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 |
[명인명장 │ 내가 살아온 세상] 소목장 조석진
관리자(2009-05-08 14:07:15)
대패질 한번, 끌질 한번 죽은 나무에 혼을 심는다
정리 윤영래 편집장ㅣ사진 유백영 사진작가
조석진 연보
1953년 완주군 용진면에서 출생
1972년 전라북도 지방기능경기대회 금메달(가구분야)
1975년 제22회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가구분야)
동탑산업훈장 수상
1977년 배광순 여사와 결혼
1981년 전통공예대전 은상
1994년 자랑스런 신한국인 선정
1999년 제35회 캐나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심사위원(가구분야)
2002년 이탈리아 대사 감사장
대한민국 목재수장 명장 1호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19호 목가구 소목장
한옥마을 초입에 오백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길 이름도 은행나무길입니다. 같은 자리를 묵묵히 지켜오며 세상살이 바라보는 것이 살아서 나무입니다. 죽어서는 명장의 손길을 따라 아름다운 가구로 여인네들의 고운 손마디와 함께 또 기나긴 세월을 함께 합니다. 나무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명장의 손은 두툼하고 투박하기만 합니다. 그 거친 손이 빛깔 곱고 쓸모 많은 가구를 만들어 냅니다. 그이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나무들은 이제 또 새 주인을 맞아 천년을 보낼 겁니다. 평생을 목가구와 함께 한 조석진 명장을 만나러 떠납니다.
한옥에 안성맞춤 전주장
전주에 박순종씨라고 참판 벼슬한 분의 따님을 시집보낼 때 해준 가구를 보니까 문짝이 없었어요. 명칭은 원래 전주문갑장이거든요. 문갑장의 유래는, 원래 우리 한옥의 구조는 방이 작잖아요. 작으니 가구도 작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가구를 나열해서 놓으려고 보니까 장소를 많이 차지한단 말이야. 그래서 문갑 위에 올려놓았다고. 분리되는 것은 아니고. 기본 전주장은 아래 것인데 위에다 문갑을 하나 더 올려서 효율적으로 작은 공간을 이용했다는 거죠. 우리가구가 재밌는 것이 이 안에 문갑을 열면 서랍이 다 들어가 있어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중요한 문서라든지 귀중품을 넣을 수 있는 그런 곳이죠. 이게 아주 상당히 어떤 예술성이나 목가구로서는 전주를 대표할 수 있는 가구지요. 주로 나무는 옛날 소나무, 오동나무, 괴목, 참죽.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아주 그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썼어요. 여기 가구는 제가 얼핏 보기에 육칠백년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것은 느티나무, 괴목, 여기는 참죽. 그러고 이걸 칠은 옻칠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전통가구가 얼마나 예술성이 있고 그야말로 작은 공간에 활용할 수 있는 지 너무나 감탄할 정도에요. 지금이야 장비도 좋고 다 발달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날에 어떻게 그렇게 좋은 기술들이 나왔는가. 이런 것들을 보면 새삼스럽게 감회가 좋지요. 포인트 같은 경우는 목판에 문양을 좋은 걸 쓰잖아요. 좌우대칭. 이런 걸 작은 칸이지만 중심을 잡아서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런 경우는 좌우가 맞죠. 이런 게 생명이죠. 아름다운 무늬 결이 있으면 어떻게 이걸 좌우대칭을 맞추느냐. 이런 것은 제작자에 따라서 많은 기술이 필요하죠.
고창 반닫이에서 만나는 장인의 솜씨
이게 희귀한 것이 뭐가 나왔냐면, 이 장석이 이게 원래 앞에만 두는데, 좌우가 두 개 달려있단 말이에요. 아주 특이하고. 이게 한 칠십년 전에 나온 반닫이인데 칠십년 전에 제작했다는 실제 장인의 나이는 사십대에서 오십대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거든요. 그러면 실존인물은 조선 후기에 그분이죠. 솜씨가 대단히 좋으시더라고, 제가 분석해보니까. 가구의 특징을 보면 일반적으로 고창 반닫이는 장석이 화려하지 않아요. 검정 무쇠장식인데 전부 다 조각이 들어가 있어요. 이런 게 없거든요. 그런데 조각이 섬세하게 들어가 있거든요. 이런 조각이 없어요. 제가 책자를 확인해봤더니, 조각도 없고 문양도 없고 조그만한 박쥐 손잡이는 굉장하죠. 이런 것들이 상당히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이 때 당시 반닫이를 만든 분이 기술이 굉장히 좋은 분이신 거 같고. 특히 이걸 제가 가지고 올 적에 그 분한테 말씀을 들어보니까 집에 직접 목수를 데려다가 사랑채에서 기거하면서 만들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랑채에 기거했다는 것은 훌륭한 기술을 가진 거죠. 대접을 하고, 대접을 받고 제작했다더라고요. 꼼꼼히 살펴보니까 상당히 섬세하게 만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높낮이가 틀립니다. 앞보다 뒤가 낮아요. 지금 생각해 보건데 일정 수평을 넘으면 넘어진다거나 쏟아진다거나 해서 뒷쪽을 일부러 낮게 하지 않았나. 뒤가 칠미리 정도 낮아요. 그것이 실제 나무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하기는 힘들단 거죠. 이런 것이 특이하죠. 아무튼 이 자체는 상당히 섬세하게 했어요.
제작과정을 알아야 가구의 진면목을 본다
이제 아까 전주장 중에 말씀드렸지만, 지금 자꾸 이게 또 다른 것과 연결되니까. 뭔가 해놓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우리가 학술적인 거라도 옛 것을 재현해가지고 보여주고 싶다 그거에요. 그래서 실제 어떤 경우는 가구로서 짜여있는 것이, 완성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완성작품의 준비과정. 그걸 해체해서 볼 수 있는 거. 나무 구입부터 건조, 재단방법, 가공방법, 부분적으로 맞아 들어가는 걸 쫙 펴놓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가구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구나. 또 그 가구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나무 쪽수로 따지면 몇 개나 들어갈까. 이게 뭐 필요하나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구로만 짜졌다고 알지. 그 구조를 몰라요. 그걸 해체해서 딱 볼 적에 신기함을 느끼거든요. 이런 부분은 이런 구조가 들어간다. 왜 그걸 들어가야 하는가. 설명서와 쫙 펴 논 가구가 완성되었다 그거죠. 제가 그걸 하고 싶었어요, 사실은. 전체는 못한다 할지라도 대표작품 하나를 그렇게 해놓으면, 다른 작품도 이러이런 구조로 들어가니까 참 멋지다.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하다. 그 말씀을 제가 왜 드리느냐면 제가 한옥마을에 우리 전주시 명인관, 작년에 제가 6개월 있었어요. 금년에도 11월 달부터 지난 3월까지 있었는데. 거의 직접 제작을 했단 말이에요. 관광지로 많이 오시니까. 실제 그런 구조를 처음 본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우리가 조그만한 작품을 딱 짜놓으면, 그 내부 구조를 모르고 무조건 값이 비싸다고 물어봐. 얼맙니까. 얼맙니다. 그러면 비쌉니다 그래요. 설명을 해줘야 해요.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하고, 이렇게 들어갑니다 해야 해요. 어떤 경우는 제작하다보면 다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저는 항상 오시는 관광객들에게 요런 가구를 사신다면 가격을 깎지 마십시오. 이걸 설명을 해줘야 해. 그럼 그분이 이해를 해요.
“겉치레보다는 속에 더 신경을 써야”
명장이라는 칭호가 있고, 무형문화재 칭호가 있지 않습니까? 명장이라는 칭호는 그 분야에 기술이 아주 높이 경지에 다다른 사람.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문화재와는 약간 다르지요. 그러나 작업하는 공정은 아주 정밀한 듯, 정교한 듯 새로운 것을 창출할 수 있는 아이템을 하는 사람이 명장이에요. 문화재는 우리 것을 계승받은 거잖아요. 그게 정말 엄청난 노하우죠. 왜? 우리의 조상님들이 하던 걸 계승받은 건 문화재들인데. 물론 훌륭한 분이에요. 그런데 문화재를 떠나서 명장이 볼 때는 기술이 약해. 어떤 부분은 섬세해야 할 부분이 거칠단 말이지. 그런 것은 전문가는 알아요. 그런 걸 볼 적에 명장과 문화재는 엄청난 기술이 쌓여있다는 거죠. 자 그러면은 명장은 산업화 쪽이고, 문화재는 전통문화란 말이에요. 그럼 근대에는 과연 무엇으로 대표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가 끝나고 나서 향후 백년이 된다던가 그건 후대에 가서 평가를 받는단 말이에요. 가구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의 명품은 무엇인가. 우리가 옛 것을 계승받는 건 좋은데. 이 시대의 걸작품이 있어야 한단 그 말이요. 우리가 이 시대의 걸작품, 문화재로 지정받았으면 그 기술을 접목해서 이 시대에 맞는 명품은 무엇인가. 후대들이 예를 들어서 이천년 대에 조석진이란 사람이 저런 걸 만들었는데, 참 좋다. 그것을 인정을 해주자. 그 사업이 바로 전주 온브랜드 사업이에요. 시에서 지원을 해서 온브랜드사업을 하는 것이 전문디자이너와 명인과의 만남을, 제가 그걸 합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하지만 제작은 우리가 하니까. 그러나 옛 것을 탈피하지 않고, 옛 것을 많이 가져다가 제작을 하죠. 이게 앞으로 후대가 아, 그 시대에 천년전주명품이 있었다. 또 대부분이 목가구나 이런 분야는 가구를 만들면은 벽 쪽에다 붙이니까 뒤를 소홀히 한다 그 말이야. 우리가 속담에 겉치레하지 말고 속치레하자. 안보이는 데를 잘해라. 그런 관념이 있어야 해요. 장인이라면. 진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요. 속부터 봅니다. 나는 우리 온브랜드 하면서 겉치레하지 말고 속을 좀 잘하자. 이번 작품 제작을 바깥보다 안쪽을 신경 많이 썼어요. 전시관에서는 벽에다 딱 붙이지 않고 오픈시키니까 다 본다 그 말이에요. 근데 사람들이 그걸 생각하지 않고 벽에다 붙여논다고 그러니 뒤를 소홀히 한다고. 그건 잘못된 고정관념이에요. 저는 그것을 깨자. 뒤도 앞이다. 안 보인다고 소홀히 하지 말고 잘해라.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 시대의 명품이라 했는데, 취지는 참 좋아요. 그것에 같이 동참하고 있고. 그러다보니까 11월 달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공예쇼가 있어요. 거기 초청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26명인가 가는데, 우리분야엔 저 한 명이에요. 전라북도에선 저 한 명이에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6년 계약으로 들어간 공방
고향은 완주 용진이에요. 저는 사실은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요. 저희 집도 넉넉하게 잘 살았는데 어릴 적에 할아버님이 많이 아프셔갖고 집안이 어렵게 되고, 저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 학교를 가고 싶었지. 그 때 우리 아버님 하신 말씀이, 한 가지 기술만 있으면 평생 먹고 산다. 그 말이 맞아요. 왜? 지금 보십시오. 기술이 없으면 어디서 하덜 못합니다. 그때 당시 안은성 선생님이라고, 지금은 작고하셨는데. 그 때 솜씨가 아주 좋다고 소문이 나가지고 우리 아버님이 친하시니까. 그걸 알고 저를 맡겼죠. 말이 맡기는 것이지 그 때가 머슴생활이지, 사실은. 기술을 배우려면 몇 년 계약을 하고 그랬죠. 제가 졸업한 날짜를 잊어버리지 않아요. 2월 17일 날 졸업을 했는데, 어린 심정에 요즘도 아이들이 보면 학교를 안 가려고 하잖아요. 어린 심정에 중학교를 보내달랑게 우리 아버지는 안 보내줘요. 2월 17일 날 졸업을 했는데 2월 18일 날 저를 데리고 나가더라고 전주를. 알고 봤더니 이미 사전에 우리 은사님과 이야기가 된 거에요. 그 때 우리 아버지가 쌀 세 말 값을 준비를 해가지고. 그분하고 같이 식사하고 그야말로 반주 한 잔씩 하시면서 들어보니까. 아 6년을 딱 계약을 하더라고. 그 6년 계약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 기간 동안 기술을 배워라. 그리고 당신은 책임지고 가르켜주쇼. 그 대신 마지막 6년 나올 적에 장비 공구 한 벌만 사주쇼. 딱 그 말씀만 하시더라고. 그게 머슴생활이지요. 그렇게 6년을 계약을 했어요. 그 뒤에 제 동생까지 같이 맡겼어요. 제 동생하고 저하고 은사님께 같이 배웠지. 제가 육남매 장남인데, 4남 2녀에요. 제 밑에 남동생이 같이 배웠어요. 둘이 같이 있었죠. 근데 이제 다른 동료들은 월급을 받는데, 저는 월급을 안 줘요. 그래서 부럽기는 하지. 친구들은 월급을 받는데 나는 그것도 없지. 그런 고생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성공도 없고 그래 6년을 딱 계약을 해서 나와서 독립을 했죠. 그 때.
자신감만으로 도전한 기능올림픽
안은성 선생님은 다가동에 계셨고 그분은 워낙 기술이 좋아가지고 그분은 서로 모셔가려고 했어요. 선불. 한 달, 두 달 치 돈을 먼저 받고 가셨어요. 그 정도로 대접을 받고 다녔단 말이에요. 아주 훌륭한 분이신데 그분한테 6년을 배우고, 그야말로 기술테스트를 한다 치고 기능 올림픽을 딱 출전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71년돈가. 그 전에는 원래 대회가 우리 호남지방에는 전주는 없고 광주에만 있었지. 전주가 생겨가지고 그 때 전라북도 1회 대회에요. 금년에는 40횐가 되지 아마. 39회가 얼마 전에 끝났는데. 그 때 1회 대회에 나가가지고 입상을 못했어요. 처음 겪어보니까. 그래서 그 이듬해에 다시 출전을 해가지고 전라북도 예선전에서 1등을 하고 전국대회를 갔죠. 그 전에 청소년이니까 국제 기능올림픽 대회가 있어요. 그것은 만 20세 미만이란 말이에요. 그 때 내가 열일곱인가, 열여덟인가. 그 때 보니까 국가대표가 강원도 지방이더라고. 그래서 견학을 가봤어요. 전주하면 그래도 상당히 우수한 가구를 하는데. 딱 가서 보니까. 우리하곤 너무 차이가 나요. 실력을 우릴 따라올 수가 없더란 말이요. 자신감이 생겨서 야, 이 정도면 충분히 되겠다. 그래서 제가 1973년도에 전국대회를 나갔는데 떨어졌어요. 5등을 해가지고. 그 이듬해에 제 동생하고 같이 나왔어요. 1974년도에 다시 출전해가지고 그 때 금메달을 따서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이 됐지요. 동생은 떨어지고. 그 때 국제대회가 포르투갈에서 열리기로 했는데 쿠데타가 난거지. 그래서 국제대회가 무산된 거야.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하냔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서울로 도망을 갔어요. 우리 은사님 함자를 적어가지고 갔지. 그분 밑에서 배웠습니다 했더니 그냥 와라 하더라구. 김포 비행장 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못 간 사람들은 다음 대회에서 다시 나갈 자격을 부여해주겠다. 다시 도전해라. 그때 당시 우리가 선발된 인원이 한 20명이 선발됐어요. 선발됐는데 그게 재밌는 얘기가 뭔가 하니, 선발되면 면접시험 보러가요. 그 때 담당 우리 분야의 건축가 교수님들이 면접을 딱 봤는데, 우리 분야는 역대 입상을 한 번 못했어요. 못 하니까, 딱 면접을 보는데 미입상, 입상 불가라고 그 서류를 봤어요. 그 설움이 얼마나 큽니까. 하여간 악심을 품고 근 1년 동안 또 교육을 받고. 그 때 저를 지도했던 교수님이 지금도 생존해계세요. 그분이 저를 잘 봤죠. 나를 가능성이 있다 본 거지. 근데 우리가 훈련을 한다면 역대 국제대회 과제를 만든단 말이에요. 그러면 측정을 하는데 내가 봐도 틈새가 없어요. 그런데 그분은 또 돋보기, 확대경 큰 거 가지고 찾더라고. 막 이렇게 무서운 양반이에요. 그건 나를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런데 100점 만점에 70점, 80점이 안 넘어요. 실제로는 90점이 넘는 점수야. 내가 너무나 훈련을 오래하다 보니까 그걸 알아버렸어요. 그 분이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 90점이 넘는 선수를 70, 80밖에 안 줘요.
한국 최초의 기능올림픽 금메달
그 때 합숙 훈련 받고 가게 될 무렵에 저희 집이 어려웠어요. 어머님이 아프시고, 할머니도 중풍으로 계시고. 국제대회를 가야하는데, 용돈이 그 때 달라가 100불이면 5만원이라고 그걸 가지고 갈 돈도 없지. 지금은 국가 재정이 단복을 다 입고, 그 때는 양복 밖에 안 해줬어요. 그때 우리 기능올림픽 담당했던 데가 지금 산업인력공단, 그때는 전주 상공회의소였어요. 그분, 이종덕 회장님이 그 때 물심양면으로 다 해주셨죠. 국제대회 갔는데 집이 그렇게 어려우니까. 뭔 정신이 있겠습니까. 그때 국제대회가 포르투갈은 무산이 되고 스페인 마드리드로 결정이 됐으니까 마드리드로 가서 그 때가 1975년 9월 달이었어요. 대회를 하는데 그때 1등을 했는데 제가 자신을 가졌어요. 재밌는 것이 뭔고 하니 경기장 내에 관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계를 우리보고 못 쓰게 해요. 위험하니까. 그래서 서랍장의 홈을 파달라고 했더니 우리는 위험하니까 자기가 해주고. 정확히 선을 긋고 파달라고 했더니 안 파주는 거에요. 당신 실수했으니까 다시 확인해라. 자꾸 트집을 잡더라고, 나를. 그래서 통역한테 물어보니까, 당신 선물 갖고 왔냐고 물어봐. 그 때 복주머니랑 선물을 주니까, 그 때 해주더라고. 이게 완벽했죠. 끝내놓고 숙소 들어가니까 우리 담당 통역이 딱 보더니, 중간 중간 채점을 하거든요. 진행과정을. 아직까지는 제가 1위를 나가고 있다. 이제 경기 딱 끝나고 채점하는 기간엔 우리가 관광을 하러가니까 끝나고 그 때, 심사위원장이 스위스 사람이었어요. 그분 만났더니 저보고 축하한다고, 거기서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금메달을 땄어요. 대회는 보통 4일 동안. 주어진 설계도가 있으면 그거 하나 만드는데 시간이 있어요. 몇 시간동안 만들어라. 아주 정교한 작업이지요. 그래가지고 국제대회 갔다 와가지고 집에 와서 보니까, 집이 난리 났더라고. 우리 어머니는 아프니까 내가 어디 간지도 모르고. 그때 대통령 하사금이 100만원이었어요. 그 때는 집 한 채를 사고 남는 돈이었어요.
명장이 되다
그래서 공방을 시작하면서 제 안식구를 만났는데. 사실 육남매 장남이다 보니까. 또 집안 환경도 어렵고 하니까 어린 나이지만, 뭔가 빨리해야겠다. 어찌 보면 제가 철이 일찍 들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정을 빨리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지금 애기엄마를 만나가지고. 왜 결혼날짜를 4월 1일 받으라는 게, 그 해 1월 달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4월 달에 결혼을 하고, 7월 달에 어머니가 또 돌아가셨어. 어머니 돌아가셔가지고, 우리 아버님이 젊으셔서 그 때 새어머니 모셔드리고. 그런 일을 한 1년 한에 일곱 번인가 치뤘어요. 공방하면서. 그리고 이제 가정에 안 좋은 일이 생길려고 그러니까, 우리 애기엄마도 아파서 병원에서 수술을 했지. 그때만 해도 기능올림픽은 청소년이란 말이에요. 나이제한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는데, 국제대회는 나이제한이 있어요. 그 때 어렴풋이 예감이 딱 맞아 들어간 부분이, 언젠가는 성인을 뽑는 대회가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명장이야. 명장 대회가 1986년부터 생겼죠. 86년부터 했는데, 나이 경력 20년에 나이가 40세 이상을 명장으로 뽑는데, 지금은 서류 심사에요. 그 때는 시험을 봤어요. 86년에는 딱 한 명 뽑았어요. 그 때는 명장을 어떻게 뽑았는고 하니. 각 지방 예선을 거쳐야 해요. 전라북도 도대표. 점수를 해서 딱 한 명을 뽑아요. 명장 칭호를 한 명 밖에 안 주니까. 그래서 86년에 한 명, 87년도에 딱 세 명을 뽑았어요. 세 명 뽑았는데, 우리 분야는 그 때 없었어요. 우리 분야가 생긴 게 88년도에 생겼어요. 그 때가 서울이었는데, 전국적으로 보니까 우리 분야를 보니까 역대 국제대회 갔다 온 친구들 날고 긴다는 친구들 다 나오니까. 데이터를 보면 알죠. 아 누가 일을 잘하는구나 하는가를. 그때가 5공 때 장세동 청문회한 날이니까. 그때 참 재밌는 심사를 했어요. 작품이 나왔는데 보니까 전부 오작이에요. 제 것만 하나 제대로 한 게. 그 때만 해도 공식칭호가 가구가 아니고, 목재수장이에요. 목재를 다 알아야한단 말이야. 집 짓는 구조도 알고, 문짝 짜는 구조도 알아야 되고, 가구도 알아야 한단 말이야. 그런 것들을 통합해서 한 것이 목재수장이야. 그래가지고 90년도까지는 시험을 봤단 말이에요. 91년도부터는 법이 바뀌어서 서류 심사로 바뀌었어. 지금 명장들 모두 서류 심사에요. 서류 심사를 하다보니까 문제가 많아 또. 서류를 봐서는 현장 실사도 가야지. 실사도 안 가고 뽑는단 말이지. 지금은 많이 보완이 됐어요. 훌륭한 분도 있지만. 거기 합당치 않은 분도 있단 말이지. 우리 때는 그래도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예선을 거쳐서 본선에서 뽑았단 거지. 지금은 서류를 딱 검토해갖고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3차 실사, 최종합격자. 그러다보니까 문제점도 많이 있고. 그런 걸 시험을 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구조는 알 정도를 보는 거지. 그런 명장 칭호라는 게 되면 1,500만원이 나왔어요. 그 때 1,500만원 받고 부부동반 14박 15일 나가는 게 있었는데. 제가 결혼 후에 신혼여행을 못 갔어요. 그 때 신혼여행이다 하고 갔죠.
“도제생활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저는 원래 목표가 있었어요. 서른 살에 집을 사고, 마흔 살까지 기반 닦고 사십대 후반부터는 저의 작품으로 가야겠다라는, 그게 안 되더라고. 집을 사면 빚을 엄청나게 지고 사가지고. 명장 되던 해에 포상을 받아가지고, 빚을 진 거 싹 청산을 했고. 문화재는 또 이 길을 걸어오니까 내가 문화재를 되겠다기 보다는 주변에서 인정을 해줘가지고 된 거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국제대회 심사를 세 번 다녀왔어요. 캐나다 몬트리올하고, 한국서 2001년에 9.11테러 나는 날 우리는 국제 대회를 했어. 개막식 하루 전날이지. 지난번에 스위스 국제 대회 때는 공교롭게도 국가대표 선수가 전라북도 전주 지역 또 그것도 이상하게 우리 고향 쪽 애들이더라고. 그래서 우리 고향 쪽에 목가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기술이 있구나 생각을 했죠. 지금 이게 아쉬움이 있다면 이런 젊은 세대들이 우리가 예전같이 배우는 그런 성향으로 배우면 좋은데 시대가 변했잖아요. 고생을 안 하려고 그래. 쉬운 길만 가려고 해. 우리가 사라질 수밖에 없어. 지금 보십시오. 내가 지금 애 하나 데리고 있는데 착해요. 대학도 나왔어요. 나이가 이제 서른 두 살인가. 우리 작은 애하고 동갑인데. 금메달도 땄어요. 이번에 전라북도 대표로 전국대회 나가고. 그런데 옛날처럼 도제생활을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일 년이나 이 년 배워가지고 공방을 차린다 그 말이야. 그럼 나는 누구하고 일을 하냔 말이야. 나도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야 하고 나와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자리. 그렇게 터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일 년 배우고 나간단 말이야. 이런 것들이 아쉽고. 요즘 또 어떤 성향인고 하니,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모든 고난의 시대가 지나고 우리 것을 즐긴다고 했잖아요. 요즘은 가끔 시내 가면 옛날에는 소위 마을의 목공소 이게 다 없어졌어요. 옛날에는 60년대, 70년대 보면 길거리에 목공소가 있어요. 옛날에는 신발장, 칼도마도 만들고, 부엌장 짜고, 아이들 책상도 만드는 목공소가 있는데 이게 없어졌어요.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 배운 스승의 경륜
독립할 때 자신이 있었어요. 6년을 마치고 나서. 사실 우리 은사님한테 제대로 배운 건 저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 작은 아버지하고, 제 동생하고 저하고. 왜 그러냐니 그 때만 해도 이상하게 위에 분도 계셨는데 다른 데서 일을 하다 오셔 가지고 1년 후에 가신 분이 있고. 소위 옛날에는 좋은 스승한테 배우는 제자는 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게 큰 결례거든요. 그 제자를 다른 사람이 승낙도 없이 데려가서 싸움이 났었어요. 엄청난 싸움이.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의, 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에게 배운달지라도 함부로 못 데려갔어요. 유일하게 저만 6년을 채워 나오고, 제 동생은 내가 나오니 곧 나왔지만은, 우리 작은 아버지도 1년 있다가 그만 두고. 실질적으로 토박이로 배운 제자는 없었어요. 그리고 기술은 지금 같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어깨너머에요. 그런데 그 말이 맞아요. 밑바닥부터 배워야 그게 기술이지. 지금같이 교과서로 배우면 이치에 맞지 않아요. 물론 교과서적으로 배울 것도 있지만은 눈에 안 보이는 노하우와 기술이 엄청나요. 그건 같이 생사고락을 안 하면 몰라요.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은 기본적인 틀이지만은, 거기에 없는 것은 손재주라든가, 나무 고르는 방법, 나무 쓰는 방법. 이런 것들은 경험에서 나온다 이 말이에요. 경험이 없는 것은 같이 밥을 먹다가 얘기해줄 수도 있고, 같이 작업하다가 이게 이렇게 하면 이게 된다 니가 한 번 생각해봐 이러거든요. 그게 맞거든요. 생각도 못한 것을 가끔 이야기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들이 눈에 안 보이는 기술이다 그 말이지. 이것이 오랜 경륜이 가야 나오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가끔 일을 하면서 보면은 이건 아닌데. 오늘 배워놓고 내일 아침이면 또 틀려요. 끝이 없다고 봐야해, 기술은.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도 백프로 만족이란 것은 못 느꼈어요. 작년에 해 논 거. 지금에 와서 보면요. 웃음이 나올 때가 있어요. 당연한 거죠. 그건 그만큼 발전했다는 거죠.
20년을 함께 보낸 한 명의 제자
내가 공방을 전주 관내에서는 했으니까. 그 때 당시 내가 제자를 20년을 데리고 있던 친구가 하나 있어요. 말이 20년이지 강산이 두 번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 친구가 스물네 살 땐가 스물세 살 땐가 저한테 왔어요. 다른 곳에서 일을 하다 왔는데. 참 부지런해요. 술도 좋아하지만 아침에 일 년 365일 아침 7시를 넘어본 적이 없어요. 출근시간을. 옛날에는 출퇴근 시간이 없어요. 저녁에 해가 뚝 떨어지면 퇴근시간이고, 해가 뜨면 출근시간이다 그 말이야. 이 친구가 20년 있다가 그만뒀는데, 그 때 IMF와가지고. 아쉽더라고. 일 잘해요. 전주에서는 알아줘요. 내가 제대로 키운 제자는 거기 하나 있고. 진짜 잘 해. 그 친구는 월급을 주고 있었지만은 그 20년이란 세월을. 이 기술을 배운다라는 입장이 저는 딱 두 가지에요. 집안이 다리 뻗고 살만해야 혀. 배우는 동안은 집에 돈 안 갖다 주더라도 먹고 살만해야 돼. 그래야 맘 편하게 배우지. 그게 첫째. 두 번째는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된다는 거. 지금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 건축과를 나왔다던가. 건축과면 목재를 하니까 걔네를 데려다가 우리가 돈을 받고 가르쳐야 해요. 그런데 즈그들이 배웠다고 월급 받으려고 해요. 대학교 전공 있지 않습니까. 안 맞아요, 적성이. 그리고 실제 오면 불편해. 왜냐면 내 일을 가르쳐야해. 그럼 결론은 뭐냐. 내 일을 알려면, 니가 돈을 주고 배워라 그 말에요. 헌데 그 기술 갖곤 안 된다 그 말이야. 대학교도 지금 요즘 산업 디자인과, 목공예과, 가구디자인과 있지 않습니까? 그럼 학생들이 대학 졸업하고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야 하는데 고 기능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기능올림픽 국제대회 가는 애들이 학교를 특차로 많이 가요. 홍대나 중앙대나. 걔들 실력 좋아요. 교수님 못 따라오죠. 기본 실력이 있으니까. 기능올림픽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국제대회까지 했다 그 말이에요. 걔네들은 우리와 같이 할 수 있다고. 그래서 공업계 고등학교나, 대학도 실지 가르칠 수 있는 교수와 교사가 절실히 필요해요. 학교 가서 보면 장비가 엄청나게 좋아요, 목공 장비가. 그 장비를 제대로 활용할 교사가 없어요. 너무 안타까워. 그래도 대학은 조금 나슬 수 있어.
“백년을 보고 나무를 심어야”
요즘은 생활가구 만드는 거 취미로 만드는 것이 생겼단 말이지. 그것이 옛날로 보면 목공소라 보면 되는데. 이 사람들이 생계 위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은 어떤 분들은 취미 활동으로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러다 보니까 공직에 있다가 정년퇴직하신 분들이 퇴직했으니까 놀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이 오히려 우리한테 와가지고 배우고 싶다고 하죠. 수강료를 주고. 그런 성향이 왔어요. 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근데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냐면 목재를 우리가 쓸 걸 사재기를 해버려요. 옛날에 목재는요. 우리 아까 내가 쓰는 나무, 오동나무네, 괴목이네, 참죽이네 이런 나무들이 노인 양반들이 담배값이나 한다고 어디 가서 나무 있으면 수고비하고 점심 값만 주고 가져가지 이런 성향이었거든요. 그런데 생활가구 하는 사람들이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돈은 많으니까 막 사 논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무 값이 올라갔어. 우리가 살려고 보니까 그 나무 값이 얼마냔 말이에요. 물론 그래도 좋은 현상이죠. 우리 것을 찾고 취미를 갖는다는 건. 그런데 유통질서가 조금 잘못되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고 있어요. 또 하나는 목재를 고르는데, 저도 나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생 목재로 가구를 제작하면 세계에 나가도 빠지지 않아요. 아주 우수합니다. 그러면은 외국의 나무같이 일이십 년에 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후대를 생각해서라도 좋은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제 산림조합이나 산림청에서 자문이 와요. 그러면 무슨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면, 저는 제일 일 순위가 괴목을 택해요. 그것은 향후 백 년이 가서나 쓸 수 있으니까 우리 후세를 본다라면 지금 심어야죠. 가로수 엄청나게 심었잖아요. 그런 목재. 오동나무는 속성수니까. 옛날에는 오동나무는 있잖아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장을 해준다. 그 유래가 뭔고 하니. 딸을 나면서 시집을 보낼 때까지 십사 오 년, 칠팔 년 된단 말에요. 그만큼 빨리 크고 오동나무가 좋단 얘기죠. 오동나무가 좋다는 건, 첫째는 가볍고, 두 번째는 옷에 좀을 안쳐요. 나무가 벌레가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옷에 좀을 안치고. 세 번째는 여름 장마 때, 우기 때 습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럼 오동나무 장롱 속에 딱 넣어두면 오동나무가 습기를 다 빨아들여요. 우리가 한약장을 오동나무로 짭니다. 오동나무를 선호하는데, 오동나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 골격만큼은 단단한 걸 써야 한다는 거죠. 오동나무를 쓸 가구도 있고, 괴목 쓸 가구도 있고 참죽을 쓸 가구도 있다. 가구 하나를 짤 때도 용도에 맞게 쓰는 거죠.
김치도 손맛, 나무도 마찬가지
나는 손이 크다고 생각 안 하는데, 굳은살은 생길 수밖에 없죠.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손 거칠어진다고 장갑도 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손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장갑끼면 불편해요, 사실. 우리가 김치 담글 때 보면 손맛하고 기다란 장갑, 그 맛이 다르잖아요. 장갑이 가끔 목재를 든다하면 장갑이 답답하더라고. 뭐 작업을 하는 사람이 항상 손이 거칠 수밖에 없죠. 맛이 틀려. 그래서 장갑을 안 껴요. 동생은 일을 하다가 지금은 인테리어쪽으로 갔어요. 동생도 일 잘했거든요. 우리 은사님 밑에 있으면서 나하고 같이 하니까. 적성에 또 안 맞더라고. 인테리어 쪽으로 갔는데, 우리는 공교롭게 저도 목가구 일을 하고 있고, 동생도 이 쪽을 하고 있죠. 다 기능인 집안이여. 셋째 동생은 자동차 정비. 막둥이 동생은 대구에서 직물회사 운영하고 있고. 제일모직에 있다가 회사 한 쪽을 떼어 나왔더라고. 식구들이 기능 쪽으로 다 갔어요. 아들 둘이 있는데 둘째아들은 가구일을 할려나 모르겠어요. 지금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저도 그 생각이 든 것이. 이게 요즘 주 5일제 근무니까. 어떻게 살살 달래서 같이 아빠 도와주는 셈치고, 이런 식으로 끌고 나갈까. 틈나는 대로 좀 하라고 했지. 내가 가르친다고 특별하게 잘 가르친다고 할 수 없고. 은사님도 그렇고 아들 둘을 시켰어요. 그런데 큰 아들은 인테리어 쪽으로 빠졌고 둘째도 다른 쪽으로 빠졌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게 다 치워버리더라고.
성실해서 만나게 된 아내
나는 안사람하고 연애 안했어요. 중매에요. 우리 처남이 한 직장에 근무했어요. 처남이 굉장히 건실해요. 나도 비록 그 때 어린 나이지만, 처남이 같이 술자리에서 선후배니까. 아 형님 혹시 여동생 있습니까. 넌저시 우리 처남도 생각을 했더라고. 그래가지고 처남이 사실 중매했죠. 나는 그 때 처남 볼 적에 너무나 근면성실 했기에 아, 저 오빠의 동생이라면 괜찮겠다. 얼굴도 안보고 그냥, 여동생 있으면 중매하나 해주쇼.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던 거야. 솔직히 그 때 당시에. 우리 처남도, 제 자랑이 아니지만 사실 내가 성실했거든요. 그걸 알고 우리 처남도 말은 안했지만 머릿속에 두었더라고. 그게 이루어져가지고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 게 우리 장모님이 저를 보러 오셨더라고. 작업장에 와서 그 때 딱 사장님한테 물어보고, 저 어쩌냐. 우리 사람이 굉장히 정직했어요. 그냥 뭐, 자린고비도 그런 자린고비가 없었고. 올바른 일, 절대 모나는 일은 안했으니까. 자제 분도 집안에 동생 괜찮겠다 해가지고. 사실 얼굴 보기 전에 저기 집에 어른이 계시니까 생년생시 좀 빼주시오. 해가지고 저희 큰 집으로 찾아가서, 할아버님한테. 할아버님이 학자시거든요. 딱 보더니. 아버지와 상의해서 결혼해라. 그러고 나서 얼굴 봤어요. 오빠가 얘기해가지고 그렇게 이루어졌죠. 연애해서 만난 건 아니고. 그 뭐랄까. 집안 환경이 너무나 힘들어가지고 연애를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집에 환자들은 많이 있지. 동생들은 많이 있지. 그거 감당 몬하지 않습니까.
생업에 밀려 체계적인 정리를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장인들이 일만 하는 스타일이니까. 정리라고 생각도 못하는 것이, 주변에서는 그런 생각을 않죠. 정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만큼 또 여유들이 없으니까, 너무도 힘들게 하니까. 실제 힘이 좋을 적에 세상 물정 모르고 일을 열심히 했다 그거에요. 뭔가 새롭다는 게 뭐냐면 저도 정리를 하고 싶단 거에요. 실제 뭔 얘긴고 하니 대부분 어르신네 보면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초반까지 일을 열심히 하신단 말이에요. 그 때는 뭐 왕성할 때니까. 하여간 오십대 중반 넘어서부터는 아 뭔가 남기고 싶다. 그게 뭔 뜻인가 하니. 목가구를 하는 내력이란 것이 새로운 것도 하면서 우리 것도 하면서 하니까. 우리 조상님들이 쓰던 가구를 보면 고개가 참 숙여져요. 물론 좀 속된 말로 상태가 안 좋은 가구도 있고, 너무도 훌륭한 가구도 있단 말이요. 어떻게 저런 머리들이 나와 가지고 지금이야 뭐, 전문 과정이 있으니까 디자인도 하고 그러잖아요. 예전에는 그게 없잖아요. 자기 스스로 개발했단 말이죠. 보면 너무나 우수하고, 짜임새, 공법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보면은 야, 참 치열하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그런 것들을 정리를 하고 싶다 그거죠. 내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이 일만 할 수 있다면. 좋은 조상님들의 가구를 총 망라해서 전체적으로 제작을 해가지고 보여줄 수 있는. 예를 들어서 육십 년대, 오십 년대, 사십 년대, 삼십 년대, 이십 년대 그 때 당시에 어떤 가구들이 있었는지 연대별로 쫙 해가지고. 그걸 우리가 살아가는데 애들한테 청년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거. 그런 것들을 남기고 싶단 그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