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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 |
숨 쉬는 미술 이야기
관리자(2009-05-08 14:08:05)
‘아름다움’을 찾아   창조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최효준  전북도립미술관장 2008년 3월 시작한 <숨쉬는 미술이야기>라는 제하의 연재물을 이번 호로 마치게 되었다. 거창하게 발제했던 첫 회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의욕에 비해 그간 많이 미진했음을 느낀다. 그래도 오다가다 글에 대한 반응에 접하며 생각하건대 이 연재물이 독자 여러분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조금이나마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 호들에 실린 글을 다시 보며 몇 가지 관점을 다시 정리하여 보겠다. 우선 미술에 대한 관심은 아름다움에 대한 애호심에서 출발한다는 일견 진부한 명제이다. 미술의 경우 대상이 특정한 유물적(唯物的)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된다. 그런데 미술품이란 우리의 심미적(審美的)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수단 중 일부일 뿐이다. 사실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도 자신이 미술품을 통해 느끼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더 다가가서 그 대상의 유물적 속성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다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애호심이 정제되면 그 대상의 폭은 크게 확대된다. 인간의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인공의 아름다움보다 더 깊고 더 풍성하고, 많은 경우 무상으로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푸른 하늘 흰 구름 붉은 산 누른 들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구름을 그린 그림, 노을을 그린 그림이 좋아졌다면, 구름이나 노을 그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발견할 일이다.   여기서 권하고 싶은 것은 미술을 당대, 현대의 창작품에 국한하여 보지 말라는 것이다. 수 만년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수많은 유물들이 모두 우리의 심미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다만 과거 사람들은 ‘예술(藝術)’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고 우리가 오늘날 미술로 보는 것들이 원래 우리에게 감상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역사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유물을 통해 그 시대와 그 시대 사람과 그들의 미의식에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그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미술관을 즐겨 찾는 이가 어떤 선입견을 버린다면 박물관과 현장의 유적들 모두가 그에게 쉽게 경이와 찬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미술은 한 없이 자유로워졌고 무한한 혁신을 이루었으나 그 결과로 혼돈과 부작용 또한 초래되었다. 옥석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제 미술은 경이감, 신비감,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적지 않은 경우 투자, 투기나 속물근성 충족의 대상이거나 신선한 자극물이나 새로움의 충격을 주는 수단 정도로 바뀌었다. 일시적으로 일부가 그럴 수 있지만 늘 전부가 그럴 수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세상이 어찌어찌 하여도 경이감의 원천이었던 본래 미술의 자리를 나부터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경이감이 들지 않고 실소가 나오거나 아무 감흥을 주지 않는 미술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소양을 높일 필요는 있다. 파괴의 미학, 추(醜)의 미(美)를 추구하거나 분열된 우리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행위도 이제 예술의 범주에 들어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소통의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것’일 뿐 그것이 종래의 예술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점을 현대미술의 여러 ‘주역’들이 왕왕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진정한 주역은 결국 대중이다. 그래서 대중에게는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당당하게 예술이 아니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그 어떤 것이라도 권위 있는 미술관 등에서 전시되면 새로운 미술로 인정받고, 미술품의 내재적 가치와 무관하게 현기증 나게 높은 교환가치가 실리곤 하는 현상에 대해 대중들은 주눅 들지 말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일이다. 현대 미술의 ‘일식(日蝕)’은 언젠가는 걷힐 것이고 옥석은 구분될 것이다. 장차 옥석을 구분하게 해주는 기준은 ‘소통’이 될 것이다. 이제 다수 대중과 그들과 소통하려는 작가들 간에 깊고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미술체계 운영 주체들이 직면한 도전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념인데, 어떤 대상과 세계와 현상을 보는 관점, 가치관이 그것이다. 작가가 시각적으로 구현한 어떤 특정 가치관에 공감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관람객의 판단과 선택의 문제이다. 여기서 미술의 향수자, 즉 소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게 되며, 그 어느 기획자나 평론가도 그 판단과 선택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21세기의 미술관은 향수자 중심으로 그 기조를 완전히 전환시켜야 한다. 이제 공급자 작가를 위한 문화기관이 아니라 수요자, 향수자를 위한 문화기관을 만드는 것이 화두가 되는 것이다. 21세기 전시 기획자가 늘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작가의 가치관과 관점을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데 너무 설명적이어서도 안 되고, 그러면서도 관람객이 사전 정보 없이도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작품에 몰입이 되어 그것을 매매로 작가와 소통이 가능하게 하되 감상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전시 연출을 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고민이 담기지 않은 기획이라면 그것은 나쁜 기획이니 향수자는 당당히 지적하거나 외면할 일이다. 한편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빠져있는 서양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고래(古來)의 문화가 이제 거의 단절된 듯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그 무엇이 있다. 평상시 그런 내용에 아무 관심도 없던 젊은 여성이 결혼 후에 임신하면 태몽을 꾸듯, 집단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에 우리들 깊숙한 내면세계가 서로 연결 지워져 있다. 우리 가락에 어깨춤이 절로 나듯, 우리 선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통해 그분들의 정신세계와 그분들의 추구한 아름다움의 본질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 무엇보다 조선 시대의 문화적 수월성을 바로보고 그 빼어난 가치를 오늘 우리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인데, 선대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안목을 높이는 것이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 미술가가 될 수 있다. 어떤 대상과 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경이로움의 감정에 휩싸이고 그 경험을 다른 이와 나누거나 영속화시키려는 열망에 사로잡히고 그 열망을 실현시킬 때 그것이 가능하다. 대상과 합일이나 대상을 경이롭게 보는 과정 없이 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그것은 망상(妄想)이다. 미술이 엄청 변한 것 같지만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200년 이상 이어져온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새롭게 열리는 ‘생명을 위한 예술’의 시대에 창조적 영감은 더 이상 직업예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날의 일상 속에서도, 대화나 관계 맺기나 기록이나 탐구나 평범한 움직임 속에서도, 진정한 창조성을 우리 개개인 안에서 되찾아 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나의 오늘 하루는 진정 창조적이었는지 늘 되묻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움을 아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해, 그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작은 한 부분이요 창조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간의 관심에 감사드린다. 최효준/ 서울대 상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석사, 서울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원광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삼성미술관 수석연구원, 서울 시립미술관 수석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장 및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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