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4 |
[문 화 시 평] 아내 혹은 여자
관리자(2009-04-06 10:08:29)
두 여자 (3월6일~8월2일)
아내 혹은 여자
전승훈 마당 기획 담당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거리에 놓인 존재들을 선택하게 된다. 아이들이 밤이면 귀신이 무서워서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점점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 놓인 존재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필자 역시도 지금까지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몇 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바로 ‘너!’ 바로 ‘당신!’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나’의 상징일 뿐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열고 닫아 보아도 잘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뇌의 복잡한 구조를 헤매지 않고 돌아다닐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도 때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작은 거짓말도 곧잘 한다. 그런데 어떻게 ‘너’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당신이 보여주는 것만큼만 볼 수 있을 뿐인데 말이다.
지난 3월 6일 경기전 돌담길 끝(경원동 2가 61-1)에 위치한 '재인촌 우듬지'의 소극장을 찾았다. <害*毒>과 <The cat)에 이은 우듬지 스릴러 연작 세 번째 <두 여자>를 보기 위해서다. 연극으로선 드문 스릴러라는 장르. 연극 <두 여자>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두 명의 여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사람의 마음속에 깃든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로, 두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옴니버스극이다. 그 첫 번째 옴니버스 먼저 뜯어보자.
첫 번째 여자는 예쁜 아기가 있는 젊은 부인으로 성격이 너무나 까다로운 남편을 위해서 시장을 보고, 청소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내조하는, 조금은 수다스럽지만 그마저도 남들이 보기엔 사랑스러운 아내다. 그러나 남편은 어떤가.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의사를 밝힌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남편을 위해 친정 부모의 유산으로 병원까지 마련해줬는데 자신과 갓난아이를 버리는 남편의 태도는 아주 당당하다.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살인흉기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실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 다만 수다스럽고 아둔한 행동 뒤에 치밀한 살인계획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두 번째 옴니버스는 하루 종일 농산물 도난신고 전화나 한 두통 걸려오는 한적한 시골 파출소가 배경이다. 어느 날 옆집 여자가 실종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 남편이 살해를 해서 마당 감나무 밑에 시체를 숨긴 것 같다는 신고전화가 걸려온다. 미심쩍어 하던 경찰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집에 찾아가게 되고 남편이 수상쩍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신고전화를 한, 남의 집일에 관심과 참견이 심하고 수다스러운 옆집 여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증거를 찾아나간다.
옆집 여자에 의하면 남자는 백수여서 아내의 잔소리가 심했고 그로인해 싸움이 잦았다. 그러나 경찰들은 증거를 찾지 못하고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 채 점차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신고전화를 한 옆집 여자가 살해용의자인 남자의 내연녀이며 두 사람에 의해 아내는 감금된 상태. 남편을 애타게 부르는 아내의 목소리와 이어지는 아내의 비명소리.
이 두 개의 옴니버스를 살펴보면 등장인물의 상관관계가 무척 흥미롭다. 먼저 남편을 살펴보자. 첫 번째 옴니버스의 남편은 의사고, 두 번째 옴니버스의 남편은 백수다. 그러나 사회적 지휘와 무관하게 가정 안에서는 둘 다 아내의 우위에 존재하며 억압과 언어적 폭력(두번째 경우에는 살인)을 행사하는 남자들이다.
아내는 어떠한가. 첫 번째 옴니버스의 아내는 남편의 말에 지극히 순종적인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깝다. 물론 해당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음속으로야 오랫동안 살인을 계획했고 그를 실행에 옮겼다고는 하지만 이마저도 남편에 의해서 비롯된 결과이다. 두 번째 옴니버스의 아내는 남편과 남편의 내연녀에 의해 감금되고 죽음에 이르는 인물로 극의 후반부에 남편을 부르는 목소리와 비명을 내지르는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신고전화를 한 여자가 남자의 내연녀였다는 점에서 여자의 입을 통해 나온 아내의 모습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남편에 의해 희생된 존재 정도가 마땅하다.
그리고 여자들의 존재이다. 첫 번째 옴니버스에서는 목소리도 등장하지 않으며, 남편과의 통화를 통해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두 번째 옴니버스에서는 옆집 여자가 제3의 여자를 맡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두 옴니버스의 남편들과 함께 아내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이처럼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내와 여자의 상관관계는 엄격히 상하관계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에서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두 여자>의 포스터에는 한 마리의 나비가 서로 다른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인간 이중성의 표현이라는 대칭되지 않은 두 날개.
필자가 남편, 아내, 여자로 나누어 상관관계를 살펴보기도 했지만 아마도 <두 여자>에서의 나비는 첫 번째 옴니버스의 아내와 두 번째 옴니버스의 여자(내연녀)일 것이다. 두 여자가 각 각의 날개를 담당함으로서 한 인격체를 보여준다고 해야 작가의 의도에 근접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의 극작과 연출을 맡고 있는 김영오씨는 스릴러를 좋아해서 스릴러 연작을 하게 되었고 이번이 벌써 세 번째 공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릴러라고 하기에 조금 얼떨떨한 감이 있다. 솔직히 필자는 극의 후반까지도 스릴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연쇄살인 뉴스가 더 자극적인 현실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극에서 스릴러를 풀어나간다는 어려움 때문일까?
사실 필자는 옴니버스 형식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나비의 서로 다른 날개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 옴니버스는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극 사이의 간극은 긴장감을 놓쳐버리는 결과를 낳았을지 모른다. 또한 첫 번째 옴니버스에서 아내의 살인은 관객으로 하여금 경악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을법한 수준 안에 놓여있다고 보여 진다. 아내의 살인을 충분히 공감하며 흡수하기 때문에 관객은 스릴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옴니버스의 경우 극의 후반에 가서 반전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반전 때문에 ‘스릴러’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조금 애매한 부분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가 의도한 그야말로 ‘재미나고 으스스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두 번째 극에만 해당된 경우라고 보여 진다. 경찰관 두 명의 등장이 간혹 웃음을 만들어줬으며 특히 늙은 경찰관 역의 정찬호씨의 연기는 분량이 적었음에도 노련함과 카리스마가 주목할 만 했다.
이번 공연은 3월 6일부터 8월 2일까지 무려 150회에 걸친 도내 최장기간 공연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며, 3분기로 나누어 각각의 배역이 교체되므로 이미 공연을 본 사람도 새로운 느낌의 공연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기존의 희곡이 아닌, 스스로의 창작극들로 연극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는 '재인촌 우듬지'. 그들의 열정이 저 나비의 신비로운 날갯짓이 되어 연극계에 폭풍을 불게 할 그 날을 기대한다.