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 |
[서평]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관리자(2009-05-08 14:18:13)
발가락 간지르는 옛길의 아름다움
윤영래 편집장
5분 거리만 나서려 해도 자동차열쇠를 찾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걷기는 생활이 아니라 이제 부러 하는 운동이 됐다. 하루 만보걷기를 위해 만보기를 허리에 찬다던지 헬스클럽을 찾아 기계에 의존해서 걷기도 하는 시대. 도시라는 공간에서 걷기는 이제 일상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전주는 삼천과 전주천변이 잘 정리되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어볼 수 있는 도시다. 때 이른 무더위가 복병이지만 한낮 더위를 피한다면 군데군데 피어있는 봄꽃들을 감상하면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주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나름 아기자기한 작은 길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선 아중지구도 기린초등학교부터 중앙여고를 지나 아중저수지까지 이어지는 곳에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
지금은 신시가지가 되어버린 서곡지구도 학창시절 소풍을 가던 주요 코스였지만 아파트 군단이 들어서면서 옛길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전북대에서 동물원까지 이어지는 길도 가난한 대학생들의 데이트 코스로 꼽힐만큼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도로와 승용차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도로가 나면서 옛길이 되어버린 전주~진안간 모래재길 역시 메타세콰이어가 울창하게 늘어선 풍경이 아름다운 명소로 꼽힌다.
하지만 요즘은 대책없이 이루어지는 개발사업으로 수많은 골목길과 걸을 만한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옛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 있는 전주 한옥마을이 있으니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하기야 영화 <워낭소리>에 나온 경북 봉화군 그 아름다운 길 조차도 관광객들이 타고 온 버스와 승용차가 점령해버렸다니 현대인들이 걷기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제대로 된 걷기를 해 볼라치면 아무래도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시간이 돈인 시대이니 역시 걷기에도 적절한 비용을 지불해야 그만큼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터다. 그래서인지 걷기에 관한 책들이 뒤를 이어 쏟아지고 있다. 국내부터 해외까지 그 내용도 다양하고 형식도 새롭다.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전국 23곳의 옛길들을 풍성한 사진과 더불어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 이 책은 걷기를 주제로 한 다른 책들과 많이 다르다. 우리 옛길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길에 기대어 삶을 꾸려가던 조상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담겨 있는 까닭이다.
문경새재박물관을 리모델링해서 새로 개관한 ‘옛길박물관에서 추천하는 걷고 싶은 우리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옛길이 담고 있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물의 걸음걸이를 따라가다’, ‘너와 나를 잇는 고개’, ‘풍경이 된 사람들을 찾아서’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물길, 고갯길, 멋스런 풍경 등 세 가지 테마를 여행가이자 시인인 글쓴이 김산환이 직접 걷고 체험하며 찍은 사진과 글을 통해 우리 옛길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한다.
옛길에는 배산임수라 하여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작은 냇가라도 있어 식수원이자 농업용수의 기능을 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작은 고갯길에는 주막이 있어 먼 길 나서는 나그네의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탁주 한 사발로 깔깔한 목을 축이는 멋이 있었다. 풍광 좋은 곳이면 주변을 해치지 않는 고즈넉한 정자 하나 지어놓고 우리 조상들은 풍류를 노래했었다.
글쓴이는 이런 우리 옛길의 멋스러움을 자연스레 따라간다. 아름다운 옛길을 그대로 옮겨놓은 다양한 사진과 가는 길을 쉽게 보여주는 지도, 먹거리와 볼거리, 그리고 싸게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은 독자들이 덤으로 만나는 큰 선물이다.
멀리 남쪽 제주의 올레(올레는 집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에서 북쪽 강원도 평창 대관령까지의 옛길을 촘촘하게 엮은 이 책의 미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제주의 올레는 “단순히 길의 의미를 넘어서 사람 사이의 소통을 의미한다. 시대와 시대의 연결을 의미”하며 길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존재감을 부각한다.
숲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순창 출신 춘원 임종국이 조성한 장성 축령산.
“고갯마루를 넘기 전에 뒤를 돌아보는 일이다. 숲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던 거룩한 이를 떠올려 보는 일이다. 나무를 심다가 스스로 나무가 된 이”를 보며 걷는 숲길은 어떤 감흥을 안겨줄까.
섬으로 산으로 물길따라 걷다 지친 나그네는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서 연차 한잔에 피로를 씻기도 한다.
“연꽃을 큰 사발에 넣고 연꽃이 잠길 만큼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은은한 향기가 퍼질 때면 사발 속에 보름달처럼 환한 연꽃이 핀다” 책을 따라 걷는 이에게도 연꽃 하나 둥실 떠오르지 않을까.
20년 넘게 여행을 다니며 이미 여러 권의 여행관련책자를 펴낸 글쓴이는 “걸으며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고 자연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 걷기여행의 목적”이라며 “몸이 아닌 마음이 원할 때 쉬는 버릇을 들이라”고 권한다. 그는 또 “가지 않는 길은 지워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길에 스민 숱한 이야기와 삶의 애환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이라며 옛길에 얽힌 인연을 강조한다.
스피드와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서 걷기는 어쩌면 퇴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걷는다는 것에는 원초적인 본성이 숨겨져 있다. 땅을 밟고 숲을 호흡하고 하늘을 보며 느리게 걸으면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수많은 고승들과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며 화두를 고민했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는 괴테를 보고 시계를 맞추기도 했다지 않은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걸었다 해서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책로가 있다.
굳이 철학자가 아니어도 좋다. 우리 옛 길을 걸으며 그 길에 나섰던 이들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길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길에 스민 숱한 이야기와 삶의 애환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이다”이 책에서 만난 글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