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 |
[제117회 백제기행] 천년의 비밀 사리장엄을 만나다
관리자(2009-04-06 10:09:54)
천년의 비밀 사리장엄을 만나다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다시 역사가 되고
저 멀리에서 서동이 걸어온다. 한 손에는 선화의 봇짐을 들고, 한 손에는 선화의 손을 꼭 붙잡고 걸어온다. 서동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선화에게 말한다. "이곳이 내 고향입니다. 살기 좋고, 풍요로운 마을. 이곳이 익산입니다" 선화의 눈에 비춰지는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 바람 속에 간간히 배어든 마꽃의 내음….
지난 2009년 3월 14일, 사단법인 마당이 주최한 제117회 백제기행이 열렸다. 사리장엄의 발굴을 계기로 우리가 평소에 다소 무심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을 돌아보자는 의미의 기행이었다. 막 맺히기 시작한 봄기운을 시샘하듯, 평년보다 10도 이상 내려간 기온과 거센 바람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누구하나 힘든 기색 없이 백제로의 먼 여행을 나섰다. 역사가 전설이 되고, 다시 전설이 역사가 된 곳, 익산. 그 이야기를 풀어본다.
백제 무왕의 꿈. 그 시작 - 왕궁리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왕궁리 유적지였다. 왕궁(王宮)리…. 이곳이 왕궁리라고 불린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란다. 조선,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이곳은 왕궁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말 그대로 왕의 궁궐이 있었다는 것일까? 실제로 이곳에는 성곽까지도 존재하는 궁궐터가 남아있다. 더구나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따른 정원터와 위생까지도 철저하게 고려된 화장실 시설까지도 존재하는, 이곳은 분명 대규모 '왕궁(王宮)'의 유적이었다. 우리가 일본의 고대 정원과, 고대 화장실 시설을 보면서 감탄했던, 그 모든 일본 정원과 화장실들의 원형이 있는 곳이었다. 수도가 아닌 곳에 지어진 대규모 궁궐터. 더구나 주변 5km 내로 백제의 중요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매우 중요하단다. 익산천도(遷都)설. 백제 무왕의 꿈. 그 시작이 바로 이 왕궁리인 것이다.
왕궁리에는 5층으로 된 석탑이 있다. 목탑의 양식으로 지어진 석탑. 백제 특유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넓은 지붕과 새침하게 살짝 들린 네 귀. 특히 이 탑의 중요성은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내용이 유일하게 증명되는 유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한다. 백제 무광왕 때 있었다는 제석사 화재기록과 함께 언급된 사리병, 사리함과 금강경(金剛經)판 등의 유물들이 이 탑 아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흡사 전설과도 같던 이야기가 역사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곳이 왕궁리 유적지였다.
그 다음 우리가 향한 곳은 익산의 고도리. 이곳에는 10리 간격으로 두 개의 석인상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석불(石佛)이라 알려진 두 개의 석인상. 그러나 이것은 석불이라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바로 성(性)이 표현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불상(佛像)은 성(性)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석인상들은 남과 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왠지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는가? 바로 '장승'이다. 마을 앞을 지키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더구나 이 두 개의 석인상도 마을 어귀에 놓여있다. 만일 이것이 장승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역시 이 또한 우리나라 모든 장승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그런 유물이었다.
어떤 말이라 해도 세월을 함부로 증명할 수 있을까 - 미륵사지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끝내고 미륵사지 답사에 나섰다. 최근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미륵사지였다. 솔직히 미륵사지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 전하려면 「문화저널」한 권을 다 쓴다고 해도 부족하다. 다만 사리장엄과 탑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하도록 하자. 일본인들이 무너져가던 미륵사지의 서(西)탑을 보수한다는 이유로 콘크리트를 발라놓았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사리장엄은 그 서탑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올해 초에 발견되었다. 무왕 시절 백제 역사의 진실을 밝혀줄 국보급 유물의 발견.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으니, 선화공주의 존재여부에 관한 문제였다.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새겨진 발원문에 무왕의 비(妃)는 신라인 선화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선화의 존재여부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어떤 말이라 해도 세월을 함부로 증명할 수 있을까?
복원 중인 서탑 옆에는 이미 복원된 동(東)탑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서탑을 복원하면서 알게 된 자료를 통해 완벽하게 복원된 탑이라 한다. 그런데 이 탑은 우리가 생각하던 미륵사지 탑의 모습이 아니다. 이유가 뭘까? 바로 세월이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탑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 석공의 투박한 손길을 통한 것이 아니라, 그라인더의 세밀한 작업으로 만들어진 이유일 수도 있다. 허나 완벽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복원도 결코 세월까지는 복원해낼 수 없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선화의 이야기는 오죽하겠는가? 발견된 한 구절의 내용을 가지고 선화가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까? 설령 실제로 선화가 없었다할 지라도, 우리는 긴 세월동안 왜 <서동요>가, 또 선화가 이어져왔는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그 당시의 일을 알아내고, 모양을 원래로 되돌리는 것이 복원일까?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고 말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고, 또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의 복원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지는 않을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의 문제도, 또 친일청산의 문제도 단순히 눈앞의 것에 대해 옳다, 틀리다의 관점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유사하게 반복되는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무력하게 사라져버린 국가들, 왜 그들은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는지. 또 다른 반복의 현실을 살고 있는 나는,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불상의 머리뿐일까? - 연동리 석불좌상
보물 45호인 연동리 석불좌상은 석불사라는 작은 절에 있다. 약간은 어색하게 생긴 불상의 표정, 왠지 기품이 떨어지는 얼굴. 그러나 그 속에는 사연이 있었다. 실제의 머리는 정유재란 당시 왜장에 의해 잘려나갔던 것이다. 결국 잘려나간 머리는 몇 백 년이 지나도 찾지 못했고 지금 달려있는 불상의 머리는 최근에 절에 모시면서 만들어 붙여진 것이라고 하니, 이 머리를 만들면서 고증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 불상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법륭사의 백제관음. 이 불상은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가 ‘만약 일본이 침몰할 때 꼭 하나 구해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 일본의 문화유산이다. 일본 스스로도 세계에 내놓았을 때 결코 부끄럽지 않을 문화유산이라고 자평하는 그 백제관음과 연동리의 불상은 특별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바로 광배의 무늬다. 일본인 스스로가 백제관음, 구다라관음이라고 부를 만큼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이 불상의 광배 무늬는 바로 연동리 석불좌상의 무늬와 동일한 형상을 띄고 있다. 다시 말해 연동리 석불좌상은 익산의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입증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불상인 것이다.
그러나 백제관음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일본 불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님뻘 되는 연동리 석불좌상은 우리 스스로도 잘 모르는, 그저 그런 문화유산으로 취급받고 있지는 않은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논가에 있던 불상을 작은 법당에 모시고, 머리를 하나 붙인 것이 우리가 한 전부이다. 하지만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이 불상이 백제 관음에 영향을 준 불상이며, 일본인에 의해 머리를 잃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숙연하게 죄송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주인인 우리와 손님인 일본인이 느끼는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한 증거이자, 역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간직한 연동리 석불좌상. 비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불상의 머리뿐일까? 우리가 우리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 불상이 가진 역사의 아픔은 현재도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전승훈 / 마당 기획실 백제기행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