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9.6 |
아줌마, 영화에 빠지다
관리자(2009-06-03 18:56:05)
아줌마, 영화에 빠지다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와 더불어 7박8일-    장춘실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이러저런 축제가 포화 상태라 심드렁하게 보낸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겐 다시없는 기회였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그 특별하고 매혹적인 잔치를 장장 여드레나 누렸으니 전주국제영화제에 고마울 따름이다. 아! 행복하다. 정말이지 속이 다 후련하다. 아니 미련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아직 폐막작 <마찬>의 영상이 아른거리고 여전히 열기가 들썩이던 영화의 거리가 그립긴 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제에선 볼만큼 보고 놀만큼 놀아서 안타까움이 남지 않았다. 얼마나 잘 놀았기에 포만감이 한 달이나 가는지 궁금하다면 “아줌마 여드레 동안 영화와 놀다”를 들여다보자. 가이드북 정복, 예매 완료 올해도 어김없이 영화제 3주 전에 가이드북이 도착했다. 가이드북의 세련된 디자인과 붉은색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우선 처음부터 끝까지 가이드북을 훑어본다. 행여 영화의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형광펜과 색연필을 이용해 밑줄을 긋고 별도 그려놓는다. 이것은 영화 전문 프로그래머들이 선별한 세계 42개국 200여 편의 작품들 중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내는 참말 어려운 작업이다. 영화의 시놉시스 몇 줄에 낚여 영화 보는 내내 하품만 나오는 프로그램을 찍으면 꽝이 된다. 영화 프로그램은 많아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총 35회 정도라 꽝을 찍는 불상사를 면하려면 열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제 홈피에도 들어가 보고,    <씨네 21>도 읽어보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마다 들락거렸다. 2박 3일에 걸쳐 가이드북을 정복한 후 나름의 원칙을 세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젊은 감독들의 실험적인 영화와 거장들의 회고작 그리고 인간을 탐구한 완성도 높은 작품들로 일정표를 만든다. 이제 정확히 원하는 영화를 찍는 일만 남았다. 아참! 10주년 기념 상영작도 빠뜨릴 수 없다. 드디어 예매 첫 날. 총망중에 낭패 볼까 아침부터 현관에 메모지를 붙여두는 등 요란을 떨다가 지프 서비스센터로 시간에 맞춰 직행했다. 인터넷 예매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날고 뛰는 젊은이들을 당할 수가 없어 인터넷 예매를 포기한 아날로그 아줌마는 카드를 내밀었다. 4월 16일 2시. 예매담당 청년 땀 좀 흘렸다. 요일별 영화 제목과 시간, 장소는 물론 좌석까지 확인하고 조정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지프 서포터즈라 10% 할인, 한번에 2장씩 33번 긁는데 딱 1시간이 걸렸다. 두툼한 티켓 봉투를 받아드니 가슴이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이번엔 제대로 영화제에 빠져볼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해마다 원했던 영화를 다 볼 수 없어 아쉽고, 안타깝고, 부족감을 느꼈었다. 이제 직장에서 퇴직도 했고 시어른 제사도 모셨으니 밀린 소원을 풀어 볼 참이다. ‘불면의 밤’은 체력이 딸려 단념했다. 영화를 섹션 별로 제법 잘 골랐다 싶었는데 매진으로 표를 구하지 못한 게 5편이나 된다. 분명 일반 예매 때 첫 번째로 입장했는데도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인기 폭발로 티켓 매진이라니… 영화제를 위해서 기뻐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영화제 백배 즐기기 사실 이 아줌마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좀 심한 편이다. 살림살이에는 앓는 소리와 직무유기를 일삼지만 영화의 거리에 등장할 땐 기운이 팔팔해진다. 어린 시절 동네 타작마당에서 원조 꽃미남 신성일이 출연한 <맨발의 청춘>을 본 뒤 영화라면 번쩍한다.  거기에 이리여중 강당에서 중고생 합동으로 본 <로마제국의 멸망>과 <노틀담의 꼽추>는 촌뜨기 소녀의 감성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리 시공관’에서 로저 무어가 열연한 <기적>을 세 번 보고는 영화라는 마약에 중독되었다. 고 3 예비고사 직전까지 숱하게 도둑 영화보기-걸리면 일주일 근신이나 삼일동안 단기 정학을 당함-를 감행했다. 이런 영화광이  내 집 안마당에서 하는 전주국제영화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직무유기라고 생각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묻곤 한다. 영화의 거리는 젊은이들 판이고, 전주국제영화제 영화는 특히 심심하고 어렵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색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대답은 No. 고백컨대 영화의 거리에 들어서면 가슴부터 설렌다. 기분이 좋아지고 내 집처럼 자유롭고 숨쉬기도 편안하다. 영화제 기간에는 발이 둥둥 떠다닌다. 만사를 다 잊고 영화제가 끌어다주는 ‘자유, 독립, 소통’의 기운을 흠씬 마셔본다. 그런데 너 혼자 66장 다 썼냐고? 물론 아니다. 내가 제일 많이 쓰고 가족과 친구, 지인들과 나눈다. 빈 주머니를 걱정하는 이도 많다. 그러나 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받기도 한다. 친구들은 작품선정과 예매하느라 고생한 공로를 인정해 표 값을 내민다. 요번엔 특히 받은 게 많다. 지아니 디 그레고리오 감독이 주연까지 한 <페라고스토 런치>는 매진사태로 표를 구하지 못했는데 아는 이에게 표를 얻었다. 또한 아르헨티나 여감독이 연출한 <비>의 티켓도 얻었다. <광기와 욕망의 밤> 그리고 거의 포기상태였던 폐막작 선물은 더욱 고마웠다. 그렇다! 축제란 이런 것이다. 나만 즐기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기고 나누는 것이다. 만나서 기쁘고 서로 주고받으며 더욱 가까워진다. 게다가 밥도 함께 먹고 차도 마신다. 제 나이를 잊은 아줌마들이 길에서 꽈배기를 먹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들뜬 목소리로 영화감상의 감흥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제는 집에 사람도 불러들인다. 딸애가 제 친구를 데려와서 2박 3일 동안 손님 접대를 했다. 딸애는 전주가 처음이란 서울내기한테 영화를 보여주랴, 콩나물국밥을 먹이랴, 비빔밥 자랑하랴 몹시 바빴다. 이런 와중에 느닷없이 지금가면 영화를 볼 수 있냐는 먼 곳에 사는 친구의 전화를 받는 등 여러 건이 터졌지만 영화제 기간 최고의 이벤트는 ‘아욱국 사건’이다. 예매 때 못 구한 표는 당일 새벽부터 줄서서 기다려야 간신히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 이 아줌마 진짜 급했다. 그런데, 주말여행 길에 하룻밤 재워달라며 들이닥친 여동생 일행이  이 급한 마당에 아침밥까지 잡수고 가는 실력을 행사했다. 침(寢)만에서 식(食)까지로 변한 이 손님들 때문에 속 탄 사연인즉 남성 두 분이 마침 텃밭의 아욱을 보고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진 탓이다. 영화에 미친 주인댁이 밖으로 나도는 동안 푸성귀들은 저 혼자 때맞춰 무성해져 있던 것이다. 서둘러 끓여낸 아욱국에 누룽지로 아침을 대접받은 이 손님들은 후에 화답을 주었다. 갑자기 폐를 끼치게 돼 염치가 없었던 동생이 돌아가면서 그랬단다. 울 언니가 저래 뵈도 무척 바쁜 사람이고 일도 많은 이라고. 영화는 보러만 다니지만 미술관은 후원도 한다고. 어찌 해석하셨는지 이 점잖은 손님이 실제 미술관에 후원금을 보내왔다. 평생 못 잊을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이다. 언감생심 내 생전에 어찌 아욱국 한 그릇에 십만 원을 받는 일이 다시 생길 것인가 말이다. 선택과 집중 영화제 영화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영화제가 끝나고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보물을 놓친 것처럼 안타까움이 남는다. 화제작, 문제작, 실험작…그리고 진짜 재밌었다는 내용 등등. 같은 판에서 왜 나만 놓쳤을까 하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이번에 본 영화들은 대체로 좋았다. 개막작 <숏!숏!숏! 2009>로 시작해 스리랑카 영화 3편, 국제경쟁부분 4편, 시네마 스케이프 3편, 영화궁전 2편, 페레 포르타베야특별전 2편, 십 주년 기념상영작 6편, 영화보다 낯선 2편,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회고작 4편 그리고 폐막작 <마찬>까지 총 28편을 보았다. 개막작은 좀 약하다고 느꼈다.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깔아준 자리인데 기존의 영화 미학을 확 뒤집어버리는 패기나 실험정신이 부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지만 10주년을 기념하여 10명의 감독이 나름의 작업을 선보였음은 주목할 일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아니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들이 한국영화의 미래를 담당할 주역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담당하는 것은 자신만의 철학을 영화예술로 보여주는 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영화는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 지난 5년간 쿠바, 아프리카, 소비에트 연방, 터키, 중앙아시아 등 비서구 지역의 영화를 소개해온 영화제가 마련한 특별전인데 같은 아시아에 속하지만 이들의 영화는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적갈등과 삶이란 보편적인 주제가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영화제 영화가 재미나 즐거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형식과 내용에서 파격적인 작품들이 많아 훈련이 안 된 이는 졸거나 중간에 더러 포기하고 나간다. 또한 상영시간이 상상을 초월한다. 올해도 ‘영화보다 낯선 단편2’에서 장 뤽 고다르의 2008년 작 <파국>은 단 1분짜리였다. 물론 여러 단편과 함께 묶여 상영되기 때문에 들어가자마자 1분 만에 나오는 건 아니지만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사라진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중국의 왕빙이 찍은 <철서구>는 3부작이지만 한번 들어가면 9시간 20분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영화제가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을까? 결국 영화는 철저히 감독의 작품이고, 감독은 창조적인 예술가임을 영화제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에 본 28편의 영화중 가장 맘에 들었던 건 폴란드의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회고작들이다. 그를 주인공 삼은 다큐부터 <부전승>과 <딥앤드>, <문라이팅>, <안나와의 나흘밤>을 보았다. 철학을 공부하고, 시를 쓰며 화가로도 명성을 얻은 그가 조국 폴란드에서 쫓겨나 이국땅을 떠돌다 미국에 정착한 지 17년 만에 만들었다는 <안나와의 나흘밤>은 거장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이라 생각된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주인공의 완벽한 연기는 영화 초반의 스릴러 분위기를 끝까지 끌고 가면서도 인간 심연의 본능을 정확히 포착한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젊은 날을 볼 수 있었던 <문라이팅>도 참 깔끔했다. 장춘실/ 34년간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지난해 명퇴. 지금은 책 읽고 영화보며 도립미술관 후원회 일을 돕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