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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 |
[서평] 수양버들
관리자(2009-05-08 14:17:47)
창조적 해찰, 꾀꼬리보다는 수양버들 이희중  시인, 문학평론가 너를 내 생의 강가에 세워두리. / 바람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처럼 너는 바람을 타고 / 네 뒤의 산과 네 생과 또 내 생, 그리고 사랑의 찬연한 눈빛, / 네 발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나는 보리. / 너는 물을 향해 잎을 피우고 / […] / 휘휘 늘어진 나를 잡고 너는 저 강 언덕까지 그네를 타거라. / 산이 마른 이마에 닿는구나. 산을 만지고 오너라. / 달이 산마루에 솟았다. 달을 만지고 오너라. / 등을 살살 밀어줄게 너는 꽃을 가져오너라. / […] / 하늘거리는 치맛단을 잔물결이 잡을지라도 / 한 잎 손을 놓지 말거라. / 지워지지 않을 내 생의 강가에 너를 세워두고 / 나는 너를 보리. 하얀 맨발의 저 여인, / 내 몸과 생각의 생살을 트는 / 이 아름다운 봄날, / 같은 이불을 들추고 들어가 실버들가지로 나란히 눕고 싶은 색의(色衣), 봄비. 김용택 시인이 새로 낸 시집 「수양버들」의 장정은 튄다. 이 시집을 펴낸 출판사에서 내는 시집들이 예외 없이 걸치는 ‘유니폼’이 아니다. 당연히 ‘백넘버’도 찍혀 있지 않다. 일단 두꺼운 표지를 한 것도 남다르고, 옛 그림을 표지의 바탕으로 삼은 것도 특이하다. 앞 표지는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의 대략 80퍼센트를 옮겨두었는데, 그림의 제목으로 삼은 화가의 한시, 즉 화제(畵題)가 있던 자리에 시집의 제목을 대체했다. 뒷 표지는 앞 그림의 여백을 두 배 정도 키워서 깔아 앞표지와 색을 맞추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예사로이 선택된 것이 아닌 듯하다. 속표지에는 이 그림 중 말과 말 탄 사람 부분만 떼어 보여주고 있으며, 목차 다음 면에서 전면에 걸쳐 그림 속 버드나무만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 열 번째 수록 시 「색의」는 그림 제목을 부제로 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표지 그림의 제시(題詩) 자리를 시집의 제목인 ‘수양버들’로 대체하면서 그림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무심코 표지를 보면 그림 속의 말 탄 사람은 수양버들의 새잎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그림에서 말 탄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은 그림의 제목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수양버들 가지에 앉은 꾀꼬리 한 쌍이다. 자세히 보면 입을 벌려 지저귀고 있는 놈은 위쪽의 꾀꼬리인데, 사람의 얼굴은 그쪽을 향해 있다. 이와 같은 ‘왜곡’은 물론 장정을 한 미술가의 의도인데, 그 근원은 시인의 의도이다.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은 이 그림에서 꾀꼬리가 아닌 수양버들의 신록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전통의 창조적 변용, 다른 말로 창조적 해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즘에서 표제 시 「수양버들」을 보자. 시인은 어떤 종류의 나무에 대해 각별한 호감을 표한다. 첫줄 “너를 내 생의 강가에 세워두리”와 끝줄 “지워지지 않을 내 생의 강가에 너를 세워두고 나는 너를 보리”가 이를 단적으로 뒷받침한다. 시인은 이 나무가 강에 아주 가까이에서 산다는 점, 물을 향해 잎을 피운다는 점, 바람에 가지가 율동 있게 하늘거린다는 점을 가상하게 보았다. 앞 두 가지는 이 식물의 생태와 관련되는 사실이며, 마지막 것은 식물답지 않게 ‘움직이는’ 성질을 중시한 결과이다. 수양버들은 시인이 지향하는 풍경의 중심에 있다. 곁에 강을 두고, 바람을 타며 건너편 산과 저 멀리 달을 만질 수 있고, 가까운 데 꽃을 가져올 수 있다. 여기서 나열된 강, 산, 달, 꽃은, 김용택 시인의 시에서 자주 얼굴을 내미는 ‘김용택표’ 풍경의 구성요소들인데, 수양버들은 이 모든 것들과 친밀하게 잘 어울린다. 시인이 한 생애 가까이 세워 두고 지켜보겠다는 ‘수양버들’은 시인 자신과 분간되지 않는다. 눈길을 붙잡는 구절은 여덟째 줄 “휘휘 늘어진 나를 잡고”이다. 이 작품 전반에 걸쳐 시인은, 각별한 친밀감을 표시하고는 있지만, 대상인 수양버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나무의 일부가 된다. 문면만 보자면 ‘휘휘 늘어진’ 것은 ‘나’이고, ‘나를 잡’는 것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입적 일탈의 흔적은 끝에서 세 번째 줄 “한 잎 손을 놓지 말거라”에까지 이어 읽게 한다. 이 맥락에서 시인은 수양버들의 생태에 직접 간여하며 그 조화로운 모습을 함께 구현하는 존재가 되었다. 「색의」는 새봄을 맞아 돋아난 신록을 “색옷”으로 보아 이를 바라보는 들뜬 감흥을 ‘육감적인’인 말로 표현한, 김용택 시인의 소작에서 낯이 선 성향의 작품인데, 그 후반부에, 시집의 표지에서 빼두었던 ‘마상청앵도’의 제시(題詩)가 전문 삽입되었다. “꽃 아래 어여쁜 여인이 있어”에서 “보슬비 자욱이 끌어다가 봄 강에 비단을 짜네”까지 여섯 행이 위 제시의 전문 번역이다. 삽입된 시의 해석에서도 김용택 시인의 창조적 변용, 달리 말해 창조적 해찰은 작동한다. 시인은, 원시에서는 꾀꼬리를 비유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 ‘어여쁜 여인’ 즉, 가인(佳人)을 유독 주목하여 봄 풍경을 구경하는 ‘선정적’ 의도를 드러내는 중요한 대목에 세웠다. 모두 창조적 시인에게 주어진 권능이다.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마지막 네 행이다. 김홍도도 지워지고 꾀꼬리도 물러서고 다만 그림에서 시인의 입맛, 눈맛에 맞는 수양버들과 봄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싼 봄날이 남았다. 쓸 종이가 부족해 소상히 못 쓰지만, 나는 김용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성우에게」, 「그네」, 「가뭄」 같은 시를 각별하게 읽었다. 「성우에게」는 가난하고 외롭지만 시에 대한 열정을 지닌 후배 시인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표면의 의도 뒤에 시인의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날 버리고 떠난 여자의 자리는 꽃잎 한 장 없었다. 아픈 그 세월 그 외로움이 꽃이 되었다”라거나, “시로, 시가, 시만이 하루의 전부였던 나는 너였다”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시인의 자세와 말투와 고백의 냄새가 나는 좋다. 「가뭄?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바람에 끌려가는 불쌍한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시…… 바람도 없고, 오가는 이 없는 빈 들이 멀리까지 쓸쓸하다”같은 구절에 밑줄을 긋게 하고 그 제목 옆에 표시를 하게 한다. 자경록 같고 교훈 같은 말씀이 너무 억세 보이는 「그네?에서도 “아이들이 그네를 향해 달리는 저 봄날처럼 / 꿈은 하찮아서 때로 서럽고 아름답지 않느냐”, “빈 그네가 눈부시다”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김용택 시의 새로운 풍경을 확인하는 것 같아 즐겁다. 과거의 굴곡과 상처를 돌아보는 이러한 태도는 이들 시편들 말고도 더 있어서 새 시집에서 하나의 줄기를 만들고 있는 형국이다. 두서없이 골라보면, “산을 기대고 선 내 슬픈 등”(「울어라 봄바람아」, “구룡폭포 물소리같이 흩어지는 / 내 외로움도, 내 슬픔도, 내 울음도, 그러나 / 나는 세상에 들키기 싫다”(「야반도주」), “어떤 이별도 이제 그다지 슬프지 않다”(「2월」), “돌아보지 않고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딛고 선 삶은 나무처럼 아름다우리”(「산중에서 며칠」) 등에서 또한 그렇다. 사실 지난 날 김용택의 시의 주류는 “시 몇편 써놓고 / 밖에 나가니 / 세상 부러울 게 없다”(「이순」)와 같은 ‘오늘’의 삶에 대한 긍정적 저변 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연에 에워싸인 맑고 깨끗한 서정, 날선 풍자, 해학과 능청 그리고 위에서 살핀 창조적 해찰 등이 김용택 시가 펼쳐 보인 복합적 시세계에 붙일, 빠뜨릴 수 없는 명패들이겠으나 이번 시집에서 일말의 애상적 회억 또는 관조의 조짐을 따로 기록해 두고 싶다. 이 마음은 연륜의 꽉찬 시인에게 거는 기대와 다르지 않다. 곁들여 물음도 두어 가지 적어두자. 「조금은 오래된 그림 한 장」에서 시인의 아내가 삶은 것은 고구마인가, 감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 여자 생각」의 “산밑 작은 마을, 여자는 사랑의 합의를 본 듯 발걸음이 경쾌하고 몸은 싱그러워진다”에서 ‘사랑의 합의’는 무엇일까. 마음과 관련된 것일까, 몸과 관련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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