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 |
[독자 시평] 연극<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관리자(2009-05-08 14:13:30)
연극<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극단 작은 소동) 4월1일~4월13일
지독한 성장의 미학
이현수 시인
성장은 왜 항상 고통과 슬픔, 그리고 상실을 동반하는 것일까. 순수성을 온전히 담고 성장한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일까. 상실을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한 진실은 늘 슬프고 불편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 개인이 성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는 것 같다. 쓸데없이 커다란 몸과 그 몸으로는 도저히 다시 기어 들어갈 수 없는, 어쩌다 한 번씩 먼발치에서나 들여다볼 수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어른과 아이는 하나의 몸을 나눠 가진 각각의 존재이며 그 사이에는 너무 긴 암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2일 익산역 바로 옆(창인동 1가 9-3)에 위치한 소극장 아르케를 찾았다. 연극<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브라질의 소설가 조제 마우로 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누구나 제목쯤은 알고 있는 성장소설의 고전으로 극단 작은 소·동이 정성껏 준비한 2009년 첫 공연이었다. 이도현 대표는 2009년 첫 작품을 고르면서 세대 간의 소통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제제만한 나이는 아니더라도 제제의 형인 또또까만한 나이였을 때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밍기뉴'같은 나무를 갖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 밖의 세세한 감정들은 떠올리기 힘들다. 그게 바로 필자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브라질 상파울루 부근 작은 도시 방구시. 여섯 살 제제는 실직한 아빠와 공장에 다니는 엄마, 잔디라 누나와 글로리아 누나, 그리고 또또까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장난이 심한 말썽꾸러기 제제는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도 작은 악마로 불리며 늘 구박을 받고 지낸다.
그러나 제제는 호기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과 소외 등을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건 라임오렌지나무인 '밍기뉴'를 통해서다. 제제는 밍기뉴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슬픔을 치유해 나간다. 밍기뉴는 제제가 만든 환상 세계의 상징인 셈인데 필자는 밍기뉴야말로 또 하나의 제제가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단절된 대화와 그리움에 의한 아픔이 분신 밍기뉴를 만드는데 작용했으며 이를 통해서만 제제는 위로를 받는 것이다.
이렇듯 제제가 밍기뉴와 만드는 외롭고도 순수한 교감은 뽀루뚜까를 알게 되면서 점차 진정한 사랑으로 변화해 나간다. 뽀루뚜까는 제제의 순진성과 천진함을 알아주는 친구로 가족과 이웃에게 느꼈던 소외를 한꺼번에 충족시켜준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상실감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뽀루뚜까의 죽음 때문이다.
뽀루뚜까의 죽음은 제제가 밍기뉴와 뽀루뚜까를 중심으로 지켜오던 견고한 환상의 세계에서 외롭고 괴로운 현실세계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제는 환상에서 현실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지독한 고통의 통과의례를 경험하며 오래 앓는다. 그리고 밍기뉴 아래에서 죽은 뽀루뚜까와의 대화를 나누며 환상 세계와 작별하고 점차 어른이 되어 간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보면 등장인물 중 역시 주인공 제제의 양면성이 가장 흥미롭다. 제제라는 인물이 그저 착하고 순수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에서도 ‘악마’라고 표현되는 것처럼 제제의 몇몇 모습은 어른들의 시각에서 보면 불유쾌할 수밖에 없다. 매번 새로운 장난을 생각해 이웃을 괴롭히고, 자신을 구박하는 누나에게 반항하고 욕을 하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지 못하는 가난한 아버지에게 원망의 말을 하며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제의 장난과 반항이 정말 ‘악마’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제의 장난은 가난과 소외 속에서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한 행동으로 보이기에 더 애잔한 면이 있다. 따라서 꽃병이 비어있는 선생님을 위해 꽃을 꺾어오거나(다른 집에서 몰래 꺾어온 것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금세 뉘우치고 아버지께 드릴 담배를 사기 위해 구두를 닦는 모습 등 타인을 위하는 제제의 이러저러한 모습들은 서로 맞물리며 독자나 관객의 유년시절을 자극함으로써 공감과 사랑을 받는 요소로 작용한다.
“우리 주변 수많은 어린 악동들에게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 한 번이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살아 움직이게도 하고, 함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라 생각”한다는 이도현 대표의 말처럼 관객의 대부분이 어린 아이와 함께한 가족들이었다. 그러니 공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아쉬움도 몇 개 덧붙인다.
제제역을 맡은 고동현 군과 또또까 역을 맡은 하창우 군은 만만찮은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능숙하게 극을 이끌어갔다. 물론 대사 전달이 용이하지 않아 극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것이 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친구들의 열연이라는 점에서 웬만한 실수는 오히려 박수로 이어질 만 했다. 그러나 성인 배우들의 대사전달 미숙은 조금 쓴 소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발음이 부정확했던 몇몇 부분과 어색한 연기는 두고두고 아쉬운 마음으로 남기 때문이다. 또한 극 마지막 부분에서 효과를 주기위해 뿌린 스모크의 냄새가 너무 독해 여운을 남겨야 할 장면에서 다수의 관객들이 연기를 피해 부채질을 해야 했던 것은 관객에 대한 작은 배려를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가 가장 불편했던 것은 가족이 함께 즐기는 아동극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제제가 실직한 아버지를 위해 거리의 악사 아리오발도에게 배운 “나는 야한 여자가 좋아, 나는 야한 여자를 원해”라는 노래의 선정적 가사. 아니 이는 제쳐두고라도 이 노래를 듣고 오히려 화가 난 아버지가 벨트를 풀어 제제를 마구 내려치는 장면은 어린 관객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우려될 정도였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창작극이 아니라 대본에 충실한 나머지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았던 공연이 일정의 마지막이었던 만큼 그간의 관객 반응과 관객층을 살펴 다소 보완이 필요하지는 않았나 싶다(이도현 대표 또한 이번 연극을 시작할 때에는 사실 아동관객이 많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전마다 이어지는 관객의 박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덕분에 극의 흐름은 여러 번 끊어졌지만 그만큼 연극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많이 찾아왔다면 극단 작은 소동과 아르케 소극장의 문이 대중 앞에 낮아져있고 관객과 편안한 소통을 나누고 있다는 좋은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관객과의 소통을 꿈꿔온 작은 소동은 2009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시작으로 가족극 시리즈 두 번째 공연 <아빠는 새가 아니다>를 준비하고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가슴 따뜻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는 작은 소동. 부디 소극장 아르케에서 시끌벅적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며 연극계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되어줄 수 있길 기대한다.
이현수/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김용시창작기금』을 수혜 받았고,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늙어가는 판화」가 당선되었다.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시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