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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 |
[내 인생의 멘토] 극작가 곽병창
관리자(2009-05-08 14:10:02)
‘다친 사자(獅子)’를 찾아서  - 정양 선생님 생각 삶의 길잡이가 되어 줄 이를 만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행운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이의 존재를 느끼고 가슴에 새기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평생을 다 살고 나서도, 실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홀로 고군분투하며 산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차피 외로움으로 뒤덮인 인생, 구차하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짐 지우는 게 싫어서 아예 삶의 스승이나 길잡이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이들, 설사 자랑스러워 보일지언정 그 긴 시간의 외로움은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가하면 필생의 스승, 친구, 멘토를 만나기 위해 오래오래 방황하고도 끝내 만나지 못 한 채 쓸쓸한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깊은 불운을 한탄하는 이도 있다. 혹시 그들 중에 소중한 멘토를 이미 오래 전에 만났거나 늘 곁에 두고도 그런 줄 모르고 무심하게 한 세월 살아버린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랑조차도 제 때 알아채지 못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문득 회한의 한숨을 쉬곤 하듯이, 인생의 몇몇 모퉁이를 스쳐 지난 이들 가운데 결정적인 삶의 길잡이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그게 또한 사람 일이다. 내게는 딱 그런 분이 있다. 실로 내 사람됨의 역량으로 여간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가 덜컥 되고 보니, 도대체 이 어수선한 길을 누가 가라 했을까, 나 말고 또 누가 나를 움직였을까? 문득 돌아보게 된다. 물론 문명개화하여 제각기 제 부모가 최상의 보호자요 스승인 요즘 세상에, 한 사람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정언(正言) 명령을 콕 집어서 내려주는 스승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몇 번의 결정적 순간은 있다. 내게 있어 그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봄 학기의 교내백일장이었다. 그 때 나는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는 사춘기의 지루한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과 정작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등이 머리 속에 막 뒤섞여서 장래는 불투명했고 현실은 막막했다. 백일장에서의 입선 소식조차 그렇고 그런 소소한 일상일 뿐이었지만, 문제는 부상으로 받은 시집 한 권이었다. 문예반 지도교사였던 정양선생님은 장원이나 입상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수상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막 출간되기 시작했던 오늘의 시인총서(민음사) 시집들을 한 권씩 나눠 주셨다. 이름도 잘 모르던 강은교, 황동규, 정현종, 김수영, 고은, 이성부 등의 시집들 가운데 내가 집어 들었던 것은 고은의 시집 <부활>이었고, 그 해 한 철을 나는 그 시집에 빠져 살았다. ‘동해 창망하라’로 시작하던 그 시집의 구석구석이 나에겐 살가죽이 떨리는 전율이었고, 세상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개안의 통로였다. 그 일은 결국 상대, 법대, 육사, 문리대 등을 놓고 막연히 오락가락하던 시절을 한 순간에 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양선생님은 그 뒤 2학년의 문예반 활동과 3학년 국어 시간을 통해 직접 만났다. 가끔은 수업시간에 소리북을 갖고 들어오셔서 장단을 또드락거려 주시기도 했고, 소음과 추임새가 범벅이 되어 시끄러운 임방울의 쑥대머리 공연실황 녹음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한 번도 담임이었던 적도,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내게는 선생님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뒤로 한 이삼년 정도는 시를 쓴답시고 쓸데없이 인상을 쓰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 무렵 언젠가 지나가듯이 ‘인자 눈을 떴네’ 하고 한 번 던지신 말씀에 제법 소스라치게 고무되기도 했고, ‘시보다는 산문이 좋겠다’ 하실 때는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인이 되어서 모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지만, 삶에 대한 열망보다는 절망이, 시인으로 사는 일의 엄숙함과 치열함보다는 어설픈 감상과 허무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입시에 매달리지도 않고, 문학에 영혼을 맡기지도 못 한 채, 나는 치기어린 사춘기의 마지막 자락을 그저 그렇게 소진하고 말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문학동인([78문학동인])을 만들어 시내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 동안은 꼭 남겨 둔 숙제를 하듯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몸은 이미 대학에서 처음 만난 연극의 주술에 걸려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어중간한 이중생활에 싫증을 느껴서 도망가듯이 군대에 갔다. 그러고도, 입대한 지 한참 뒤의 어느 주말 외출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선생님의 시집(<까마귀떼>, 은애시선)을 발견하고는 한 동안 다시 시를 쓰고 싶어서 홀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결국은 군대로 도망갔던 보람도 없이 제대 뒤에 더욱 깊숙하게 연극하는 일에 빠지고 말았지만, 그 때는 이미 문학과 연극이 서로 다른 두 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적당히 타협한 뒤였다. 그리고 극작을 겸한 연극쟁이가 되는 길이 내 나름의 돌파구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은 시름시름 사라졌지만 교사가 되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은 저버릴 수 없었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호구책이기도 했지만 교사가 되고 나면 아직 시인이 될 가능성도 남아있을 것 같아서였다. 모교는 못 갔지만 모교 뒤의 여학교에 발령을 받고 처음 찾아뵈었을 때, 정양 선생님은 아이들이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분위기라며, 슬쩍, 역시 지나가듯이, 말씀하셨다. 아, 분위기-. 그 시절 세상은 여전히 고달프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길거리에서는 보도블럭을 깨서 던져야 하는지 평화적으로 구호만 외쳐야 하는지 갑론을박했고, 골방의 사무실에서는 참교육의 이상과 월급쟁이 선생의 현실 사이에서 옥신각신했다. 그 팔십년대 후반의 수업시간에 장구를 들고 들어가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중머리로 가르친 일이, 지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전하는 선생 노릇에 맞는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유신 말기의 그 시절 교실에서 북을 치던 정양선생님의 모습이, 그 분위기가 어느 결엔가 스물 몇 살 총각 선생이었던 내 감수성의 바탕에 지워지지 않는 무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국악원-전통문화센터-소리축제를 거쳐 나오는 마흔 고개의 한 시기를 고스란히 그 북소리 언저리에서 살았으니 내 인생 한 복판이 다 그 무늬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조차도, 아둔하기 짝이 없는 나는 한참 세월 지난 뒤에야 깨달았으니 또한 부끄럽다. 그뿐 아니라, ‘쑥대머리와 절망의 미학’을 비롯한 선생님의 판소리 관련 논문들은 나의 가냘프던 복고취미에 통렬한 깨달음을 더해 준 날카로운 물벼락이었다. 그런즉 그 분위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그렇게 서툴고 조급하던 세월들이 다 스스로 흘러서 이제 예전보다는 더욱 자주 선생님을  뵙고 산다. 이 또한 내가 의도하고 목표로 삼아 이룬 길이 아니라 여러 우연들이 겹치고 얽혀 이루어진 결과이니, 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있어서 나를 움직이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산 것도 아니고, 세월이 가리키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온 셈인데,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을 못 벗어난 손오공 처지와 닮았다. 그래서 때로 놀랍고 때로 즐겁다. 사람에 따라 추억은 가끔 부끄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그 추억의 실타래가 고스란히 현실의 길 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민음사판 고은 시집을 받아들던 떠꺼머리 고 1 시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구석구석에 선생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어린 눈에 비쳤던 선생님의 모습과 분위기만큼 멋진 선생이 되지 못 했고, 예술로나 학문으로나 선생님의 발끝에도 아직 미치지 못 한다. 아니 그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이제 정말로 고백하거니와, 나는 선생님의 분위기를 반절도 못 닮았다. 분위기를 닮는다 했거늘 그 분위기의 반절도 못 닮았으니 나는 제자로서는 반거충이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에겐 누구나 상반된 둘 이상의 내면 풍경이 있다. 정양 선생님에게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내가 선생님의 평온한 일면만 봐 온 건 아닐까? 선생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고 있는 다른 한 면, 요즘에야 느끼게 된 ‘다친 사자’의 형상을 보지 못한 것이다. 헝클어진 갈기와 찢긴 몸의 사자 형상, 평온해 보이는 선생님의 내면에 도사린 그 형상을 나는 요즘에 들어서야 언뜻 언뜻 본다. 그 형상의 비밀이 무엇인지, 선생님이 진정 그리워한 것, 그 많은 제자들에게 진정 콕 집어 가리켜 주고 싶은 세상은 또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평온한 일면의 그늘로부터 제대로 도망가서 아주 돌아오지 않을 궁리를 해야겠다. 그게 그나마 덜 부끄러운 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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