몇 달 해보니까 도저히 못 하겠는 거예요. 작품을 허고 싶어가지고. 그것만 머릿속에 자꾸 맴돌고 뒤숭숭해지는 거예요. 그래갖고 또 인자 집에 어머니한테 좀 돌래고 우리 애기 반지 목걸이 싹 다 팔아가지고 빚 갚고 옆에다 공방 하나를 차렸죠. 집안에서 반대도 심했지만 내가 워낙 확고하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니까 못 말렸죠.
근데 거그에서 하다가 보니 인자 도저히 작품만 해가지고는 못 살겠는 거예요. 그러다가는 빌어먹고 살기 딱 알맞어요. 빚이 또 계속 불어나고… 그때 당시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돈을 안 빌려주면 좋은데, 자꾸 막 빌려주는 거예요. 오백만원도 빌려주고 천만원도 빌려주고…막 그러는 거예요. 안 빌려주면 돈이 없어서라도 월급생활 허든지 그랬을 텐데. 주위에서 막 돈을 빌려주니까 그것이 차곡차곡 쌓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금방 몇 천만원 돼버린 거예요. 그때 당시 몇 천만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에요. 그때 당시 불광동에 집 한 채를 오백만원이면 샀어요. 근데 집 몇 채 값을 빚으로 진 거예요.
인자 그래도 빌려주는 분들이 돈 달라 뭣이 어찐다 이렇게 재촉을 헌다든가 허지는 않아서 버티기는 했는데(물론 제가 이자 일 원 한 푼도 안 띠어 먹었어요. 나중에 다 계산해갖고 돈 벌어서 줬지만… 그 분들도 언젠가는 성공헐 줄 알고 믿음이 있으니까 빌려줬다고 하더라고요.) 주위에서 세무서에다 신고를 해쌓고, 일을 조금 많이 허면 신고를 허고 그래요. 배가 아퍼가지고. 그러면 인자 세무조사 받고 그러다가 지쳤어요. 그래서 인자 작품 활동을 싹 접었어요. 지금부터 인자 돈만 벌자! 결심을 했죠. 그럴 수배끼 없는 것이, 인자 어디 갈 데가 없으니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빚쟁이들도 자꾸 돈 달라고 전화를 해쌓고… 빚이 너무 오래 가니까 게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믿고 계속 기달려 주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쪼금 빌려준 사람은 계속 전화를 해대는 거예요. 몇 천만원 빌려준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그러다가 다른 디로 이사를 하는데 빚쟁이들은 이사도 못 허게 해요. 그래서 신고를 허고 이사를 해요. 내가 지금 이사를 하는데 2년 안에 꼭 갚겠다… 무슨 짓을 허든지간에 갚을 테니까 믿어 줄라냐고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인자 지금부터 돈을 좀 벌어야겠다, 작심을 했죠. 나 때문에 우리 마누라 고생혀, 하나배끼 없는 딸 옷 하나도 제대로 못 사 입혀… 그러니까 이게 아주 미치는 거예요. 돌아버려 그냥. 사람이 어떻게 헐 수가 없더라고요.
죽기 아니면 살기, 50만원 들고 일본으로 가다
그라꼬 여동생헌테 전화를 해서 “야 너 월급 좀 주라” 그렇게 해서 50만원 받아서 제가 명함을 팠어요. 명함을 파가지고 일본을 들어갔어요. 가족들한테는 좀 기다리라고 허고 일본으로 갔죠. 일본에 가서 어떻게든 승부를 내고 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죠.
제가 그렇게까지 했을 때는 진짜… 지금이니까 말이라도 이렇게 하지, 그때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죠. 어차피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으니까, 한번은 승부수를 던져보자, 그래서 인자 일본으로 간 거죠.
왕복 비행기표 끊고 50만원 들고 명함을 파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인자 이건 뭐 앞이 캄캄하지. 말도 통하지 않지, 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죠 정말로. 그래가지고 일단 중요한 말은 일본말로 적어가서 물어봤는데 다행히 일본사람들이 친절해가지고 잘 가르쳐 주더라고요.
호텔은 언감생심이고, 공원 같은 데서 잤어요. 첫날만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부터는 밥은 라면이나 우동 한 그릇 먹고 잠은 우에노 공원 같은 데서 자고 세수는 화장실에 가서 하고 가방 딱 들고 인자 백화점 같은 데를 찾아갔죠.
그런데 가봤자 말도 통하지 않지, 그냥 덜렁 명함 한 장만 줬는데 그래도 명함을 보면 다 알지. 옻칠공예 허는 사람이다고 씌어있으니까-그거 명함 한 장을 보관해 둘 걸 잘못 했어-그놈을 갖다가 주면 그 사람들이 바로 알더라고. 아, 그러시냐고, 식사나 하러 가시자고, 그러면서 밥도 사주고 근다고. 그렇게 한 끼를 꽁짜로 때우기도 허고… 게중에 어떤 관심 있는 분들은 통역허는 사람을 자기가 불러요. 그래서 같이 얘기도 허고… 내 얘기를 허면 정말 대단하다고 해요 나보고. 내가 자초지종을 싹 얘기허면 막 감탄을 해요. 그러면 내가 말을 해요. 한국에 오면 꼭 연락을 해달라. 이 전화번호로 연락을 주며는 내가 꼭 맞이하겠다고, 그렇게.
그래서 내가 15일짜리 비행기표를 끊어갖고 갔는데 13일 만에 돌아왔어요. 아무 것도 모르고 간 거지만 어떻게 보면 세계시장을 개척해 보자는 의도였죠. 그때만 해도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나올 때예요. 한국에 와서 옻칠을 많이 사갈 때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일본사람들 잡아봤자 어차피 한국사람들끼리 경쟁이니까 안 될 것 같았어요. 내가 100원 부르면 저그서 60원, 50원 불러버리니까. 그래서 안 될 것 같아서 일본에 직접 들어가서 일본에서 바이어를 직접 끌고 나오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못할 것이다 생각한 거죠. 내가 개척을 해서 끌고 온 거니까 누가 터치를 못 하죠. 그래서 일본에 간 거예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는 의도에서.
물론 제가 어느 정도는 정보가 있었어요. 일본 어느 시장 어느 쪽으로 가면 무슨 가게가 있다더라, 와세다 대학교 앞에 뭔 가게가 있다더라, 그 정도는 알고 찾아가서 명함을 뿌렸죠. 근데 인자 정말로 돈이 떨어져서 빨리 나와야 되게 생겼어요. 달랑 비행기표 한 장밖에 없고 가방 하나 쪼그만 거 들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도쿄타워는 한번 가보자, 해서 도쿄타워에 갔어요. 거그서 동전을 넣고 망원경을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 집집마다 내가 천 엔씩만 벌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도쿄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그래가지고 한국으로 나왔는데, 공항에 딱 도착을 하니까 집에 갈 차비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 해서 집으로 갔죠.
일본 바이어한테 인정받기까지 걸린 시간, 1년!
그랬더니 딱 세 사람이 한국으로 와서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세 사람의 바이어한테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근데 일본 사람들이 금방 우리처럼 딱딱 뭘 허지를 않아요 절대. 첨에 하나 샘플 주면서 이렇게 한번 만들어봐라, 그러고. 또 이 사람이 하나 주면서 샘플대로 만들어봐라 그러고. 또 이 사람이 그러고. 자기가 15일 있다가 올 테니 만들어놓으라고 그러죠. 그러면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그 사람들 마음에 안 들어요 요것이. 눈에 안 차는 거야. 그래도 그 사람들은 샘플값은 또 정확하게 줘요. 그러고 또 샘플을 주고 시키고 가요. 그러면 좀 마음에 들어. 그러면 또 조금 주고 가. 그니까 그거가 딱 일 년이 걸렸어요. 나는 미치는 거예요. 돈은 없지 애기는 키워야지 여그저그서 돈은 달라고 허지… 그래서 제가 집에서 잠을 못 잤어요.
말이 그렇지 그 어려운데 일 년 동안 고생한다고 생각해 봐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본까지 간 건데 거그서 또 일 년을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해 봐요. 아주 미치죠. 물론 여기저기서 조금씩 일이 들어오기는 해도 그 사람들은 또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가요. 그러면 내가 쌀이 떨어졌으니 쌀값이라도 좀 달라고 허면 자기 집 쌀을 갖다 줘요 돈 대신. 나는 돈이 필요헌데… 차암… 그렇게 한 일 년 정도 하니까 인자 일본 사람들이 주문을 주기 시작해요 조금씩. 그 동안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테스트를 했겠어요? 여그저그 돈도 흘려보고 별 짓을 다해요. 빳빳한 만 원짜리 새 돈을 일부러 흘려놔요. 내가 뭐 그 돈을 주워다가 어떻게 허는가… 진짜 막… 그 사람들은 이 작품보다 사람 됨됨이를 먼저 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양심도 테스트하고 진짜 치밀해요. 그렇게 일 년도 더 고생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인자 막 주문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믿을 만하다 싶으니까 이 사람이 몇 개 주고 이 사람이 몇 개 주고… 가격은 정말 비싸게 받았어요. 그 사람들은 가격은 상관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딱 딱 줘요. 나중에는 세 사람씩 거래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세 사람한테 동업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 사람들이 동업을 하게 돼요. 내가 아홉 개를 만들면 셋이서 세 개씩 가져가요. 그 사람은 아주 정확해요. 나는 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훨씬 편해졌죠.
그런 상태가 한 1, 2년 더 흘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 집을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내가 돈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이 셋이서 돈을 가지고 와갖고 그때 빚을 싸악 갚어줘요, 전부 다. 그리고 운영비까지 딱 주고. 아무 조건도 없이. 앞으로 얼마씩 까자는 거죠. 일단 내 빚을 모두 갚아주고 월에 얼마씩. 그래야 내가 자기들 일에 전념해 줄 수 있으니까. 내가 빚 생각 때문에 일을 못 하니까 그 사람들 눈에도 그게 보이죠. 그때 빚이 근 7, 8천만 원 됐을 거예요 아마. 그걸 그 사람들이 싹 갚아주는 거예요.
고향이 좋아서 전주로 내려오다
그렇게 몇 년 쭉 해오다가 내가 인자 전주로 왔죠. 거그 좀 더 있었으면 진짜 돈 많이 벌었을 거예요. 경기도 도지사님이란 군수님이랑… 당시 김용래 도지사님이 저희집에도 오고 그랬죠. 우리 물건이 많이 나가고 수출도 많이 되니까. 우수공예인으로 도지정업체로 정해서 월 80만원씩 지원금도 나오고 그랬어요.
근데 그때 당시만 해도 제가 돈 욕심이 없었어요 솔직헌 얘기가. 그때 군수님이랑 지사님이랑 오셔서 장어 먹으면서 “군유지가 있으면 공방을 지어 주라”고 지시까지 했는데 그런 얘기가 막 오고가고 할 때 내가 전주로 이사를 와버렸어요. 그때 계속 거기 있었으면 엄청난 갑부가 됐었을 텐데, 아무리 살아도 우리 고향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한테 정이 안 가더라고요. 사람도 사귀기도 싫고… 전주로 이사 온다고 하니까 군수님이랑 막 못 가게 허고 이사하지 말라고 뭐가 필요하냐고 해달란 대로 다 해준다고 막 그랬는데 그걸 뿌리치고 전주로 온 거예요.
근데 그때 약속이 돼 있었어요. 전주에다 일본 사람들허고 일본 본사를 새로 지어서 전주에다 두고 자기가 동경지사, 요코하마 지사를 내서 이런 옻칠 공방을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어요. 그라꼬 건물 짓고 이런 것은 자기네들이 전부 다 투자를 하고 우리는 그냥 물건을 만들기만 하기로 약속을 다 했었는데, 그게 안 됐어요. 그게 이루어졌으면 좋았는데… 무슨 사건이 일어났냐면 일본에서 독가스 사건이 일어났어요. 지하철에서 사람이 죽고 그래서 엄청난 파장이 생기고 경기가 팍 다운이 돼버리는 거예요. 일본은 이만큼 작은 일에도 경기가 싹 얼어붙고 절대 지갑을 안 열어요. 그러자 그게 좀 잠잠해질 만하니까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거예요.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니까 경기가 그때부터 바닥을 친 거예요. 그러니 인제 못 하지요. 이미 나는 전주에 내려와 있는 상태고… 월 80만원씩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내려왔는데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고베 지진만 안 났어도 그럭저럭 괜찮았을 텐데… 전주에 내려와서 직원들은 많지 돈은 안 들어오지… 그 동안 벌어놨던 것들이 인자 조금씩 조금씩 다 없어진 거지.
근데 일본에 수출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어요. 이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85년도에 일본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어요. 체계적으로 옻칠기법을 배워보고 싶어서. 물론 그 안에도 자주 왔다갔다 했지만 본격적으로 공부하러 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죠. 그래서 일본 칠예학원을 다니면서 한 5년간 배웠어요. 그렇게 배워갖고 하니까 10원 받았던 것을 100원 받을 수 있게 됐죠. 체계적으로 배워갖고 하니까. 그림, 디자인, 이런 저런 것들을 다 거기서 배웠어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잘 헌다고 하더라고요. 그때에는 여유가 있어서 학원비 내고 다니면서 다 배웠죠. 잠도 호텔에서 자기도 하고…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죠.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일본 경기가 안 좋아지니까 전주에서 썩 좋지가 못했죠. 그 분들은 인자 다 작고하셨어요. 그분들 자식들이 대를 이어서 하기는 하는데 그 사람들하고는 다르더라고요. 아버지들보다 더 빡빡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전주에서 하고 있어요.
전주에 처음에 내려왔을 때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힘들어지면 또 벌면 되니까… 또 지금부터 벌라고 하고 있어요(웃음). 그러다가 돈 좀 벌리면 또 작품할 생각만 허고… 근데 벌라고 맘만 먹으면 벌 수는 있어요. 지금은 작품 쪽으로 문화상품도 많이 개발해놨고 하니까 작품 쪽으로 매진해서 개인전 전시회도 많이 가질라고 마음먹고 있어요.
지난번에도 전시회 하기는 했는데 그 작품을 팔라고 하면 마음이 좀 이상해져요. 팔릴 만한 작품도 만들고, 이건 오직 작품으로만 남겨놔야겠다, 그런 작품도 만들고 그럴 생각이에요. 앞으로 서너 번은 더 전시회를 열고 싶어요. 지난 번 전시회에서는 제법 많이 팔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작품을 잘 못 팔아요. 뭐 돈 많은 사람을 알기를 혀, 빽 있는 사람을 알기를 혀… 그냥 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사는 거지. 글고 꼭 돈 많다고 작품 사가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돈이 없어도 작품이 맘에 들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제가 보기에는 절대 돈 많다고 사가는 건 아니에요.
올해 가을이나 내년 봄쯤에 일본 동경에서 전시회를 가질 생각이에요. 거그 맞춰서 작품도 만들어야 되고… 돈을 쫓아가면 사람이 좀 비굴해지더라고요. 물론 세상 살아갈라면 필요한 돈이 있겠지마는, 그래도 너무나 그쪽으로만 돈돈돈 하고 댕기면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애요. 누구한테 손 벌리지 않을 만큼만 내가 열심히 해서 벌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야 할 수 있죠. 지금도 주문도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경기도에 살았으면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모르겠지만 전주에 내려온 것을 후회는 안 해요.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 우리 고향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나이가 나이인만큼. 원래 제가 옻칠 중에서도 ‘칠화’가 전공이에요. 그걸 살려서 한바탕 작품을 또 해야죠. 그동안 해찰을 좀 했으니까 마무리를 해야죠. 계획은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작품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아요. 지금 작품 안 하면 못하는 거예요 인자. 육십 넘어서 눈도 어두워지고 손 떨리면 옻칠은 못해요. 그런 거 저런 거 생각하면 지금 작품을 안 남기면 영원히 못 남긴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65살까지는 괜찮다는 말도 합디다만 지금 안 하면 못 한다고 봐야죠. 옻칠에서 56살이면 노인네요. 나이 먹어서는 취미로나 할까 작품은 못해요. 작품한다는 것은 마음뿐이지 실제로는 못해요. 실제로 제가 봐도 연세 드신 분들은 직접 하는 것 없어요. 밑에 제자들이 허는 거지. 그건 그 분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나는 그런 거 싫더라고요. 내 작품을 남겨야지. 내가 죽고 나서도 ‘아 이건 누구 작품이다’ 이렇게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자기세계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거죠.
외국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칭친하는 게, 모든 기법이 다 들어가게 작품을 하는 사람이 일본에는 정말 드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참 대단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요. 칠기 기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나전, 칠화, 건칠, 칠그림기법, 칠가루기법…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기법들이 다 들어가 있으니까 놀래는 거죠. 제 작품은 미술시장에도 많이 들어갔어요. 일본 경매시장에도 많이 나갔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좋은 작품 만들고 좋은 작품 남기는 게 제 욕심이에요. 그때 일본 바이어들이 그랬어요. 당신은 꼭 무형문화재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작품가격 높게 받지 말아라,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했는데, 정말 그 사람들 말대로 됐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다 돌아가셔버렸네요. 사람 참 좋은 분들이었는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