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 |
[문화 시평] 한불사진교류전 4월17일~30일
관리자(2009-05-08 14:12:33)
한불사진교류전 4월17일~30일
카메라로 담아낸 대상의 기호성
정주하 사진가,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사진이 어느덧 전주로 왔다. 예술(art가 아니라, fine art로서)로 치자면 가장 젊고 얇은 두께의 표현매체인 사진은 대체로 대(大)도시형이다. 사진가들이 도시뿐만 아니라 어디를 향해서든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고 작업을 하기는 하지만, 만들어진 작품의 주된 시각적 소비 장소는 커다란 도시와 박물관이 대부분이다. 이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있는데, 사진이 표현하는 대상이 자연과 가깝거나, 혹은 인간 본연의 어떤 문제에 도달해 있을수록 그 생산된 이미지의 소비는 대도시의 사람들이 더욱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런 점에서 사진은 지극히 예술(art로서)적이다. 인공적인 힘을 근본으로 하는 예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전주에 단순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내용을 싣고 문제를 드러내는 의도를 가진 사진을 만나는 일은, 60만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의 양적 크기만큼만 가능한 일이다. 사진 전문 갤러리와 사진 전문 큐레이터를 보유한 훨씬 큰 도시의 사진전시 공간들은 훨씬 많은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많은 지원을 사진가에게 할 수도 있으며, 그들 자신도 훨씬 많은 이윤을 쟁취하기도 한다. 사진/사진가로부터 말이다.
이번 전주시내에 있는 전라북도예술회관 2층에서 ‘한불 작가전’이 열렸다. 전주에서 두 번째로 열린 사진페스티벌의 일환이며, 아마도 전격적인 외국작가와의 혼합전시로는 처음 있는 일 일터이다. 한국작가 5명과 프랑스작가 8명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이론가 강혜정 씨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곳 전주에서 이러한 기획된 전시가 열린 것이 사뭇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대견한 일이기도 하다. 단지 사진페스티벌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포토페스티벌의 가치가 ‘사회적 이슈 혹은 예술적 성향을 드러내는 <국경 없는> 문화행사(정영혁: 2009 전주 포토페스티벌 디렉터)’라고 강변하더라도 이와 같은 일들이 무리 없이 진행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을 터이다.
전시는 크게 두 층위로 나뉘어졌다. 한불 작가전이니 당연히 한국과 프랑스 작가들로 나뉘었는데, 내용상으로는 대다수의 작업이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어찌 된 셈인지 한국과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이 구사하는 사진 어법이 매우 유사하며, 특이한 것은 그들이 대부분 매우 철학/사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보편적 인간의 눈/의식에는 잘 감지되지 않는 사물/상황의 이면(裏面)을 깊게 관찰하여 예리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진가의 태도는 교묘하리만치 중성적이다.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사물이 스스로 행위를 하고 발언하도록 하고는, ~ 만다 (박형근, 윤정미, 임안나, 여락, Aude TINCELIN, Tina MERANDON, Nathalie VAN DOXELL). 이들의 작업은 대체로 대상이 가진 사회적 혹은 물질적 ‘교차-기호성’을 드러내는데 많은 것을 할애하고 있으며, 대체로 시각적 흥미나 혹은 사진이 만들 수 있는 조형성 혹은 이외의 기교에 대해서는 무심한 척하는 것이 특징이다. 충분히 고려했을 흔적이 여기저기에 흥건한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깊은 관찰을 주 무기로 삼는 작업들은 자신들의 사유의 깊이가 대상의 기호성에 깊게 침투하여 드러나질 때 그 힘을 크게 느낄 수 있다. 독일의 Ulrich Tillmann과 일군의 Typology 작업이 혼재된 듯 보이며, 나아가 Richard Prince를 다른 한편으로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한편, 세상을 향한 개인적인 판단과 감성적 반응에 관점을 둔 작업(오석근, Eric BOUTTIER, Jean-sebastien CHAUVIN, Aurelie VEYRON)들도 매우 철학적이기는 매한가지이며, 동시에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출발선인 앵글의 고, 저, 앞, 뒤, 상, 하, 좌, 우의 진폭/움직임이 거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이들의 작업들이 조금씩 그 발현된 이유는 다르겠지만 대체로 시대의 흐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좋은 작업들은 카메라 뒤에서 파인더 구멍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정착하던 것이었다. 예컨대 외젠 아제나 까르띠에 브레송, 혹은 로버트 프랭크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의 작업에서는 카메라 워크로써의 어법보다는 파인더와 렌즈의 시선 축을 삭제하고 바로 대상에게 자신의 시선/의식을 꽂아버린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부터 자양분을 빨아 자신의 관찰사유 속에 그대로 용해해 버린다. 그 때문에 이들의 사진은 대체로 어렵다 (지금 읽고 있는 내 글이 어려운 만큼 말이다). 이들 작업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절대로 사진을 가까이 보아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먼 곳에서 전체를 관찰하듯이 보아야 하며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이들이 사진 안에 가져다 놓은 물체의 기호성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감동은 금물이며, 감정의 개입도 가능하면 자제해야 비로소 이들의 작전을 전술과 전략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전시장에서 보일 작업의 크기를 매우 크게 하는데 이는 단지 판매할 때 가격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걸어 놓은 ‘해석 경로’를 조금이라도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생태적으로 사이즈가 커지면 그 자체로 시선의 힘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모든 사물이 다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작은 사이즈의 사진을 손에 들거나 벽에 장식적으로 걸어 놓고 <들여다보던> 방식에서 벽면의 아래와 위를 거의 꽉 차도록 커다랗게 만들어 보일 경우 그 매체의 힘이 내용의 힘과 별개로 확장된다고 하는 것을 이들은 잘 아는 것이다. 즉 틀/액자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라다보게>하는 것으로의 힘이다 (여락, 윤정미, 임안나).
이번 전시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매우 소박한 방식의 작업인 ‘in other's homes’다. 작가의 이름은 전혀 프랑스적이 아닌 듯한 Sandrine ELBERG(샌드린 엘버그)다. 그녀의 작업내용이야 1976년부터 낸 골딘 이래로 익숙하게 보아온 것이나, 작업방식이 여전히 고전적인 터이라 오히려 눈에 들어왔다. 이 작업은 여자가 여자를 바라본 것이다. 이는 작가가 모델들을 통해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여성성이, 사실은 매우 복잡하며 다중적인 인격에서 발단한 것이라는 것을 작가가 모르고 있기에 알 수 있다. 작가와 모델은 이미 친숙하며 더는 긴장감이 없다. 따라서 보는 사람 역시도 긴장됨이 없이 일상적으로 사진에 다가가려는데, 그러나 사진 속의 여러 사물은 저마다 긴장된 기호성을 강조하고 있다. 붉고 긴 부츠와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그렇고,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교회건물의 모습이 그렇고, 침대 위의 두 인형과, 정돈된 방안에서 도발적으로 다리를 장롱의 낮은 턱 위에 올려놓고 그 역작용의 힘을 받치는 어색한 팔뚝의 근육이 그렇다. 물론 가슴이 푹 파인 원피스 뒤로 보이는 가슴의 선 역시도 그렇다. 이 작업은 그래서 작업 그 자체가 특별하기보다는 이처럼 어색한 작업이 그 이외의 세련된 작업에 어긋나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작업만이 다른 12명 작가의 작업과 확연히 다르다. 기획자의 안배가 어디까지 자율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의 작업을 양국의 작가들 사이에 대칭적으로 혹은 대척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면 포스트모던이 광풍처럼 지나간 시대의 자국을 확인하는데 조금은 이바지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전주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